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 재난 트라우마의 현장에서 사회적 지지와 연결을 생각하다
채정호 지음 / 생각속의집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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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채정호

(재난 트라우마의 현장에서 사회적 지지와 연결을 생각하다)



그녀는 눈이 참 예뻤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쁜 눈을 가졌다는 것은 진료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증상이 너무 심해 거의 매주 진료를 할 정도로 자주 봤지만, 그녀는 항상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보고 있었습니다.(프롤로그_7)

 

누구나 자기 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누군가와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트라우마와 관련된 책이 자꾸 내 마음에 들어온다. 내 안에도 미처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기 때문일까?

 

개인도 아프고 사회도 아프고, 국가마저 병들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쩌면 스트레스를 넘어 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특이하게 나가 아닌 우리로 살아온 민족인 만큼, 우리로 살아야하는데, 때로는 그 가까운 우리가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확진자는 모든 동선이 공개되면서 기필코 물리쳐야 할 바이러스가 되었다. 전염병에 걸리는 것도 두렵지만, 다른 이에게 전염병을 옮기게 될까봐 두려워 열심히 마스크를 쓰고, 백신 접종이 가능해지자 백신부작용이 두려우면서도 맞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혼자서 겪지만 혼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처음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점차 사람들은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온라인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은 트라우마가 생기는 이유에서부터 치유 방법까지 세세하게 잘 나와 있다. 저자 자신이 직접 겪었던 트라우마는 물론이고, 그동안 만난 크고 작은 사례들을 예로 들며 트라우마는 세월이 흐른다고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게 결코 아님을 강조한다.

 

이제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와 슬픔은 견딜 수 있어도 원통함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생기는 외상후 울분장애(PTED)에 대해서도 자세히 풀어 놓았다.

 

삼풍백화점은 원래 아파트 종합상가로 허가받았으나 건축주는 백화점으로 변경했습니다. 이에 더해 원래 4층으로 설계됐던 건물을 증축하자고 최초 시공사에 요구했습니다. 시공사가 붕괴 위험성이 있다고 거부하자 건축주는 계약을 파기하고 계열사인 삼풍 건설을 통해 시공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외에도 설계상 기둥보다 얇은 기둥을 썼고, 에스컬레이터를 넣고자 기둥의 4분의 1을 잘라냈습니다.(189~190)

 

도저히 쓸 수 없는 배를 가져와 오히려 증축하여 사용한 세월호와 유사하다. 안전을 돈과 맞바꾼 참혹한 결과를 우리는 너무 빨리 기억 속에서 흘러 보냈고 또 다른 참사를 겪게 되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아픔과 아픔이 만나면서 치유가 일어납니다. 재난 등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비슷한 사건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래서 종종 피해 당사자들끼리 연대합니다. 이를 통하여 자신을 치유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인 치유에 나섭니다. 또 다른 참사와 아픔이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 강화와 피해 구제 등을 위한 활동에도 함께 발을 맞춥니다.(264).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당장 내 주변을 돌아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타인의 노동에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 회사, 카페, 레스토랑, 등 어디를 가도 다른 사람들이 행한 노동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284)

 

아픔과 고통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가 삶을 지배하지 않고, 트라우마에 영혼이 잠식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지 않도록 작은 빛을 건네어야 합니다. 그것은 서로의 곁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지금은 혼자가 아닌 우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300)

 

저자는 공존이 곧 생존이며,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며, 고통을 기억하지 않으면 고통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고통의 의미가 부정당할 때, 인간은 무너진다고 하며, ‘우리연결이 답이라며 을 내어주기를 강조하고, 그렇게 빛이 어둠을 이기게 되기를 소망한다.

 

누구도 재난에서 안전한 이는 없다. 트라우마의 당사자가 누가 되든, 서로의 곁을 내어주고 지지하여 심리적 자본을 쌓아가노라면, 외상후 스트레스가 외상 후 성장으로 이어지게 되리라 믿는다.

 

트라우마는 누군가 곁에 있을 때, 치유가 시작됩니다.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고통의 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고통스런 순간에는 누구나 극심한 아픔을 느낍니다. 이 아픔을 더 크게 하는 것은 혼자만이 겪고 있다는 단절감과 외로움입니다. 트라우마 경험자들은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회복과 치유로 향해 갑니다.(프롤로그_10~11)

 

함께의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연결될 때, 삶은 더 단단해진다.



