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지음 / 파람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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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고요/ 박범신 산문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는다)



 

아마도 책을 가까이 하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박범신 작가를 잘 알 것 같다. 나 또한 저자의 책을 그리 많이 접하지는 않았으나 불의 나라”, “은교등 꽤 읽은 것 같은데, 아쉽게도 최근에는 주로 신간 위주로 읽다보니 거의 접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등단 50주년 기념으로 동시 출간된 두 권(두근거리는 고요, 순례) , 이 책두근거리는 고요와 인연이 되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했던 것, 펜클럽 와사등홈페이지 등에 쓴 소소한 것들을 모았다. 소설의 경우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더 온전히 드러나니 자못 수줍다. (004),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부끄러움을 살짝 비친다. 그만큼 산문은 소설보다는 알게 모르게 작가의 성향이 은근 드러나기 때문이다.

 

홀로 가득차고 따뜻이 비어있는 집 와초재이야기에서 시작해, 작가로서 빼놓을 수 없는 문학이야기, 우리들 인생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 그리고 세상이야기까지 진솔하게 엮어져 있다.

 

혼자사니 자유로워 좋다. 늙어가는 아내가 어쩌다가 서울에서 내려온다면 나로선 비상사태다. 따뜻한 밥을 얻어먹을 테지만 무한 잔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냉동실 냉장실도 구별 못 하냐, 로션 뚜껑을 왜 열어놓았냐, 목욕탕 물구멍에 끼어 있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두면 어쩌자는 거냐, 잔소리는 끝이 없다. 내가 깔끔한 편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내의 눈에는 거의 짐승 수준으로 사는 남정네에 불과하다.(‘와초재이야기 중 두 집 살림_033)

 

이렇게 아주 소소한 일상이야기에서부터

 

어떤 여자나 어떤 남자는, 조금도 예쁘지도 않고 성격도 아주 안 좋은 어떤 남자나 어떤 여자에게 홀려 제정신 차리지 못하는 걸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보는 이들은 그 여자나 그 남자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정작 사랑에 빠진 그 여자나 그 남자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애인에게 큰 매력을 느낄 거라고 착각한다.(‘와초재이야기 중 땅과 애인을 고르는 법_035)

 

저자 자신의 땅에 대한 사랑을 남자와 여자의 눈 먼 사랑에 비유해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애인과 배우자를 고를 때 효용성에 따라 고르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하며 일침을 놓는다.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요즘도 나는 때때로 나 자신에게 묻는다. 타율적 억압은 오늘날 거의 모두 사라졌지만, 대답은 간단하지 않다. 비밀이 없는 시대가 아닌가. 인터넷으로 SNS가 모든 이의 삶을 밤낮없이 대낮처럼 비추고 있으니 생의 비밀이 존재할 리가 없다.(문학 이야기 중 결핍과 상처로부터의 자유_091)

 

작가로서 사물을 볼 때 나는 동시에 세 개의 눈을 사용한다. 하나는 사실을 보는 눈이고, 둘은 기억을 보는 눈이며 셋은 상상의 눈이다. 내가 보는 현상으로서의 사실과 현상 너머의 기억 사이를 긴밀하게 잇는 작업은 상상력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문학 이야기 중 기억은-소설은 힘이 있다_096)

 

문학이야기 속에는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은 물론이고, 작가로 살면서 차마 절필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고뇌도 슬며시 엿보인다.

 

인간이 최종적으로 이기지 못할 건 시간과 허공, 두 가지 밖에 없다. 연애의 본질인 정염은 너무나 찰나적이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당신이란 말은 시간을 넘어선 부동심과 만나면서 마침내 불멸의 한 끝에 닿는다.(사랑이야기 중 당신이라는 말_162)

 

누군가 인생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당신은 상대방(you)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함께(together)임을 강조하며 성숙하고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 한다.

 

대통령이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또 어떤 기억들이겠는가. 정파에 따른 증오심이 이제 우리 모두의 삶을 옥죄는 황폐한 처지에까지 이르렀다. 청년보다 노인이, 보통사람보다 지도자가 먼저 기억, 또는 기억 속에 축적된 달콤한 특혜나 쓰라린 상처들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일방적 불통은 쓰러지고 수평적 소통이 일어서 보편화된다.(세상이야기 중 내 가슴 속 묘지에 그-그녀들이 있다_244)

 

세상이야기에서는 우리들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사랑만이 커다란 권력이니, 함께 걷되 혼자 걷고, 혼자 걷되 함께 걷기를 소망하며 수평적 소통을 제안한다.

 

세월호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온당한 권리가 없는데도 눈 맞추고 배 맞추어 과적을 하도록 세월호에 빨대를 박은 기득권자들의 집단,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쳐진 배타적인 집단, 종교단체 수장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 책임을 모면하려는 관리들의 집단, 집단, 집단, 집단들뿐이다. 집단이 아니라 함께를 앞세우는 세상이었다면 세월호에 탄 수많은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왜 살려내지 못했겠는가.(세상이야기 중 혼자 걷되 함께 걷는 길_307~308)

 

어제 세월호참사 9주기 추도식이 화랑 유원지에서 있었다. 시민의 한사람으로써 매해 느끼는 거지만, 이 날만큼은 비록 서로의 의견이 다르더라도 모두 한마음으로 추모했으면 좋겠는데 올해도 역시 추모식을 방해하는 목소리들은 여전했다.

 

산문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필력도 있어 술술 읽힌다. 가볍게 읽어나가노라면 인생의 가을에 도달한 작가의 아주 사소한 개인 이야기 속에 사랑도 있고, 문학도 있고, 인생은 물론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도 보인다.

 

저자는 오래 함께걷다보면 동행자들로부터 내 존재가 얼마만큼 떨어져 있으며 동시에 어떻게 함께 있는지 그 거리를 측정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지금 함께걷고 있는 이들을 살짝 돌아보며 어떻게 보조를 맞추어야할 지 가늠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해본다.



 

*본 도서는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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