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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 - 원초적 에너지를 품은 집시의 예술 ㅣ 살림지식총서 347
최명호 지음 / 살림 / 2008년 12월
평점 :
호아킨 코르테스에 대해 손톱만큼 알고,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을 꽤 좋아했으며, 파코 데 루시아를 흠모해 왔다는 이유로 어찌어찌 흐름을 타다 이 책을 알게 됐는데, 표지 그림이 제법 잘 나와서 ‘흐음’하며 책을 펼쳤다.
그러나 토종 필진들만으로 방대한 지식의 집약본을 만들고자 한 출판사의 노력과 지구력에 박수를 보내는 문제와는 별개로, 이 시리즈가 그들이 ‘동류’라 언급한 프랑스의 ‘크세주’, 일본 ‘이와나미 문고’와 얼마만큼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와나미 쪽은 모르지만 크세주―책에서는 ‘끄세즈’라 적고 있지만, 현행 외국어 표기법과 약간의 미학적 이유로 나는 이렇게 쓰는 쪽을 택한다―는 좀 아는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자면, 크세주는 상당히 알찬 책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타이틀 아래 오로지 이 ‘앎’에만 천착한 만듦새가 특히 그렇다―현재는 상당수가 헌책방에서 1유로 안팎으로 팔리고 있지만, 뭐 그런 게 문고판의 당연한 운명인 듯한 분위기다. 그래서 얼마간 책장을 넘기던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일단 책을 덮었다. 플라멩코의 하위 분류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잠시 쉬어 갈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플라멩코』와 시리즈의 다른 책『왜 그 음식은 먹지 않을까』를 동시에 읽었는데, 감상은 딱 잘라 말해 “글이 참 별로다.”이다. 교정도 별로 잘 돼 있지 않다. 무릇 학자가 되는 데는 몇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보는데,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정연하고 맵시 있게 펼쳐 보일 능력을 갖추는 것도 연구 분량이나 기지가 넘치는 연구 방향 설정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묘사법이 겨우 ‘버터 냄새가 난다’―플라멩코 본연의 정서가 흐려지거나 변질된 상태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는 식(그것도 몇 차례나!)으로 흐르는 것도 그렇고, 종합예술인 플라멩코를 연주, 노래, 춤으로 나누어 한번 고찰해보는 일(즉 이 책을 쓴 목적 내지는 이 책의 존재 이유)이 ‘플라멩코의 혼’을 오염시키는 행위라는 ‘경고’의 잦은 등장은 솔직히 짜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 손바닥만 한 책에서는 경고 두 번도 많다. 저자가 제안한 오묘한 플라멩코 세계로의 초대에 정신이 혼미해져 독자가 그 ‘고귀한 혼’을 훼손시키고 있음을 망각할 정도로 잘 쓴 책은 아니기에. (물론 어떤 외부 요인에 의해 더 다듬어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이 먹히지 않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상상도 가능하다.)
이런 모든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책에서 얻은 것이라면, 영화「플라멩코」와 뮤지션 카마론 데 라 이슬라의 존재를 알게 된 일이다. 사우라 감독의 필모를 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199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플라멩코에 대한 그의 애정을 담백하게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플라멩코 연구회쯤 되는 단체라면 꼭 구해다 봐야 할 듯싶었다. 저자가 말한 대로 호아킨 코르테스의 파루카는 멋졌으며, ‘파코 씨’의 탕고스도 훌륭했다.
저자의 괜한 고집에 대해 반대 성명(?)을 내놓는 것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책 표제는 플라멩‘코’지만 본문에서 그는 가능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플라멩꼬’를 끝까지 고수하는데―후주에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혀 놓았으며, 따라서 저 위에 나온 이름들도 까마론이니 빠꼬 등으로 되어 있다―, 물론 현행 외국어 표기법과 실제 스페인어 발음 사이에 벌어진 틈을 가능하면 좁히겠다는 전문가의 노력이라는 건 알 만하나, 뭣 하러 그러느냐는 것이다. 외국어 표기라는 건 해당 외국어보다 결국 그걸 옮겨 적는 언어 사용자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게 아니었던가. 역으로 생각해 보라. 저자의 성 ‘최’를 알파벳 ‘CHOI’로 표기한다고 하자, 한국어의 ‘ㅊ’과 알파벳 사용어권의 ‘ch’가 음성학적으로 얼마나 비슷한 소리를 내게 될까? 편의를 위해 나름 끼워 맞춰 알파벳으로 적긴 했지만 그렇게 표기한 ‘CHOI’를 원어민에게 들이대고 발음하게 할 때, 그게 한국인이 ‘최’를 읽는 소리와 같은 소리일 수 없다는 것쯤이야 누구나 알지 않는가. 일본사람들이 가타가나로 외국어를 저들 식대로 옮기는 것처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옷을 갈아입을 때 발생하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을 ‘소리의 실종’쯤이야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들여도 좋지 않은가. 표기법이 마련돼 있는데 그걸 굳이 거스를 필요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