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 까칠한 글쟁이의 달콤쌉싸름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1
빌 브라이슨 지음, 김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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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1세기 전반부에 ‘빌 브라이슨’이란 존재를 알게 됐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책에 헌정(?)하는 찬사와 대략 98퍼센트쯤 일치하는, ‘거 참, 이 사람, 글 한번 시원하게 쓰네. 맞아 그거야, 나도 여행 다니면서 그런 생각 참 많이 했는데. 적시에 적타를 날리는 유머가 아주 일품이구만 그래!’ 등의 말을 내뱉으며 무릎을 치며 읽기에 바빴다.

역자도 후기에 적고 있지만 ‘문학’으로서의 여행기, 즉 기행문은 결코 만만히 볼 장르가 아니다. 특정한 스토리라인 없이 장소의 이동과 예고되지 않은 사건들을 재료로 일반적인 문학(대개 소설이나 시)이 주는 것만큼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술은 아무나 갖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기행작가들도 무작정 길을 떠나지는 않는다. 장소의 변화를 관통하는 한 줄기 테마쯤은 품고 있다. 브라이슨의 경우 베이스 노트가 이전의 독서로 얻은 여행지에 대한 역사 내지는 대략적인 정보라면, 미들 노트는 도착과 동시에 맞닥뜨린 일련의 사건에 대한 경과보고라 하겠으며, 따라서 탑 노트는 스파이시한 유머로 봄직하다.

『…영국산책』역시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상기한 패턴에 따라 진행된다. 그가 이십대에 경험한 영국과 20년의 세월을 보낸 뒤 바라본 영국이 오버랩되며 어떤 공간을 분석하는 그의 날카로운 시각에 거듭 감탄하게 만든다. 다만 한국독자들에게서 영국 북부와 남부, 웨일스나 스코틀랜드 간 정서 차이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일이 ‘스티븐 시걸’류와 ‘장 클로드 반담’식 액션의 차이점을 간추려 정리하는 것보다는 어려우리란 점, 이것이 내용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는 나의 작은 우려가 과연 ‘작은’ 정도로 끝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숨은 방해꾼은 따로 있었으니, 너무도 어이없는 교정상의 실수가 그것이다. 주부와 술부가 맞지 않는, 단번에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 문맥상의 실수는 다행히 한손으로 꼽을 정도였으나,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단어들’이 문제였다. 교정 상태를 두고 교정자의 심리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양 굴고 싶지는 않다. 허나 ‘대게’, ‘베게’, ‘눈에 띠다’ 등을 그대로 둔 것을 놓고 상상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줄곧 저렇게 쓰는 게 맞다고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아무런 의심 없이 내버려 두었다고. 이런 종류의 실수에는 솔직히 좀 화가 난다. 본문 교정과 이후 작업이 어떤지 알고 있기에 화가 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혹 재판을 찍게 되면 수정해 주리라 믿어 보는 수밖에(지금쯤은 편집자도 다 알고 있을 터).

