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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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를 덮고 나서 바로 생각난 책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몇 달전 읽다가 덮어두었던 책이었는데, 왜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놀랍게도, 이 책의 첫 문장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오 신기하여라!

  책을 사 놓고도 몇 년동안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늘 부끄러움과 부채감이 있었는데, 이번에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어차피 그 때 읽어봤자 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 그래서 그 때는 그렇게도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었나 보다.

   고전으로 분류될 만큼 꽤 오래 전 책인데도 시간의 흐름을 넘나드는 특이한 구성과  '프라하의 봄'이라는 독특한 사회적, 지리적 배경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묘사가 혁신적이라 느껴질 만큼신선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주인공들의 마음 속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고독감으로 헛헛하다. 사비나처럼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참을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면 허무해질텐데.

 진실한 관계 맺음이란 현실에서도 참 쉽지 않다. 얼마만큼의 진실함이 어디까지 가능한 걸까.

가족 간, 언어를, 출신 지역을, 출신 학교를, 출신 직장을, 비슷한 생활 수준과 계급 혹은 계층, 그리고 비슷한 (같은) 종교 등의 경계를 넘어서서도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해선, 나이가 들수록 회의가 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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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눈물을 흘릴 때
어빈 얄롬 지음, 임옥희 옮김 / 리더스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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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눈물을 흘린다? 오만하리만큼 자존심 강했던 철학자 니체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니체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서 결국 울게 만든다고? 도대체 어떻게?! 처음 소설 제목을 들었을 때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다. (어쨌든 이 소설 끝에서 니체는 정말로 눈물을 흘린다.)

 

   작가 어빈 얄롬은 정신의학과 교수이니 인간 정신과 심리에 대한 이해가 탁월하리란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 실존 인물을 소설이라는 틀 안에 담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한 철저한 이해 후에 가능할 것인데 그 시도 자체가 대범하다. 더구나 작가 후기에도 나와 있듯이, 소설 속 니체와 브로이어의 만남이 실제로도 정말 ‘있을 뻔’ 했었다니.

 

    이 소설에는 빈의 저명한 의학자 브로이어, 니체, 프로이트, 루 살로메 등 그 시대의 지성들이 대거 등장한다. (난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브로이어가 누군지 몰랐다.) 휴가를 떠났던 브로이어에게 루 살로메가 니체의 치료를 부탁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아마도 루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니체의 절망을 치료해 줄 것을 루는 브로이어에게 부탁한다. 이 당시는 아직 정신의학이 정식으로 인정되기 전이지만 브로이어는 이미 환자 ‘안나 O'의 사례를 통해 ’대화요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생각을 했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거의 없어서 관계에 있어 무척 서툴렀고 그래서 루와의 결별에 그만큼 더 치명적인 영혼의 상처를 입은 니체도, 겉으로는 성공한 의사의 삶을 살고 있는 브로이어도 ’안나 O'에 대한 연정, 아내와의 관계, 의사를 선택함으로써 포기한 다른 길에 대한 아쉬움 등으로 마음 속은 이미 환자다. 우여곡절 끝에 니체는 브로이어와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치료’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브로이어가 여러 계획을 통해 니체를 ‘치료’하려 들지만, 그런 브로이어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다. 그 뒤 브로이어는 방법을 바꿔서 자기를 니체에게 먼저 드러내고 그의 도움을 구함으로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한다. 그렇게 자기의 ‘문제’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니체의 '의지'와 '선택'에 관한 가차없고 냉혹한 지적 앞에 브로이어는 자기 마음속의 괴로운 진실과 대면하게 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브로이어 자신이 ‘치유’를 받는다. 이 소설의 반전이자 클라이막스는 결국 자기가 정말 원했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것을 깨달은 브로이어가 만약의 시나리오를 프로이트의 최면 도움으로 실현시켜 본 장면이다. 그것이 최면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뒤통수 맞은 느낌이라니. 어쨌든 최면에서 깨어난 후, 브로이어는 현재의 선택에 더 겸허하게 충실할 수 있게 되었고, 치료라는 명목 아래 숨기고 가렸던 모든 부분을 니체에게 말한다. 니체 역시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고독한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고독의 냉증을 치유받는다. 여기서 니체의 눈물은 그 고독의 얼음이 녹아내린 흔적이다. 다소 갑자기 극적인 변화라는 느낌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브로이어의 최면 과정에서는 나 자신도 그 장면에 깊이 몰입하여 함께하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내가 걸어온 길을 간접적으로 잠깐이나마 되돌아볼 수 있었다. 내 선택들에 대해서.

