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투
닐 사이먼 지음 / 예니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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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신은 대머리 안경잡이(신체적 특징 비하 발언 아님!)를 특별히 사랑하는가 보다. 글 잘 쓰는 능력을 내려주는 걸 보면. 닐 사이먼의 희곡을 읽을 때면 우디 앨런의 영화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리고 곧 신은 이들에게 유머를 만들어 내는 비범한 재능을 부여한 것이 분명하다고 믿어버리기에 이른다.

여기 막 홀아비가 된 남자와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여자가 있다. 남자는 작가며 여자는 배우다. 이들은 각각 배우자를 잊는데 시간이 좀 걸리리라고 생각하고들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동생과 친구의 작전으로 우연히 서로를 알게된 두 사람. 나름대로 인생의 제 2장(챕터 투)을 열어보고픈 유혹을 받게 되는데……. 세상일이 흔히 그렇듯 그 과정은 삐걱댈 조짐을 보인다.

《희한한 한쌍》,《플라자 모음곡》등의 희곡과〈Seems Like Old Times〉,〈굿바이 걸〉등 영화를 통해 '나는 이렇게 재치 넘치는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라고 자신을 알려온 닐 사이먼은《챕터 투》에서는 웬일인지 이전보다는 진지한 태도로, 그의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약간은 심심할 분위기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전작들의 화려한 성공 뒤에 따라온 문제의식이 부족하다는 세간의 평을 의식해서일까?

〈9월〉이란 영화를 막 선보였을 때, 우디 앨런은 관객들로부터 '당신은〈한나와 그 자매들〉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으면서 왜 굳이〈9월〉같은 영화를 만드려고 하죠?' 라는 원성(?)을 들었다고 한다. 닐 사이먼의 위트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어쩌면 그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작품 곳곳에 숨어 있는 그만의 표현방식은 여전히 그가 예전의 닐 사이먼임을 증명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장르 안에서 갖가지 새로운 시도를 꿈꾸기 마련이 아닌가 한다. 애정어린 질책과 더불어 독자는 작가의 능력을 믿어주는 제스처를 취할 필요도 있으리라.책은 친절하게도 원문을 함께 실어 놓았다. 역자의 번역이 성에 차지 않는 경우, 독자로 하여금 취향대로 의역해 즐기라는 출판사의 배려(?)로 간주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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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사이드는 왜 반칙인가? - 근대 축구 탄생의 사회사
나카무라 도시오 지음, 이정환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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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좋아하는 일은 간단치가 않다. 어느 시점이 되면 더 이상 단순히 '좋아하는' 행위만으로는 부족하다. 행위를 지속하는 동시에 이론적 접근을 병행하게 된다. 쉽게 말해 관련서적을 탐독하는 일이다.

내게는 영화, 오페라(이제는 열정이 팍 식어 버렸지만)가 그랬고 정도는 약했지만 현대음악과 재즈가 뒤를 이었다. 축구는, 관련서를 읽기 전까지 몇 년간은 게임을 보는 데만 집중했다. 리그와 클럽, 선수들을 익히고 나니 그 역사가 알고 싶어졌다. 게임을 보는 눈을 좀더 키울 필요를 느껴 온라인 축구카페에 가입했다. 정보는 차고 넘친다. 미처 다 쓸어 담지 못할 정도다. 이제는 조금 다른 각도의 접근을 시도해야지 않을까, 생각되기 시작했다.

<오프사이드는 왜 반칙인가?>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저자는 고교 체육교사시절 한 학생으로부터 받은 질문을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하면서, 오프사이드 규칙이 있기까지 영국 풋볼(책속에서 저자는 축구대신 이 단어를 사용한다.)의 모습을 조망한다.

책은 기본적으로 논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근대 축구 탄생의 사회사'란 부제가 따라붙은 만큼, 풋볼이 시작되고 지금의 형태를 취하기까지 영국사회 변화상을 병렬식으로 풀어놓는다. 표제가 붙은 각각의 장에서 독자는 저자가 감질나게 던져주는 단서를 그러모아 '오프사이드는 이렇게 해서 반칙이 되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에 이른다. 저자의 표현처럼 드라마틱한 격론은 어디에도 없다.

