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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평점 :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쿠니 가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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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것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글을 쓴다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마니아층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로 꽤 알려져 있다.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에 수록된 단편들은, 결코 최근에 쓰인 글이 아님에도 저자의 말대로 그의 지문이 녹아 있어서인지 전혀 식상하지 않고 신선하고 독특하다.
“그 사람이랑 살 거야.”
“……그 사람?”
“요즘 매일 밤 전화해 주잖니. 나한테 푹 빠졌나봐.”(러브 미 텐더-9쪽)
평생을 동경해 온 엘(엘비스 프레슬리)이 밤마다 다정하게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와 사랑한다고 속삭인다며, 지금까지 함께 살아 온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재혼하겠다고 한다. 일흔이 넘어 치매 초기증상이 있는 엄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 부모님을 찾아간 딸은 공중전화 박스에서 아버지가 잠옷에 점퍼를 걸친 모습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러브 미 텐더〉
우여곡절을 겪으며 평생을 함께 살던 아내를 위해 기꺼이 애인이 되어 주는 남편의 사랑은, 무딘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진솔하게 다가오며 부부의 애증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연애가 즐거운 건 처음 얼마 간 뿐이야. 좀 지나면, 질척질척 혼탁해지고, 아주 피곤해지니까.'(선잠-90쪽)
유부남인 고스케씨의 아내가 몇 달 집을 비운 사이, 그를 사랑하게 된 히나코는 고스께씨의 아내가 돌아오게 되자, 신문 배달원인 토오루에게 두 사람의 사랑을 증거로 남기고, 고스케와 쿨하게 이별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고스케가 그리워 밤마다 꿈에 시달리고, 자신의 사랑을 잘 알고 있는 토오루의 걸프렌드가 된다.〈선잠〉
문득 고양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가 되어 고스케씨 손에 길러지고 싶다. 내가 생각해도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 같았다.(선잠-84쪽)
토오루가 곁에 있어도 히나코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고양이가 되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머물고 싶다. 히나코에게는 사랑이지만, 세상의 잣대로 보면 엄연한 불륜이다. 그럼에도 결코 그가 밉지 않다. 그만큼 저자의 글은 잔잔하면서도 통통 튀어 올라 신선하고 독특하다.
셋이서 다시 웃었다. 서른이 다 된 인간들이 애들처럼 까분다고 서로에게 감탄하면서, 그래도 자꾸자꾸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포물선-105)
신진기예 작가인 미치코는, 요코하마에서 중화요리를 배가 터지도록 먹는 게 전부인 별거 아닌 일로 길을 나선다. 이렇게 맨발에 플랫 슈즈를 신고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타면서까지, 동창인 우수한 보험 설계사 간다와 팻숍 가게 직원 고이치로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들은 그다지 자주 만나지 않는 편인데도, 뒷모습만 봐도알아볼 정도로 서로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만남은 애초에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므로, 맛있게 먹고 스스럼없이 장난도 치고, 계산도 정확히 삼등분으로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미치코답지 않아.”
그 때 어째서 반론하지 못했을까. 나답지 않다는 말이 압도적이리만치 그럴듯하게 울렸다. 이 세상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우정뿐이다. 라는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우정을 믿을 뿐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간다나 고이치로라면, 그것을 나답다고 여길까? 5년. 시미즈씨가 알고 있는 나와, 간다나 고이치로가 알고 있는 나는 과연 얼마만큼 다를까.(포물선-115쪽)
뭉텅뭉텅 잘라내고 일부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그 누군가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할 때, 혹은 예전에 늘 만나던 이들을 어쩌다 만났거나 예전에는 나와 전혀 무관하던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있을 때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표제작을 비롯하여, 여기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을 읽어 나가다보면, 절대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작은 감정들을 잘도 포착하여 담담하게 엮어 나간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술술 읽혀 나가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소에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며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저도 아닌 인간, 이도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함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선잠-61쪽)
어릴 때부터 남들에게 놀림을 당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누나인 내 앞에서도, 자신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여 유학까지 보내 준 부모님 앞에서도, 더욱이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믿어주기까지 한 슐츠던가 슈들츠던가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독일 학교의 교수 앞에서도 켜길 거부했던 바이올린을 다른 장소에서 ‘가끔 켜고 있다,’(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254쪽)
마음이 힘들거나 뭔가 텅 비어버린 것 같은데 왜 그런지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혹은 자신도 잘 알 수 없는 자신을 알고 싶을 때에 ‘에쿠니 가오리’의 에세이 같은 소설이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본 도서는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