  실제로 니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 있었더라면, 그는 생의 마지막을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마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옮긴이의 말대로, 루 살로메와 안나 O에게도 좀 더 많은 부분 목소리가 부여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저 놀랄만큼 매력적인 여성으로 그려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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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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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상상력, 1,2권 모두 두껍지만 한 번 책을 들면 마지막 장까지 넘기게 할만큼 흡인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문학 부분에서 몇 달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이 전부 「1Q84」였다더라... 하는 소문에는 ‘응?’하고 머리가 갸우뚱거려진다.

   책에는 1984년과 달이 두 개 뜬 또 하나의 세계 1Q84년이 배경으로 나오는데, 작가는 아무래도 실제 일본의 1980년대를 염두에 두고 쓰지 않았겠는가. 그걸 생각하며 나는 우리나라의 1980년대를 함께 떠올렸고 그 간극에 놀랐다. 지극히 일본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이렇게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한 일반화일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일본적이라는 말 외에 달리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데) 종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 때론 변태적이라고도 느껴지는 성에 대한 개방성, 에반게리온의 아야나미 레이를 연상시키는 후카에리의 태도(후카에리의 억양 없는 말투를 상상해 보니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 ‘레이’였다. 제목은 생각이 안 나지만 언젠가 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레이를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나오는 걸 보고, 일본 사람들-혹은 남자들-은 참 저런 캐릭터를 좋아하나보군 하고 생각했었다.) 이런 것들에서 느껴지는 어떤 이질감.  덴고가 요양원의 아버지(로 살아온 사람)를 만나러 갈 때 읽었던 책 속의 책 <고양이 마을>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이 소설의 무엇에 그리 공감하고 열광한 것일까. (아니면 하루키라는 작가의 이름과 마케팅의 효과?)

어떤 결말을 내려는 것일까. 하루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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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 - 풍수와 함께 하는 잡동사니 청소
캐런 킹스턴 지음, 최이정 옮김 / 도솔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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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Clear our clutter with Feng shui)」이라는 책의  저자는 잡동사니가 에너지의 흐름을 정체시키고 그것이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의 몸과 인생에도 영향을 준다고 풍수의 관점에서 말한다. 풍수에 대해서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보류하지만, 각 물건에도 에너지 파장이 있고 쓰지 않고 쌓여 있는 물건들이 에너지의 흐름을 정체시키며, 정리 정돈되지 않은 주변이 인생까지 꼬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책을 보면서 몇 번이고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

항상 뭔가 쌓여 있는 내 방, 사무실의 책상, 옷장, 컴퓨터 안의 정리되지 않고 쌓여있는 파일들.  눈 수술 후 한 달 사이에 엄청나게 불어버린 체중과 바깥 나들이 기피증, 늘어나는 피로감과 무기력증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 더 무서운 것은 나의 정리되지 않음으로 인한 부정적 에너지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모든 것이 내 자신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라는 생각이.

 

아무리 가치있고 즐거운 일이라도 내가 힘들고 버거워지면 그 때부턴 부담스런 짐이 된다.

