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이현경 옮김 / 열림원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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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앞으로 누구든 살면서 한 번은 읽기를 바라는 책에는 번역판 만듦새와 상관없이 별 다섯 개를 매길 생각이다. 하지만 어떤 '한국어'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긴 해야 할 것이다. 소설 화자가 다소 중언부언 하는 유형이라 교정의 핵심은 '어디서 어디까지 끊어줄 것인가'라 볼 수 있겠는데, 그러다 보니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문장-다수가 주어와 술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꽤 보인다. 맞춤법이 틀린 것도 있고, 띄어쓰기 규칙에 어긋나는 것도 있다. 그래도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는 교정은 아니다. 그래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20세기 문학사전'에 따르면 모라비아의 적나라한 언어, 화법, 인물들의 대화는 영화화에 이상적인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내가 본 두 편의 영화는 어째 모두 프랑스-고다르의 ‘경멸’, 샤를르 베를링이 나온 ‘권태’-가 만든 것이지만, 특유의 황량한 분위기를 잘 살려낸 수작들이었다. ‘권태’의 경우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그러고 보면 그나마 최근 읽은 이탈리아 소설들은 영화 완성도도 뛰어난 것들이었다. 마가렛 마찬티니 ‘그대로 있어줘’도 남편 세르지오 카스텔리토가 스크린에 아주 잘 옮겨 놓았으니(국내 개봉 제목은 ‘빨간 구두’).

현대 이탈리아 문학이 어느 방향으로 어찌 흘러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모라비아와 시대를 공유하는, 나름 문학 아이콘이었던 다른 작가들도 번역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나마 이탈로 칼비노는 편애를 받았지만,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이탈로 스베보, 한때 모라비아의 부인이었던 엘사 모란테(국내에는 한 권 번역돼 있다) 등 굵직한 작가들이 더 소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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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
모리시타 겐지 지음, 양억관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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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상 외로 평이 상당히 안 좋아 좀 놀랐지만, 의외로 유익한 책이다.

일본어 원제는 <불초자식>('무스코'이므로 엄밀하게는 불초한 '아들')으로, 이것도 썩 잘된 제목은 아니다. 부모만 못한 자식을 의미하는 말이나 '아버지' 부문 출연자들이 과연 자식들보다 월등히 나은가, 하면 그건 분명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불초자식'을 '위대한 남자들도 자식 때문에 울었다'로 바꾼 한국 출판사 쪽 책임은 다소 가벼워진다. 그러나 그렇게 제목을 변경하고 그 첫 장에 케네디가를 배치한 것-'일러두기'를 보면 일본측과 협의하에 순서를 바꾸었다 하므로-은 확실한 "삑사리"다. 조셉 케네디는 나머지 동료(?)들에 견주어, 백 보 양보해도, '위대한 남자' 계열로 배치할 순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삑사리가 이 책의 최대 약점이고, 기 평자들의 말처럼 아버지들 스토리 나열에 저자가 할애하는 페이지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점도 이에 파생되는 약점이긴 하나, "왜 그들의 자식들이 제 아비 눈에서 눈물을 뽑았는가?"라는 의문에 나름 논리적 결론을 내리기 위한, 즉 '아들들의 불초함'이 그 아버지들에게 얼마 만큼의 상처가 됐을지 저자 본인도 납득하고 더불어 독자도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로 이해하고자 들면 못할 것도 없다.

원제의 허점과 한국판 약점을 벌충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모호한' 형태의 표제가 나을 듯싶다. "어떤 아들들" 뭐 이런 정도?

한 페이지 안에서 동일 인물 이름이 통일되지 않은 점, 조금 게으른 티가 보이는 교정 등이 내용 외적 흠이지만, 정사-사실 무엇이 진정한 정사인가 싶기도 하지만-보다 야사에 관심 많은 분들이라면 한번 읽어봄직하다. 상상 이상의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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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에 읽는 마르셀 프루스트 - 30분에 읽는 위대한 예술가 28 30분에 읽는 위대한 사상가 28
잉그리드 와세나르 지음, 김종승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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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로 앞에 별 다섯을 준 분도 있어 유감스럽지만, 본문 스타일에 신경을 쓰듯 교정에도 치밀함을 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크게 남기는 책이다. 솔직히 별은 하나만 주고 싶지만, 앞서의 리뷰처럼 내용에 큰 점수를 줘 그래도 하나를 더했다.

그렇다면 결국 화살은 편집부에게로 향하게 되는데, 정말이지 궁금한 것은 프랑스에 대해, 적어도 프랑스 문학에 대해 아는 사람이 편집부에 아무도 없었냐는 것이다. 물론 아는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이 이 책 교정을 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 그것이 알고 싶다!