이는 결국 저자의 추론에 따른 하나의 주장이다. 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훌륭한 논문들이 으레 그렇듯 저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불합리한 규칙인 오프사이드가 반칙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풍부한 참고서적, 자료, 도표를 통해 충실히 밝혀들어간다. 스포츠 규칙에 있어 '왜?'라는 질문이 지닌 무게를 강조하면서.

사회사를 다루는 만큼 과정은 약간 산만하게 보인다. 이야기를 쫓아가느라 큰 줄기를 망각하거나 저자와 같은 정도의 궁금증을 갖지 않는 독자라면 지루하게 읽힐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그 반대의 독자에게 이 책은 월드컵 이후 쏟아지기 시작한 축구관련서 가운데, 가장 진지하면서도 영양가 높은 읽을 거리로 다가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자는 두루뭉술하게 처리한다. '그래서 A는 B가 되었다.'라고 속시원하게 말해주진 않는다. 앞으로 스포츠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관련 종사자들에게 쓴소리를 남긴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저자의 노력에 존경심 마저 생겼다. 한 위대한 시대 전체보다 위대한 한 명의 사람이 월등하다는 말을 이 책을 통해 실감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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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너비 스토리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프레스21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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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국소설을 다 읽었다. 어쩌면 소설의 국적이란 건 그리 호들갑을 떨어가며 챙겨봐야 할 부분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의 인명이나 도시명 같은 고유명사들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노라면, 그 아우라가 풍기는 묘한 지배력에 압도된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정말이지 미국소설은 별로 읽은 게 없다. 스타인벡도 헤밍웨이도 읽지 않았으며(단편 몇 개 빼면), 그나마 고전이라 불리는 것 중에선《호밀밭의 파수꾼》이 전부다. 이마저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으니... 요즘의 미국소설은 레이몬드 카버 이상 나아가지 않고 있다. 니콜슨 베이커도 마이클 길모어도 책장에서 동면에 들어간 지 오래고, 폴 오스터는 굳이 나까지 읽을 필요는 없어 뵈고, '적어도 에이미 탄 만큼은…'이란 문구를 봤다 해도 내가《조이럭 클럽》을 읽을 것 같진 않다.

그런 의미에서《바너비 스토리》는 내게 미국소설의 현주소를 알려줬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놀랄 만큼 재미있기까지 하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앤 타일러는 가족 소재와 유머를 다루는 데 비범한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모든 작가가 쿤데라처럼 써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주인공 바너비는 이른바 '문제아'가 우여곡절 끝에 '출세'한다는 파카레스크 소설 주인공과 닮아 있다. 볼티모어 토박이이며 부잣집 둘째 아들이자 부모님의 골칫거리인 그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대부분이 노인)의 심부름을 해주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천사를 언젠가는 만난다는 가문의 전설, 전부인과 딸, 동료와 가족, 일로 만나는 노인들 틈바구니에서 '나'를 고민하는 바너비는 결국엔 자기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해답을 찾는다. 앞서 말한 '출세'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를 깨닫는 것으로 대치될 수 있겠다. 고전적 루트를 밟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진화한 피카르다(요즘 누가 고생 끝에 성공했네, 하는 식의 이야기에 공감하겠는가?).

소설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바로 소설을 영화화 하는 일이다. 내가 여윳돈이 좀 있는 헐리우드의 제작자라면 당장에 타일러에게 전화를 넣어 '당신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하고 제안할텐데…, 라고 말이다. 작가가 OK만 하면 당장에 감독을 물색하는 거다. 요즘 드라마 장르에서 잘 나가는 샘 멘더스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가 차기작 스케쥴 때문에 거절한다면〈뷰티풀 걸즈〉의 테드 뎀을 부르자. 그라면 각색까지 겸할 수 있을테니 제작비도 좀 줄지 않을까? 캐스팅 담당자에게 넌지시 바너비는 에드워드 번즈, 소피아는 미라 소르비노(살을 많이 찌워야하는데, 이를 승낙만 하면)를 고려하고 있다고 압력을 넣고 나머지는 재량에 맡기는 거다. 음악은 레이첼 포트먼이 좋겠군. 재미있는 장면들이 너무 많아 어디를 어떻게 손볼까 상상하면서 마구 흥분되기까지 했다.