나를 지킬 수 있는 힘, 그것은 나를 알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책에서 식상하리만큼 자주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걸 가슴 깊이 생각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나를 아름답고 건강하게 가꾸는 것(내면이든 외면적인 것이든)은 사치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의무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몸도 완전히 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어떨 때 보면 몸이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던가? 그 안에 살고 있지만 몸에 대해선 모르는 게 훨씬 많다. 그런 몸에게도 얼마나 평소에 함부로 대하고 있는지. 계속 그대로 가다간 언젠가 몸이 '복수'를 해 올지 모른다. 자기를 알고 소중히 하는 사람이 어떤 큰 대의나 가치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알지도 못하고 있지도 않은 자아를 어떻게 버린단 말인가. 역설 같지만 알고, 갖고 있기 전에는 버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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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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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이름을 쓰면 ‘베’자가 3번, ‘르’자가 3번 반복되는 재미난 이름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첫 소설  「개미」를 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외갓집 제사에 갔다가 친척 오빠의 책장에 꽂혀 있는  「개미」를 꺼내서 보다 결국 그 날 1권을 다 읽었다. 그만큼 재미있었고 신선했다. 그 당시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내게 「개미」는 뭔가 풀어나가는 추리소설의 즐거움, ‘개미’란 곤충에 대한 놀라움과 베르베르라는 작가에 대한 충격을 동시에 주었던 작품이었다. 책 뒤에 나온 번역자 이세욱씨와 베르베르의 인터뷰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성실하고 꼼꼼한 번역 역시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 나온 개미의 연장선에 있는 「개미혁명」때까지도 베르베르에 대한 나의 기대는 굳건했다.

 

    그의 작품에 흥미를 조금씩 잃어갔던 것은 「타나토노트」때 였던 것 같다. 그 시기는 내가 책 자체에 대한 흥미와 독서량 자체가 많이 떨어졌던 때였기 때문에 꼭 베르베르의 책이 별 재미가 없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도 같지만. 한국에서 베르베르의 인기는 오히려 더 치솟고 나오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행진을 계속했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는 그의 작품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만에 우연한 계기로 베르베르의 6권짜리 시리즈 「신」을 읽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신」이라는 소설 자체보다도 여전히 등장하는 에드몽 웰즈와 그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보며 「개미」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이 더 즐거웠다.

 

    베르베르의 책은 (다 읽지 않은 상태에서 다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소설이라기보다는 백과사전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책 안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아예 한 권 더 들어있기도 하지만 워낙 박학다식한 정보의 바탕 위에 작가가 상상력을 그야말로 엄청나게 풀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물이나 사건의 전개보다도 ‘상대적이며... 백과사전’부분이 내겐 더 재미있었다. 성경, 그리스 신화, 북유럽 신화까지 서양의 ‘신’관련 내용은 전부 섭렵을 한 듯하다. 사실 1권을 읽는데 그리 책장이 잘 넘어가진 않았다. 신 후보생들이 18호 지구에서 식물-동물-인간 순서로 각자 진화의 과정을 전개해 가는 과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2권에서야 속도가 조금 붙기 시작했다. 인류의 진화, 형성 과정과 토템 선택과 그에 따른 다양한 부족, 씨족의 형성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흥미로웠다. 인간 부족의 발전 모습에서 등장하는 백과사전의 ‘심리학’ 이야기도 재미있다. 소설의 형식이지만 인류학책을 보는 것 같았달까.

 

    독자가 책 속에서 읽어내는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그 부분이 독자의 현재 관심거리나 자주 생각하는 주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 누가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다고 할 때, 그 부분을 봄으로써 그 독자가 현재 관심이 무엇이고 어떤 상태인지 대강은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한 번 크게 웃은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다: <이론이 있으면 일은 잘 돌아가지 않아도 그 이유는 알게 된다. 실천을 하면 일은 돌아가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면 일도 돌아가지 않고 그 이유도 모르게 된다.> from 78. 백과사전 머피의 법칙(2권 p. 353)

 

    책 중간에 ‘은비’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에 대한 소개와 종군 위안부 문제도 몇 페이지를 할애해 보여주는 것은 그의 한국 사랑이 잘 드러난 대목이다. (그는 왜 한국을 좋아할까?)

 

    책을 빌려준 친구는 끝은 좀 어이없게 끝난다고 했다. 결말이 어떻게 되건, 등장 인물들이 어떻게 되건 그건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18호 지구에서 벌어지는 각 부족간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들은 현재 우리 ‘1호 지구’에서 누구를 닮아 있는지, 베르베르는 어떤 역사를 쓰고 싶어하는 것인지가 지금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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