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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의 비밀 ㅣ 비룡소 걸작선 2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평점 :
그것은 무척이나 기이한 경험이었다. 서가에 꽂힌 이 책을 빼내어―어째서 유독 이 책에 끌렸는지 그걸 모르겠다― 표지를 본 순간, 나는 내가 책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표지에는 원경으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보이고 여자아이와 그보다 좀 작은 남자아이 뒷모습이 근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 맞아, 얘들이 박물관으로 숨어들어가지. 거기서 무슨 동상을 하나 보게 되고 그 비밀을 캐는 얘기야. 나중에 노부인이 한 명 나오는데…'
나는 이 책을 읽은 적도 없는데 어찌된 일일까?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가보니 꽤 오래 전에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본 것이었다. 이 영화는 꼭 봐야돼!, 하고 다짐하고 본 게 아니라 어쩌다 TV 앞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영화가 나와서 본 것이라 가물가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내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라서기 보다는 원체 흥미진진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앞서 쓴 것처럼 주된 내용은 이렇다. 맏딸로 모범생으로 사는 게 지겹고―어떤 분에겐 고깝게 들릴 법도 한데…, 모범생으로 사는 게 지겹다니!―따분해 가출을 결심한 클로디아가 꼼꼼히 사전 계획을 세운 뒤, 세 남동생들 중 가운데인 제이미를 데리고 집을 나서는 걸로 얘기는 시작된다. 사람 많은 뉴욕에서 그것도 박물관을 거처로 낙점하고 착실히 실행에 옮기는데, 집 떠난 아이들이 바뀐 환경과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각종 난관에 부딪쳐 시종 눈물콧물 훔치며 그토록 벗어나고팠던 집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깨닫는 쪽으로 얘기가 펼쳐지리라 생각했다면 이내 뒤통수를 맞게 된다(주인공 남매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동화라고 해야하나?)의 뛰어난 부분인데, 작가도 그걸 미리 계산해서 무대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여느 가출 소재의 영화라면 로드무비가 됐을 법한 극劇은 박물관에서 남매가 문제의 천사상을 보게 되면서 추리물 비슷하게 전개된다. 천사상은 최근의 핫이슈로 미켈란젤로의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감정에 들어간 상태였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그 비밀을 밝히겠노라고 목표를 변경, 동생과 일주일 동안이나 박물관에 기거한다―어떻게 들키지 않고 일주일을 버텼는지 궁금한 분이야말로 꼭 읽어봐야 한다. 어쩌면 그 방법은 천사상이 미켈란젤로 작품이냐, 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울 것이다.
이후 천사상을 경매를 통해 박물관에 판 바질 E. 프랭크와일러 부인―소설의 화자이다. 이것도 참 말 되는 설정이란 생각인데, 소설 원제가《바질 E. 프랭크와일러 부인의 뒤죽박죽된 서류철에서》이니 말이다. 너무 길어 한국판에선 사용하지 않은 거겠지만―을 만나는데, 부인이 천사상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으리란 예상은 가능하다.
이 작품의 강점은 독자의 흥미를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드는 문제의 '비밀'이란 것이 종반에 가서야 실체를 드러내는 추리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어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도 지속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남매의 대화 곳곳에서 번득이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건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책은 1968년에 초판이 나왔다고 하니, 내가 태어나기 십 년전에 찍었다. 그렇다면 내가 클로디아와 같은 나이였던 1990년에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해도 매우 늦은 것이었다. 93년에 계몽사에서 먼저 펴낸 걸로 나오는데, 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다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다. 클로디아는 이제 마흔여섯이 돼 버렸다!
모범생 클로디아에게 좀 정이 안 간다면 코닉스버그의 다른 장편동화 <내 친구가 마녀래요>를 권한다. 작품 자체로는<클로디아…>쪽이 훨씬 매력적이지만, <내 친구…>는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 변방의 인물에게 눈길을 보낸 점에서 존재 가치가 큰 작품이다. 이런 멋진 동화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더없이 큰 요즘, 한동안 아껴두었던 별 다섯 개를<클로디아…>에게 주저없이 던진다. 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 유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