이 책은 작년에 나왔는데, 나는 신문에서 서평을 본 기억이 없다. 정말 우연히 책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더이상 묻혀 있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다. 책을 놓기 싫어지는 재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메시지가《바너비…》안에 있다. 그것도 생동감 넘치는 번역으로(몇 군데 오자가 있었지만).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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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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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흠흠...일단은 무섭긴 무서운 작품이다. 무서우라고 오싹해지라고 쓴 소설일테니 작가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마니아들의 공포소설 추천목록 랭킹 10위 안에 항상 드는 것 뿐 아니라 상위 랭커인 이 작품보다, 나는 동 작가의《푸른 불꽃》이 작품 자체로는 더 낫다고 본다. 이런 비교가 가능한가에 대해 의문을 갖는 분들도 있으리라. 두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다른데 그런 비교는 무리가 아닌가 하는.

《검은…》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범죄자의 집요함과 이에 동반되는 공포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푸른…》은 범행의 궤적을 쫓음과 동시에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좀더 주력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작가가 같다는 것 이외의 공통점은 없는가?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두 소설 모두 '범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내 비교는 범죄소설로 기능하는 두 작품을 두고 행해진 것이라 하겠다.

둘은 각각 어느 정도 약점을 보인다.《푸른…》의 경우 치밀한 머리싸움과 가슴을 아리게 하는 결말은 일품이지만, 정작 슈이치가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소네라는 인물이 내게는 그렇게 죽여야만 하는, 죽어줬으면(?) 하는 인물로 비춰지진 않았다.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슈이치의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고 소네 같은 사람을 상상하면서 읽어주길 바랬다면 모를까(그건 넌센스다), 슈이치의 주도면밀해서 튀어나올 듯한 살인계획에 비하면 범행 대상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반대로《검은…》은 인물들이 제법 입체적이다. 주동인물 신지는 물론 고모다 부부, 메구미 등등 흡입력 있게 묘사돼 있다. 사치코에게 짜증이 날 정도였으니. 그러나 글의 전개는《푸른…》보다 떨어지는 감이 있다. 빈번하는 복선―범죄소설에서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라 할 지라도―, 신지의 깨달음, 위기에 직면한 사회에 대한 준절한 꾸짖음 등은 이 으스스한 소설을 조금은 유치하게 만들고 있다. '악몽은 계속된다. 이 사회가 지속되는 한.'과 같은 결말은, 뭐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쳐도 이야기를 짜는 재주가 더 빛났던 건《푸른…》이란 생각이다.

기시의 소설은 우라사와 나오키류의 백과사전 만화를 연상시킨다. 소설 내용은 제쳐두고라도 상식으로 삼으면 좋을 것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보험조항 같은 것은 한국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한국이 완전히 독창적인 뭔가를 고안해내는 능력이 일본에 비해 떨어진다―특히 법조항처럼 체계가 중요한 부문에서는―고 볼 때 일정 부분 비슷하리란 생각 또한 드니, 나와는 별 인연이 없는 분야를 새로이 알게 돼 똑똑해진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물론 이는 부수적인 효과다.

기시의 유명한 두 소설을 모두 읽고 나니 괜히 비교하게 돼 정작《검은…》자체에 대한 평가는 미약했다. 그러나 대상은 살인을 다룬 '공포'소설이다. 공포는 전이되는 거라지만 읽기 전엔 모르는 것이다. 서평은 못 썼지만《푸른…》에 별 네 개를 주고픈 마음에 세 개의 별을 달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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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디아의 비밀 비룡소 걸작선 21
E. L. 코닉스버그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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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무척이나 기이한 경험이었다. 서가에 꽂힌 이 책을 빼내어―어째서 유독 이 책에 끌렸는지 그걸 모르겠다― 표지를 본 순간, 나는 내가 책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표지에는 원경으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보이고 여자아이와 그보다 좀 작은 남자아이 뒷모습이 근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 맞아, 얘들이 박물관으로 숨어들어가지. 거기서 무슨 동상을 하나 보게 되고 그 비밀을 캐는 얘기야. 나중에 노부인이 한 명 나오는데…'