 

*많은 이들이 이 책과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하여 먼저 읽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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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고양이
박경리 지음, 원혜영 그림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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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고양이/ 박경리 글· 원혜영 그림

(“토지작가 박경리 선생이 쓴 감동 동화)



 

 

 

호수처럼 맑고 슬픈 눈을 가진 선주는 또래아이보다 작아 꼬마로 불렸지만, 동무들 앞에서는 명랑하고 상냥스럽고 그림까지 잘 그려서 아주 인기가 좋았어요.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주의 그림에는 늘 슬픔이 가득 차 있었어요.

 

왜일까요?

 

선주는 전쟁 통에 아빠를 멀리 떠나보내고, 엄마는 서울로 돈 벌러 가셔서 동생 민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민이마저 사고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어요. 그 바람에 엄마는 병이 나서 앓아누웠지요. 어른들은 선주에게 비밀로 했지만, 선주는 다 알고 있었어요.

 

어느 날, 외롭고 슬픈 선주에게 할머니가 예쁜 아기 고양이를 선물했어요. 선주는 아기 고양이가 자기처럼 엄마가 무척 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며 비비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불쌍한 마음에 극진히 보살폈어요.

 

비비야, 비비야. 우리 엄마 곁에 날 가게 해 주렴.”

 

선주는 고양이의 귓가에다 입술을 가져가서 속삭이듯이 나직이 중얼거리기도 했어요. 그러면 고양이는 귀를 탈탈 털면서 선주의 뺨을 핥아 주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고양이 비비가 없어져 버렸어요. 아빠도 돌아가시고, 엄마도 서울에서 돌아오시지 않고, 민이도 없는데, ‘비비까지 사라져 버렸으니 선주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민이처럼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봐 슬퍼하며 애타게 찾는 선주의 마음이 고양이에게 전달되었는지(?) 어느 날 비비가 기적처럼 돌아와 주었어요. 민이도 이렇게 고양이처럼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돌아오지 않네요. 엄마는 언제 돌아올까요? 아픈 엄마도 선주의 기도가 통해서 과연 돌아와 주실까요?

 

박경리 작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동화를 쓰신 건 몰랐으니까요. 오래 전에 대하소설 토지를 읽고 워낙 감동을 많이 받아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 다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쉽지가 않네요. 워낙 방대한 양이라 읽기도 쉽지 않은 것을, 어쩌면 그리도 실감나게 쓸 수가 있었을까요?

 

어른에게는 추억을, 아이들에게는 희망을 선사할 박경리 작가의 동화 돌아온 고양이를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고 감동을 서로 나누어 보면 어떨까요? 원혜영 그림 작가의 그림이, 한층 더 선주의 마음에 가까이 가게 해주어서 더욱더 감동을 받게 된답니다.

 


 

* YES24 리뷰어 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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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 자기증명과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는 10가지 심리학 기술
마이클 투히그.클라리사 옹 지음, 이진 옮김 / 수오서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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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 마이클 투히그·클라리사 옹

(자기 증명과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나는 101가지 심리학 기술)

 

 



*불안, 스트레스, 격정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당신에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완벽주의자(?)는 아니었는데도, 무슨 일이든지(비록 사소한 것들조차도) 그 날 마음속으로 계획했던 일들을, 완전히 마무리 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면 늘 잠을 설치곤 했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그날 하고자 했던 일은 무조건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특별히 타고난 체질이 아닌 이상, 시간이 반복되면서 체력에 한계가 왔다. 그러니 늘 감기몸살은 달고 살았는데, 그땐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저 체력 탓만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너무 힘들어 집안일부터 조금씩 포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살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집은 엉망이 되어가는 대신 앓아 눕는 빈도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몸이 덜 아프니, 마음에 여유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어리석게도 그때서야 알았다. 깨끗한 환경도 좋지만, 자신의 체력이 따라 주는 만큼만 일해야 한다는 것을 . 각자 개성이 다르고 체력도 다른데 결코 남들과 비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지금도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일한 후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집에서 또 그만큼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대신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너무 힘들면 기본적인 것만 마무리하고 쉬는 것을 택한다. 대신 자주 앓던 일이 없어져서,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태도는 당신을 성취하는 삶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자기 파괴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그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 완벽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실수와 실패를 포용하고 건설적으로 활용한다면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반면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 회피하려고만 한다면 삶은 하나의 투쟁이 된다.(추천사_7) 실수와 실패를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삶을 때 그 결과는 참혹하다.(추천사_8)