지적하자면 이렇다.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표기하는 방식에 있어서의 비일관성, 괄호 안에 원어를 표기해 준 친절은 감사하지만, '제2제정', '제3공화정'의 원어 표기(그것도 영어로)가 과연 필요했던가 하는 의문, '플로베르'를 '자연주의 소설가'로 소개하는 부분에선 점입가경의 기분마저 느껴진다는 것. 문제는 이게 저자의 설명인지 편집부가 넣은 것인지 아무 표식이 없어 혐의를 누구에게 둬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옮긴이는 설명 끝에 '-옮긴이'라  덧붙이고 있어 혐의를 벗었다). 프랑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틀렸는지 금세 알 수 있을,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를 '페레 라셰즈'라 표기한 건 애교로 봐 줘야 할까(이건 원어 표기마저 틀렸지만)?     

이런 다이제스트 책을 그리 좋아하지 않음에도 프루스트에 관한 것은 웬만하면 모으려고 하는 터라 구입한 건데, 국내 굴지의 출판사에서 이 정도 퀄리티로 책이 나올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이 나 같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정도에서 제 역할을 끝낸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프랑스나 프랑스 문학에 대해 새롭게 뭔가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질 잘못된 정보는 어쩔 것인가? 왜 출판사에서 그런 책임의식에는 무게를 두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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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으로 사라진 여자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프레스21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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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막 한 프랑스문학주간지 사이트에서 다이 시지에의 새 소설 기사를 읽었다. 그가 소설을 또 썼다니 왠지 기쁜 마음이었다. 영화 <소설 속으로 사라진 여자(원제: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처녀)>를 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소설은 그래도 번역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새 소설 제목은<디의 콤플렉스/콤플렉스 디>이다). 그리고 번역이 된다면 프레스21에서 또 맡아 주리란 기대감에. 그런데 검색 결과에 놀랐다. 절판이라니! 읽은 지 1년도 더 지난, 이 책의 서평을 써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작가는 문화혁명의 희생양인 청년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영화감독이어서일까? 상황 묘사는 가히 일품이다. 전공자인 내게도 지루한 텍스트였던 발자크의 작품을 모티프로 삼으면서도 기발한 유머와 제법 애틋한 사랑 덕에 술술 읽히는 소설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게 하지만, 중국 태생이면서도 프랑스어를 자유로이 주무르는 작가를 질투하게도 만든다(이 소설에 빠진 나머지 프랑스원서도 사 보았는데 꽤 어려웠다).

작가 자신도 그 피해자였던 중국현대사의 한 부분을 개인의 문제로 끌어들여 한 편의 영화처럼,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펼쳐 보이는 능력. 한국소설 중에서도 역사문제를 이만한 재미와 스케일로 다룬 작품이 있다면 한번 비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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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까치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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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겐지의 신간 소설을 소개하는 신문기사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됐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마루야마의 문학세계가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물론 확실히 다르다―를 역설하면서 기자는 뒤의 두 작가와 감각적·도시적이란 형용사를 연결시킨다.그러고보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밀려온다!' 라는 외침이 어울릴 정도로 그의 소설 읽기가 유행처럼 번지던 때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유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쉽고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는 조건을 갖췄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매체가 뭐가 됐든) 우선 다수를 끌어안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 다수를 만족시키는 그것은 대체로 다국적적 혹은 무국적적이란 평을 듣기 쉽다. '지나치게 감각적'이란 수식어는 양념처럼 따라붙는다. 이상은 이제까지 무라카미에게 쏟아졌던 엄숙한 분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확실히 그의 글이 감각적이긴 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를 제외한 모든 작가들이 철저하게 감각을 버리고 있거나.

한국에서는 하루키라고 친근하게 불리는―아마도 표기방식의 경제성을 우선시한 결과로 보이는데―그의 글을, 유행을 좇아 읽었건 유행포비아라 피했건 간에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같다. '하루키를 한번 꼼꼼히 읽어보자'는 것. 장시간 집중이 어려워 소설은 꺼려진다면 적어도 에세이 만큼은 읽기를 권하고 싶다.

목적은 하루키 문학세계 탐방이 아니라 그가 에세이에서 펼쳐보이는 소박한 세계관과의 조우다. 〈anan〉이란 잡지에 매주 연재한 글을 모은 단행본인 이 책은 그에게 갈까말까 망설였던 사람들에게는 부담없는 초행길이 될 것이다. 안이한 단정은 피하고, 옳고 그름을 강요하는 어조도 가능한 배제한다는 다짐하에 글을 썼다는 후기처럼 여기 모인 글들은 어떤 카테고리로도 묶을 수 없는 잡식성을 드러내 보인다.

일상재발견이란 글의 성격은 필립 들레름과도 통하는 부분이지만, 생활속의 '깜찍'한 보물찾기 지도제작과 같은 '들레름 노선'과는 사뭇 다른 것이기도 하다. 하루키를 읽으며 우리는 '그래, 그럴 수도 있어.' 하고 수긍하다가도, '뭐? 이런 생각을 한단 말야?' 하고 놀라고, '거참 별난 사람이로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도 된다.

마루야마는 필요한 존재다. 우리가 쉽고 가깝게 접하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작가이므로. 그렇다면 무라카미는 중요한 작가다. 현재의 우리와 세속적인 삶 속에서 놓치고 있는 가치들을 독특한 시각으로 끄집어 내는 조언자이며 발견가―린드그렌의 삐삐와 같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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