나는 이 책을 읽은 적도 없는데 어찌된 일일까?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가보니 꽤 오래 전에 같은 내용의 영화를 본 것이었다. 이 영화는 꼭 봐야돼!, 하고 다짐하고 본 게 아니라 어쩌다 TV 앞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영화가 나와서 본 것이라 가물가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내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라서기 보다는 원체 흥미진진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앞서 쓴 것처럼 주된 내용은 이렇다. 맏딸로 모범생으로 사는 게 지겹고―어떤 분에겐 고깝게 들릴 법도 한데…, 모범생으로 사는 게 지겹다니!―따분해 가출을 결심한 클로디아가 꼼꼼히 사전 계획을 세운 뒤, 세 남동생들 중 가운데인 제이미를 데리고 집을 나서는 걸로 얘기는 시작된다. 사람 많은 뉴욕에서 그것도 박물관을 거처로 낙점하고 착실히 실행에 옮기는데, 집 떠난 아이들이 바뀐 환경과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한 각종 난관에 부딪쳐 시종 눈물콧물 훔치며 그토록 벗어나고팠던 집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깨닫는 쪽으로 얘기가 펼쳐지리라 생각했다면 이내 뒤통수를 맞게 된다(주인공 남매는 놀라울 정도로 이성적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동화라고 해야하나?)의 뛰어난 부분인데, 작가도 그걸 미리 계산해서 무대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한다.

여느 가출 소재의 영화라면 로드무비가 됐을 법한 극劇은 박물관에서 남매가 문제의 천사상을 보게 되면서 추리물 비슷하게 전개된다. 천사상은 최근의 핫이슈로 미켈란젤로의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감정에 들어간 상태였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그 비밀을 밝히겠노라고 목표를 변경, 동생과 일주일 동안이나 박물관에 기거한다―어떻게 들키지 않고 일주일을 버텼는지 궁금한 분이야말로 꼭 읽어봐야 한다. 어쩌면 그 방법은 천사상이 미켈란젤로 작품이냐, 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울 것이다.

이후 천사상을 경매를 통해 박물관에 판 바질 E. 프랭크와일러 부인―소설의 화자이다. 이것도 참 말 되는 설정이란 생각인데, 소설 원제가《바질 E. 프랭크와일러 부인의 뒤죽박죽된 서류철에서》이니 말이다. 너무 길어 한국판에선 사용하지 않은 거겠지만―을 만나는데, 부인이 천사상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으리란 예상은 가능하다.

이 작품의 강점은 독자의 흥미를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드는 문제의 '비밀'이란 것이 종반에 가서야 실체를 드러내는 추리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어 집중력이 떨어지는 아이도 지속적인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남매의 대화 곳곳에서 번득이는 작가의 유머와 재치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그건 쉽게 흉내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책은 1968년에 초판이 나왔다고 하니, 내가 태어나기 십 년전에 찍었다. 그렇다면 내가 클로디아와 같은 나이였던 1990년에 한국에서 출판되었다 해도 매우 늦은 것이었다. 93년에 계몽사에서 먼저 펴낸 걸로 나오는데, 나는 지금에서야 읽게되다니…. 이렇게 원통할 수가 없다. 클로디아는 이제 마흔여섯이 돼 버렸다!

모범생 클로디아에게 좀 정이 안 간다면 코닉스버그의 다른 장편동화 <내 친구가 마녀래요>를 권한다. 작품 자체로는<클로디아…>쪽이 훨씬 매력적이지만, <내 친구…>는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 변방의 인물에게 눈길을 보낸 점에서 존재 가치가 큰 작품이다. 이런 멋진 동화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지 못한 아쉬움이 더없이 큰 요즘, 한동안 아껴두었던 별 다섯 개를<클로디아…>에게 주저없이 던진다. 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내 유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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