 

이 책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에서는 우선 완벽주의를 버린다는 것은 일을 망쳤어도 견딜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이 인간임을 허락하는 것이니, 이 책조차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읽지 말고,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 읽고 배운 것들을 삶에 적용하기를 권한다. 그러면서 완벽주의는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닌 만큼 전적으로 매달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버려야하는 것이 아닌 다른 선택지도 있으니, 짜증스럽게 굴 땐 거리를 두고 삶을 풍요롭게 할 땐 즐기기를 제안한다.

 

어쩌면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조직된 게임에 옴짝달싹 못 하게 끼어버려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이기려 애쓰거나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둘 중 하나뿐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34)

 

그러면서 완벽주의는 언제나 지는 게임이라며, 우리가 완벽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고, 일을 망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서 일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듬어 보게 하며,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적응적 완벽주의와 실패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적응적 완벽주의를 구분해 주고, 성공을 향해 나아간다는 착각에서 헤어나 죄책감이나 번아웃· 회피로 이어지게 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또한 자신이 만든 원칙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다며, 완벽주의의 원칙과 논리는 아무런 근거가 없으니, 인정하되 굴복하지 말라며 완벽주의 게임의 실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이어서 원칙을 어겼을 때나 상황이 완벽하지 않을 때 밀려드는 불편함을 다스리는 방법도 알려주며 느낌에 대한 해법까지 풀어 놓았다.

 

거기에, 부정적인 꼬리표에 집착하여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게 된다며, 자기비판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고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하여 자신에게 아름답고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여 선택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이 밖에도 불안을 조절해 주는 주의력 기르는 법· 일상의 균형을 되찾기 위한 방법 등, 완벽주의자로 살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길이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불완전감이란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불완전감불완전함은 다르다. 이 책에서 강조하듯이 어디까지나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228)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저자의 바람대로 부디 세상의 모든 완벽주의자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완벽주의 뿌리부터 이해하고, 완벽주의적 사고의 특징이자 심리적 고통을 유발하는 해야 하는 것들의무들을 탐구하는 이 책을 매개로 하여, 완벽하지 않은 나를 돌보고 그런 나로 살아가는 연습을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래서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에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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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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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을 맞은 박범신 작가의 와초재, 문학, 사랑, 세상 이야기를 읽으며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이들을 살짝 돌아보며 어떻게 보조를 맞추어야할 지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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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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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산문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는다)



 

아마도 책을 가까이 하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박범신 작가를 잘 알 것 같다. 나 또한 저자의 책을 그리 많이 접하지는 않았으나 불의 나라”, “은교등 꽤 읽은 것 같은데, 아쉽게도 최근에는 주로 신간 위주로 읽다보니 거의 접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등단 50주년 기념으로 동시 출간된 두 권(두근거리는 고요, 순례) , 이 책두근거리는 고요와 인연이 되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했던 것, 펜클럽 와사등홈페이지 등에 쓴 소소한 것들을 모았다. 소설의 경우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더 온전히 드러나니 자못 수줍다. (004),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부끄러움을 살짝 비친다. 그만큼 산문은 소설보다는 알게 모르게 작가의 성향이 은근 드러나기 때문이다.

 

홀로 가득차고 따뜻이 비어있는 집 와초재이야기에서 시작해, 작가로서 빼놓을 수 없는 문학이야기, 우리들 인생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 그리고 세상이야기까지 진솔하게 엮어져 있다.

