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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너비 스토리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프레스21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미국소설을 다 읽었다. 어쩌면 소설의 국적이란 건 그리 호들갑을 떨어가며 챙겨봐야 할 부분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의 인명이나 도시명 같은 고유명사들을 지속적으로 보고 있노라면, 그 아우라가 풍기는 묘한 지배력에 압도된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정말이지 미국소설은 별로 읽은 게 없다. 스타인벡도 헤밍웨이도 읽지 않았으며(단편 몇 개 빼면), 그나마 고전이라 불리는 것 중에선《호밀밭의 파수꾼》이 전부다. 이마저 별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으니... 요즘의 미국소설은 레이몬드 카버 이상 나아가지 않고 있다. 니콜슨 베이커도 마이클 길모어도 책장에서 동면에 들어간 지 오래고, 폴 오스터는 굳이 나까지 읽을 필요는 없어 뵈고, '적어도 에이미 탄 만큼은…'이란 문구를 봤다 해도 내가《조이럭 클럽》을 읽을 것 같진 않다.
그런 의미에서《바너비 스토리》는 내게 미국소설의 현주소를 알려줬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 놀랄 만큼 재미있기까지 하고.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앤 타일러는 가족 소재와 유머를 다루는 데 비범한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모든 작가가 쿤데라처럼 써야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주인공 바너비는 이른바 '문제아'가 우여곡절 끝에 '출세'한다는 파카레스크 소설 주인공과 닮아 있다. 볼티모어 토박이이며 부잣집 둘째 아들이자 부모님의 골칫거리인 그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대부분이 노인)의 심부름을 해주며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천사를 언젠가는 만난다는 가문의 전설, 전부인과 딸, 동료와 가족, 일로 만나는 노인들 틈바구니에서 '나'를 고민하는 바너비는 결국엔 자기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해답을 찾는다. 앞서 말한 '출세'는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를 깨닫는 것으로 대치될 수 있겠다. 고전적 루트를 밟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진화한 피카르다(요즘 누가 고생 끝에 성공했네, 하는 식의 이야기에 공감하겠는가?).
소설을 읽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는데, 바로 소설을 영화화 하는 일이다. 내가 여윳돈이 좀 있는 헐리우드의 제작자라면 당장에 타일러에게 전화를 넣어 '당신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하고 제안할텐데…, 라고 말이다. 작가가 OK만 하면 당장에 감독을 물색하는 거다. 요즘 드라마 장르에서 잘 나가는 샘 멘더스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그가 차기작 스케쥴 때문에 거절한다면〈뷰티풀 걸즈〉의 테드 뎀을 부르자. 그라면 각색까지 겸할 수 있을테니 제작비도 좀 줄지 않을까? 캐스팅 담당자에게 넌지시 바너비는 에드워드 번즈, 소피아는 미라 소르비노(살을 많이 찌워야하는데, 이를 승낙만 하면)를 고려하고 있다고 압력을 넣고 나머지는 재량에 맡기는 거다. 음악은 레이첼 포트먼이 좋겠군. 재미있는 장면들이 너무 많아 어디를 어떻게 손볼까 상상하면서 마구 흥분되기까지 했다.
이 책은 작년에 나왔는데, 나는 신문에서 서평을 본 기억이 없다. 정말 우연히 책의 존재를 알게 됐는데 더이상 묻혀 있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이다. 책을 놓기 싫어지는 재미,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메시지가《바너비…》안에 있다. 그것도 생동감 넘치는 번역으로(몇 군데 오자가 있었지만). 꼭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