자, 그래도 언제나 희망은 있다! 이후 읽은『…미국학』은 전반적으로 잘 돼 있었다. 내용 면에서도『…영국산책』보다는 한국인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좀 더 갖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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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 원초적 에너지를 품은 집시의 예술 살림지식총서 347
최명호 지음 / 살림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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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코르테스에 대해 손톱만큼 알고,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을 꽤 좋아했으며, 파코 데 루시아를 흠모해 왔다는 이유로 어찌어찌 흐름을 타다 이 책을 알게 됐는데, 표지 그림이 제법 잘 나와서 ‘흐음’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토종 필진들만으로 방대한 지식의 집약본을 만들고자 한 출판사의 노력과 지구력에 박수를 보내는 문제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가 그들이 ‘동류’라 언급한 프랑스의 ‘크세주’, 일본 ‘이와나미 문고’와 얼마만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와나미 쪽은 모르지만 크세주―책에서는 ‘끄세즈’라 적고 있지만, 현행 외국어 표기법과 약간의 미학적 이유로 나는 이렇게 쓰는 쪽을 택한다―는 좀 아는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자면, 크세주는 상당히 알찬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타이틀 아래 오로지 이 ‘앎’에만 천착한 만듦새가 특히 그렇다―현재는 상당수가 헌책방에서 1유로 안팎으로 팔리고 있지만, 뭐 그런 게 문고판의 당연한 운명인 듯한 분위기다. 그래서 얼마간 책장을 넘기던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일단 책을 덮었다. 플라멩코의 하위 분류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잠시 쉬어 갈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플라멩코』와 시리즈의 다른 책『왜 그 음식은 먹지 않을까』를 동시에 읽었는데, 감상은 딱 잘라 말해 “글이 참 별로다.”이다. 교정도 별로 잘 돼 있지 않다. 무릇 학자가 되는 데는 몇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보는데,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정연하고 맵시 있게 펼쳐 보일 능력을 갖추는 것도 연구 분량이나 기지가 넘치는 연구 방향 설정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묘사법이 겨우 ‘버터 냄새가 난다’―플라멩코 본연의 정서가 흐려지거나 변질된 상태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는 식(그것도 몇 차례나!)으로 흐르는 것도 그렇고, 종합예술인 플라멩코를 연주, 노래, 춤으로 나누어 한번 고찰해보는 일(즉 이 책을 쓴 목적 내지는 이 책의 존재 이유)이 ‘플라멩코의 혼’을 오염시키는 행위라는 ‘경고’의 잦은 등장은 솔직히 짜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 손바닥만 한 책에서는 경고 두 번도 많다. 저자가 제안한 오묘한 플라멩코 세계로의 초대에 정신이 혼미해져 독자가 그 ‘고귀한 혼’을 훼손시키고 있음을 망각할 정도로 잘 쓴 책은 아니기에. (물론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 더 다듬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이 먹히지 않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이런 모든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책에서 얻은 것이라면, 영화「플라멩코」와 뮤지션 카마론 데 라 이슬라의 존재를 알게 된 일이다. 사우라 감독의 필모를 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199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플라멩코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담백하게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플라멩코 연구회쯤 되는 단체라면 꼭 구해다 봐야 할 듯싶었다. 저자가 말한 대로 호아킨 코르테스의 파루카는 멋졌으며, ‘파코 씨’의 탕고스도 훌륭했다.

저자의 괜한 고집에 대해 반대 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책 표제는 플라멩‘코’지만 본문에서 그는 가능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플라멩꼬’를 끝까지 고수하는데―후주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혀 놓았으며, 따라서 저 위에 나온 이름들도 까마론이니 빠꼬 등으로 되어 있다―, 물론 현행 외국어 표기법과 실제 스페인어 발음 사이에 벌어진 틈을 가능하면 좁히겠다는 전문가의 노력이라는 건 알 만하나, 뭣 하러 그러느냐는 것이다. 외국어 표기라는 건 해당 외국어보다 결국 그걸 옮겨 적는 언어 사용자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게 아니었던가. 역으로 생각해 보라. 저자의 성 ‘최’를 알파벳 ‘CHOI’로 표기한다고 하자, 한국어의 ‘ㅊ’과 알파벳 사용어권의 ‘ch’가 음성학적으로 얼마나 비슷한 소리를 내게 될까? 편의를 위해 나름 끼워 맞춰 알파벳으로 적긴 했지만 그렇게 표기한 ‘CHOI’를 원어민에게 들이대고 발음하게 할 때, 그게 한국인이 ‘최’를 읽는 소리와 같은 소리일 수 없다는 것쯤이야 누구나 알지 않는가. 일본사람들이 가타가나로 외국어를 저들 식대로 옮기는 것처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때 발생하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소리의 실종’쯤이야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들여도 좋지 않은가. 표기법이 마련돼 있는데 그걸 굳이 거스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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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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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자와 얼굴을 맞댄 대화 도중 알게 된, 조금의 가감도 없는 백 퍼센트 사실만을 기록하겠다. 내 지인은 수년간 프랑스에서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는 유학 초기에 유학선배―당연히 한국사람이다― 몇몇에게서 ‘논문은 이렇게 쓰는 거’라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던 ‘비법’을 강제로 전수받고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자신만의 길을 가겠노라 결심을 굳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어려움에 대해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강의는 교수들의 소논문 강독이 주가 되며, 개중 뭐라도 알아듣고 필기를 해야 답안지에 쓸 게 있고, 필기를 잘하는 친구를 사귀어 두는 게 공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 어학원 시절 시험 기간, 도서관에서 본 학생들이 거지반 필기한 낱장 위에 형광펜으로 금을 긋고 있어 이상하다 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었던 거다.