 

혼자사니 자유로워 좋다. 늙어가는 아내가 어쩌다가 서울에서 내려온다면 나로선 비상사태다. 따뜻한 밥을 얻어먹을 테지만 무한 잔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냉동실 냉장실도 구별 못 하냐, 로션 뚜껑을 왜 열어놓았냐, 목욕탕 물구멍에 끼어 있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면 어쩌자는 거냐, 잔소리는 끝이 없다. 내가 깔끔한 편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내의 눈에는 거의 짐승 수준으로 사는 남정네에 불과하다.(‘와초재이야기 중 두 집 살림_033)

 

이렇게 아주 소소한 일상이야기에서부터

 

어떤 여자나 어떤 남자는, 조금도 예쁘지도 않고 성격도 아주 안 좋은 어떤 남자나 어떤 여자에게 홀려 제정신 차리지 못하는 걸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보는 이들은 그 여자나 그 남자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정작 사랑에 빠진 그 여자나 그 남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애인에게 큰 매력을 느낄 거라고 착각한다.(‘와초재이야기 중 땅과 애인을 고르는 법_035)

 

저자 자신의 땅에 대한 사랑을 남자와 여자의 눈 먼 사랑에 비유해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애인과 배우자를 고를 때 효용성에 따라 고르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하며 일침을 놓는다.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요즘도 나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타율적 억압은 오늘날 거의 모두 사라졌지만,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비밀이 없는 시대가 아닌가. 인터넷으로 SNS가 모든 이의 삶을 밤낮없이 대낮처럼 비추고 있으니 생의 비밀이 존재할 리가 없다.(문학 이야기 중 결핍과 상처로부터의 자유_091)

 

작가로서 사물을 볼 때 나는 동시에 세 개의 눈을 사용한다. 하나는 사실을 보는 눈이고, 둘은 기억을 보는 눈이며 셋은 상상의 눈이다. 내가 보는 현상으로서의 사실과 현상 너머의 기억 사이를 긴밀하게 잇는 작업은 상상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문학 이야기 중 기억은-소설은 힘이 있다_096)

 

문학이야기 속에는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은 물론이고, 작가로 살면서 차마 절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고뇌도 슬며시 엿보인다.

 

인간이 최종적으로 이기지 못할 건 시간과 허공, 두 가지 밖에 없다. 연애의 본질인 정염은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당신이란 말은 시간을 넘어선 부동심과 만나면서 마침내 불멸의 한 끝에 닿는다.(사랑이야기 중 당신이라는 말_162)

 

누군가 인생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당신은 상대방(you)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함께(together)임을 강조하며 성숙하고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또 어떤 기억들이겠는가. 정파에 따른 증오심이 이제 우리 모두의 삶을 옥죄는 황폐한 처지에까지 이르렀다. 청년보다 노인이, 보통사람보다 지도자가 먼저 기억, 또는 기억 속에 축적된 달콤한 특혜나 쓰라린 상처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일방적 불통은 쓰러지고 수평적 소통이 일어서 보편화된다.(세상이야기 중 내 가슴 속 묘지에 그-그녀들이 있다_244)

 

세상이야기에서는 우리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사랑만이 커다란 권력이니,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기를 소망하며 수평적 소통을 제안한다.

 

세월호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온당한 권리가 없는데도 눈 맞추고 배 맞추어 과적을 하도록 세월호에 빨대를 박은 기득권자들의 집단,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쳐진 배타적인 집단, 종교단체 수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 책임을 모면하려는 관리들의 집단, 집단, 집단, 집단들뿐이다. 집단이 아니라 함께를 앞세우는 세상이었다면 세월호에 탄 수많은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왜 살려내지 못했겠는가.(세상이야기 중 혼자 걷되 함께 걷는 길_307~308)

 

어제 세월호참사 9주기 추도식이 화랑 유원지에서 있었다. 시민의 한사람으로써 매해 느끼는 거지만, 이 날만큼은 비록 서로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모두 한마음으로 추모했으면 좋겠는데 올해도 역시 추모식을 방해하는 목소리들은 여전했다.

 

산문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필력도 있어 술술 읽힌다. 가볍게 읽어나가노라면 인생의 가을에 도달한 작가의 아주 사소한 개인 이야기 속에 사랑도 있고, 문학도 있고, 인생은 물론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도 보인다.

 

저자는 오래 함께걷다보면 동행자들로부터 내 존재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으며 동시에 어떻게 함께 있는지 그 거리를 측정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지금 함께걷고 있는 이들을 살짝 돌아보며 어떻게 보조를 맞추어야할 지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해본다.



 

*본 도서는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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