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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소네 케이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폭락
전신에 깁스를 하고 얼굴마저 붕대에 감긴 채로 입원 중인 음습. 그의 병실에 원래 오던 간병인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 오게 된다. 말 수가 적다는 점이 살짝 불만으로 여겨지던 새로운 간병인은 음습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을 하게 된다. 마침 그 날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에 음습은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다름 아니라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비참하게 추락한 과정인데...
처음에는 주가라는 말이 자주 언급돼서 경제와 금융과 관련된 내용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주가라는 것이 하나의 비유이자, 소설 속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특수한 개념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꽤 무겁게 느껴졌다. 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경제적 논리로 통용해버린 현실. 사소한 일이나 아는 사람의 평판 같은 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의 가치가 수시로 요동친다. 하루아침에 좋은 대접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살아 있는 것마저 사회에 폐를 끼친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수상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공포 그 자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으로, 즉 자산으로 본다는 뜻이니까.
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과정 속에서 가치에 따른 인간의 잔혹함을 볼 수 있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으로 판단되면 아무렇지 않게 얕잡아 보고, 친절을 가장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한다. 최소한의 사람 취급이라는 것도 그저 헐값에 써먹기 좋은 호구를 잡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쯤 되면 사람 취급마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사람 취급을 해주는 최후의 한계점인 것이다.
다만 이 작품의 주인공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건 아니라서 그에 따른 업보가 돌아온 것이라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확실히 부당한 일을 당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스스로의 행동으로 인해 불러온 결과라면 그건 이미 예정된 추락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운이 안 좋았다, 불행의 연속이었다, 다른 사람의 훈수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려 해도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누구인가. 분수에 맞지 않게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지른 건 결국 누구인가. 이유 없는 하락은 없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수난
철문으로 막힌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공간에 한 쪽 손이 쇠파이프와 연결된 수갑으로 묶인 채 고립된 상태인 나. 누군가 금방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도 잠깐뿐. 주말이 지나고 평일이 되도 이 곳에 오는 사람은 전혀 없다. 굶주림과 탈수로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회사원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가 철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마침내 누군가에게 발견된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도움요청을 듣고도 경찰에 연락해주지 않고 편의점에서 음식과 물을 사서 가져다주기만 하는데...
시작부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 세계관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설정이나, 대놓고 비현실적인 괴물이나 판타지 요소 같은 건 없다. 그냥 현실과 크게 다를 것 없다. 그럼에도 실내도 아닌 실외에 해당되는 도시 한복판에서 감금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이 소설에서는 가능하다. 그것도 현실적이라 해도 될 정도로.
억수로 운이 나쁜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하필이면 도움을 청한 사람들이 하나 같이 그 모양이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건물과 건물 사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 밖에 없겠다고 본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외지고 어둑어둑한 잊혀진 공간. 알게 모르게 사회에서 버려진 것들이 굴러 들어와 박히기 적당한 곳이다. 이런 곳에 감금된 주인공에게 나타난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하나 같이 자기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잘못된 것에 의지해서 기본적인 상식조차 망각해버린 눈 먼 자.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그저 더 약한 사람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 전부인 겁쟁이. 삶의 목적을 잃고 절망하다 못해 절망에 먹힌 것이나 다름 없는 실패자. 애초에 멀쩡한 사람이 올만한 곳이 절대 아니었기에 이런 사람들 밖에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주인공에게 닥친 수난만 봐도 공포인데, 더 소름 돋게 만드는 건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공이 만난 인물들이 확실한 동기를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모두 암울한 사회의 징그러운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해가 가능한 현실적인 범주와,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비현실적인 범주로 구분되는 정도다.
코
코가 높은 텐구와 코가 낮은 돼지라는 종족으로 나누어진 세상. 대대적인 차별 정책 속에서 텐구들은 점차 사회의 구석으로 몰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인 나는 죽은 아내와 딸을 닮은 텐구 모녀를 보고 도움을 주려 한다. 코 수술을 부탁받지만 국가에서 단속하는 불법시술이라 거절하고 대신 최소한의 사람다운 삶을 위한 돈을 쥐어 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벌어지는 텐구 단속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되는데...
특수한 세계관을 통해 차별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흡사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는 그런 잔혹한 면을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상당한 반전을 숨기고 있다. 단순히 일부 요소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뒤집어질 정도로 규모가 크기 때문에 엄청난 충격 그 자체다. 사실 이 작품에서 쓰인 반전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긴 하다. 그럼에도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서로 관련 없어 보이던 요소들이 결말에 가서 명확한 연결고리를 가지며 진짜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냥 단순한 반전하고는 궤가 다르다.
코로 시작해서 코로 끝나는 내용이라 너무나 적절한 제목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비극은 코에서 시작됐다. 코만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상황이고, 겨우 코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기에 너무나 끔찍하다. 코가 엄청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 같지만 결국은 그냥 코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가해자는 가해자대로 질이 나쁜 쓰레기고. 피해자는 피해자대로 괴물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그렇다. 인과응보도 뭐도 아니다. 그저 코 때문에 미쳐버린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