논문을 쓰는 단계에 이르면 당연히 한국처럼 지도교수가 정해지는데, 선택한 주제를 위해 읽어야 하는 도서 목록부터 일러준단다. 그때부터는 목록에 있는 책은 물론, 자신이 필요하다 여겨지는 책들을 주구장창 읽는 날들이 계속된다(논문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인용구를 수집해야 하므로). 그 ‘선배’들의 조언은 바로 이 단계를 어떻게 요령껏 넘기느냐에 맞춰져 있었다. 언제 그 많은 책들을 다 읽고 논문을 완성하느냐는, 이를 테면 ‘신속 완성을 위한 경제성의 논리’를 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지인은 강직하기가 대쪽과 같아 수년째 박사 논문을 위해 책을 읽으며 한 쪽 한 쪽 논문 분량을 늘리는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지인을 보며 ‘진정한’ 공부를 하는 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솔깃하면서도 불경(?)한 책으로 국제적 히트를 기록한 피에르 바야르의 『누가…』는, 그러나 그런 ‘경제성’을 좇는 독법으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책이다. 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라는 타이틀도 타이틀이지만, 프랑스 학계에서 이 정도 글―특정 텍스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고 있으므로 논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을 써 내려면 어지간한 독서량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대강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르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희대의 문제작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대상으로 하여, 추리소설 장르에서의 시점(/화자) 문제, 에르퀼 프와로라는 캐릭터로 풀어 보는 정신분석학에서의 망상 문제 등을 면밀히 분석, 다들 아는 결말(즉 사건의 범인)에 반기를 든 다른 독법을 제안하는데, 훌륭한 논문이 그렇듯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물론 ‘망상’을 다룬 장(章)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단언하긴 어려우나, 그가 제안한 증거를 취합해 볼 때 ‘합리적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어 사건의 전면 재수사를 요청할 근거는 충분해 보인다. 방향성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바야르가 제시한 관점을 토대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재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비평이라는 심각하고 지루해 뵈는 장르가 소설을 더 재미있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는 이 신선한 충격은, 비평 분야가 상대적으로 취약한―대중의 사랑을 덜 받는― 한국에서 더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편집자는 크리스티의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로울 추리소설에 대한 한 편의 추리소설이라 선전하고 있는데, 그런 문구를 뽑은 심정은 십분 이해되나 크리스티를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에게 더 흥미진진한 읽을거리일 것은 너무도 뻔하다. 비문이라 하긴 뭐해도 덜 다듬어진 문장이 다소 거슬리고, 2009년의 감수성으로 수용하기엔 뜨악하기까지 한 본문 편집과 표지 디자인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 책과 더불어 바야르의 저작물이 한국에 번역돼야 한다고 판단한 출판사의 결단력만큼은 높이 사고 싶다. 이 세상에는 시장 수요와는 상관없이 꼭 출판돼야 하는 책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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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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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내가 편애하는 감독 리스트를 지키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가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정리해 묶어 낸 책이다(예순을 넘긴 한 남자의 실존적 고백도 들을 수 있다). 아직 그의 최근작들을 보지 못했는데, 기타노 정도의 반열에 이르면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복제―일정한 정도의 분위기 쇄신보다는 자신의 스타일을 좇는 데 급급해진 듯한, 힘이 달리는 듯한 버거움이 묻어나는 연출이라고 풀어 설명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근래 알모도바르 감독에게서 발견되는 답답함이다―하기 시작하는 감독들이 꽤 있어, 어떨지 사뭇 기대가 된다(같은 이유로 걱정도 된다).

영화 얘기는 이쯤하고, 특별히 어렵거나 복잡할 것 없는 이 책이 ‘언포게터블한’ 읽을거리로 독자의 마음에 자그마한 흔적을 남겼다면, 한 명의 예술가로서 그가 보여 주는 호방함이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간미, 재능, 그 재능을 받쳐 주는 혹독한 자기 단련 등에, ‘이야, 뭐가 됐든 큰일을 할 사람이구나!’하며 경탄해 마지않다가도,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일갈한 모난 관점에 ‘에에?’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양을 떨어서 어쩌겠느냐며, 그래 봐야 자식은 제 부모한테만 귀여울 뿐이지 않은가, 라고 기타노식으로 직구를 날리는데……, 그래 뭐, 전적으로 동의 못할 관점은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를 ‘엄한’ 존재로만 기억하게 되는 건 또 뭐가 좋으냐고 되묻고 싶기는 했다.

