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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요 네스뵈 지음, 구세희 옮김 / 살림 / 2011년 7월
평점 :
한마디로 말해, ‘섹시한’ 소설이다. 여기서 ‘섹시하다’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밝히는 게 이 글을 쓰는 목적이 될 테지만, 좀 고민을 해 봐야 하는 것이, 이 소설이 주는 섹시함이 과연 범용 가능한 성질의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섹시함에 대한 대략적 이미지, 일정량의 관능미나 초超성적 매혹 따위를 떠올리며,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가 그리도 눈을 사로잡느냐고 묻고 싶을 사람도 있을 터. 하지만『헤드헌터』의 섹시함은 아쉽게도(?) 인물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뭐, 애정 문제도 들어 있긴 하다. 나름 과감한 묘사도 있고. 허나 딱히 섹시하지는 않다).
모든 섹시함은 화자(이자 죽기 살기로 고생하는) 로게르 브론이 인물을 관찰하는 방식, 그가 상대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글자 그대로 ‘피어난다’. 언젠가 엘모어 레너드 작가소개 글에서 모든―장르니 정통이니 가릴 것 없이― 소설가들이 레너드 식 대화체를 (어쩌면 은밀히) 흠모했을 것이라는 둥의 설명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읽은 소설이 그중 가장 ‘섹시한’ 부류에 들어간다는 것이었음에도 나는 별반 공감할 수 없었다(결국 끝까지 읽지도 못했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네스뵈 식 대화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나(레너드 팬들이 반론을 제기한다면, 예를 들어 부족한 번역이나 미끈하지 못한 교정을 탓한다면, 그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여지가 없진 않다. 아무렴!).
허나 이제껏 박수를 보낸 섹시함은 소설을 이루는 한 축인 레토릭에 대한 것일 뿐, 결국 이는 범죄소설이므로 일차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건 플롯이 되겠는데, ‘발단’에서 ‘전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감질나게 뿌려 주는 단서들―종종 참고하는 프랑스 모 인터넷서점 독자평에 따르면 다소 지루한 초반부를 만드는 요소―로 근래 들어 드물게 능동적인 독서를 할 수 있었으니, 쫀쫀하게 잘 짜인 소설이란 점 역시 강조해 두고 싶다.
‘소설가가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다’는 내용의 글을 언젠가 읽은 적 있는데, 네스뵈는 현역 음악가(이자 경제학자)이기도 하므로 음악적(/數개념) 수사를 써먹는 정도야 재량껏 얼마든 가능한 일이겠지만, 엘리트 군사조직에 헤드헌팅, 미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그 지식의 범위며 조합 능력이 상당하다. 어디에 뭘 끼워 넣고 뭘 이어 붙일지 귀신처럼 아는 건 기타노 다케시의 편집 방식과 닮았다 할 수 있으려나(박지성 입단 전 시점의 QPR에 대한 촌평 또한 그러하다. 물론 현 QPR의 운명과는 별개로).
영화제작자들이 이 정도 소설을 그냥 뒀을 리 만무하단 생각에 검색해 봤더니, 역시 영화로 만들어졌다(2011년 개봉). 다행히(!) 노르웨이에서. 한국인 대부분이 모를 자국 배우 캐스팅이라 ‘대단한’ 클라스 그레베를 연기한 대니쉬 본 액터 ‘니콜라이 코스터 발다우’만 언급하고 넘어가련다. 지금으로선 나는 재미없지만 상당한 흥작이라는「왕좌의 게임」시리즈에서 금발 라니스터 일족의 문제적 멘탈의 소유자 제이미를 연기한 배우로 설명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일 텐데, 기실 나는 영화「윔블던」에서 그를 보고 “쟤는 누구?”(영화 완성도와 상관없이)하고 그 미모에 눈이 번쩍 뜨였던 터, 오래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이후 희대의 망작도 못 되는 안타까운 시리즈「뉴 암스테르담」으로 원톱의 길로 들어서나 했는데, 그에게 너그러운 나조차 1회부터 드러나는 망작의 조짐에 눈을 돌렸으니, 운명은 뻔했다. 그리고 가늘고 긴 생명력으로「왕좌의 게임」제이미 라니스터에 이른 것이다.
그가 그레베가 된 배경에는 덴마크인이 노르웨이어를 익히는 데는 크게 힘이 들지 않는다―덴마크의 노르웨이 점령 역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자국어로 말해도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다고 들었다―는 이유도 있으리란 억측을 해 보는데, 그래도 소설 속 그레베의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구현한 캐스팅이란 생각은 든다. 다만 코스터 발다우의 키가 그레베가 되기엔 너무 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소설을 읽은 자만이 ‘키’를 언급한 이유를 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유럽에선 이미 개봉한 영화라 희망을 안고 프랑스어 자막 버전 영상을 찾았고, 지금 한창 내려 받는 중이다(이럴 때는 영어 말고 프랑스어를 하나 더 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앵글로색슨과 유럽대륙 성향은 또 다르기 때문이다).
소설만 읽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라 그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아직 손대지 못하고 있는데, #1부터 출간되는 게 아닌 점은 다소 아쉽다. 그런데 어쩌다 책 뒷날개에 소개된 카밀라 레크베리 소설 두 편은 다 읽었다. 감상이라면, 역시 인생을 십 년은 더 산 네스뵈 씨만 하진 못하다는 것? 그래도 표지는『헤드헌터』보다 낫다. 까놓고 말해 “이게 뭔가?” 싶은 표지가 아닌가?
책날개에 실은 사진이 두 번은 나오기 힘든 인생 최고의 사진이다 싶은 네스뵈는 유명세만큼이나 인터뷰 영상이 많은데, 제임스 엘로이와의 만남은 실로 놀랍다(부끄럽지만 나는 가끔 엘로이와 엘모어 레너드를 헷갈리곤 한다). 이제 그는 크라임 노블의 ‘전설’들을 만나고 다닌다. 그나저나 엘로이 소설들은 왜 좀 더 번역되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