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기타노 다케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여전히 내가 편애하는 감독 리스트를 지키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가 그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정리해 묶어 낸 책이다(예순을 넘긴 한 남자의 실존적 고백도 들을 수 있다). 아직 그의 최근작들을 보지 못했는데, 기타노 정도의 반열에 이르면 안타깝게도 스스로를 복제―일정한 정도의 분위기 쇄신보다는 자신의 스타일을 좇는 데 급급해진 듯한, 힘이 달리는 듯한 버거움이 묻어나는 연출이라고 풀어 설명하면 이해가 쉬우려나. 근래 알모도바르 감독에게서 발견되는 답답함이다―하기 시작하는 감독들이 꽤 있어, 어떨지 사뭇 기대가 된다(같은 이유로 걱정도 된다).

영화 얘기는 이쯤하고, 특별히 어렵거나 복잡할 것 없는 이 책이 ‘언포게터블한’ 읽을거리로 독자의 마음에 자그마한 흔적을 남겼다면, 한 명의 예술가로서 그가 보여 주는 호방함이나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간미, 재능, 그 재능을 받쳐 주는 혹독한 자기 단련 등에, ‘이야, 뭐가 됐든 큰일을 할 사람이구나!’하며 경탄해 마지않다가도,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일갈한 모난 관점에 ‘에에?’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양을 떨어서 어쩌겠느냐며, 그래 봐야 자식은 제 부모한테만 귀여울 뿐이지 않은가, 라고 기타노식으로 직구를 날리는데……, 그래 뭐, 전적으로 동의 못할 관점은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를 ‘엄한’ 존재로만 기억하게 되는 건 또 뭐가 좋으냐고 되묻고 싶기는 했다.

사물이나 현상을 자신의 이과적 두뇌로 분석하기를 즐긴다는 기타노 감독은 그 기질이 가장 잘 발휘되는 단계인 편집 과정을 즐긴다고 한다. 이를 인수분해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기억해 둘 만한 관점이다. 허나 다소 무리한 비판이지 싶은 것도 있다. 자국어를 제대로 잘 사용하는 나라는 식량 자급률이 높은 나라라는 의견을 개진하며―물론 양자가 서로의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가 되지는 않으며, 그 사이에는 얽히고설킨 운명의 소용돌이(?) 같은 게 존재한다―, 자신의 나라 일본과 프랑스를 비교하는데,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무시하며 생존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 농업을 홀대하는 나라가 자국어를 애지중지 할 리도 없다. 농업의 나라 프랑스의 높은 식량 자급률과 국민들의 자국어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대충 이런 얘긴데, 프랑스의 넓은 땅덩이와 낮은 인구밀도에서 얻어진 식량 자급률―얼마나 높은지 알려 주진 않는다―을 국토가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나 일단 인구밀도는 높은 일본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었다. 일본이 유사 이래 줄곧 농업을 숭상해 왔다 해도 프랑스 수준의 식량 자급률에 이를 수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기타노가 자주 찾는다는 음식점 마스터가 이제껏 자기가 겪은 ‘기타노 내지는 비트’는 누구인지 짤막히 적은 글로 각 장을 여는 책은, 만듦새도 비교적 훌륭하고 한 유명인의 속내―물론 그가 자신의 패를 전부 보여 줬다고는 생각지 않지만―를 들여다보는 즐거움도 선사한다. 칭찬 일색의 서평이 아닌 게 유감이나, 기타노의 팬이라면 한번 읽어 봄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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