사물이나 현상을 자신의 이과적 두뇌로 분석하기를 즐긴다는 기타노 감독은 그 기질이 가장 잘 발휘되는 단계인 편집 과정을 즐긴다고 한다. 이를 인수분해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기억해 둘 만한 관점이다. 허나 다소 무리한 비판이지 싶은 것도 있다. 자국어를 제대로 잘 사용하는 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높은 나라라는 의견을 개진하며―물론 양자가 서로의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가 되지는 않으며, 그 사이에는 얽히고설킨 운명의 소용돌이(?) 같은 게 존재한다―, 자신의 나라 일본과 프랑스를 비교하는데,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무시하며 생존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농업을 홀대하는 나라가 자국어를 애지중지 할 리도 없다. 농업의 나라 프랑스의 높은 식량 자급률과 국민들의 자국어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대충 이런 얘긴데, 프랑스의 넓은 땅덩이와 낮은 인구밀도에서 얻어진 식량 자급률―얼마나 높은지 알려 주진 않는다―을 국토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나 일단 인구밀도는 높은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었다. 일본이 유사 이래 줄곧 농업을 숭상해 왔다 해도 프랑스 수준의 식량 자급률에 이를 수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기타노가 자주 찾는다는 음식점 마스터가 이제껏 자기가 겪은 ‘기타노 내지는 비트’는 누구인지 짤막히 적은 글로 각 장을 여는 책은, 만듦새도 비교적 훌륭하고 한 유명인의 속내―물론 그가 자신의 패를 전부 보여 줬다고는 생각지 않지만―를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칭찬 일색의 서평이 아닌 게 유감이나, 기타노의 팬이라면 한번 읽어 봄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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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뿔(웅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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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자고 이 책을 양장본으로 만들었을까? 비앙의 소설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오래전 『물거품의 나날』이 번역된 사례가 있으나―은 한국적 토양을 고려할 때 꽤나 고무적인 일이긴 하지만, 『너희들 무덤에…』가 뭔가 ‘있어 보이는’ 분위기로 포장돼 나온 점은 다소 불편한 마음을 갖게 한다.

인종갈등에 대한 과격한 해법을 보여준달 수 있는 이 소설은, 구미지역에서 말하는 열차소설, 즉 무료함을 달랠 요량으로 역사 가판대에서 사 들고 기차에 올라타, 후루룩 읽고 난 뒤 선반에 두고 내리는(집에 가져가도 무방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는), 딱 그 정도의 무게감을 지닌 작품―작가도 이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되는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플롯, 평이한 심리 묘사, 시점적 한계를 극복하는 뻔한 해법 등을 그 특징으로 한다. 프랑스 문단의 화젯거리는 됐을지언정 세계문학계에 끼친 영향은 그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세계문학계에 반드시 어떤 영향을 끼쳐야 좋은 소설이란 의미는 아니다).

비앙의 음악만 알았지 ‘그’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던 나는, 과거 그의 사진에서 약물에 절어 광채를 잃어버리기 전의 쳇 베이커를 떠올리곤 했다. 비슷한 분위기에다 늘 트럼펫과 함께였던 까닭이다. 책 말미에 옮긴이가 친절하게 덧붙인 설명에 따르면, 그는 억지로라도 트럼펫을 불어야 했는데, 이는 류마티스성 심장병에 대한 의사의 권유였다. 작년 말 뜬금없이 개봉한 루이 말의 영화 「마음의 속삭임」에서 주인공 소년이 앓던 것과 같은 병이지 싶다. 결국 심장병으로 세상을 등지긴 했지만, 음악을 하는 동안에도 그에게는 특유의 삐딱함이 있었다.

허나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이 소설에는 정말 별 게 없다. 하드보일드를 향한 끈적끈적한 집착이 아닌 다음에야 굳이 읽어서 뭐할까 싶다. 그래도 나는 새로 번역된 『세월의 거품』을 읽을 계획이다. ‘이게 겨우 보리스 비앙이야?’라고 단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속삭임’ 때문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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