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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1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3년 11월
평점 :
흐르지 못하는 물은 썩기 마련이다. 어딘가에 수원이 연결되어 있거나 자연스럽게 흐르게 두지 않는 이상 새로운 물이 공급되지 않기에 그대로 부패하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면 어떻게든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인위적인 힘이 작용한 것이라면 굉장히 복잡해지고 만다. 여러 이해관계와 입장 차이로 인한 대립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미 없는 싸움만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잊어버린 채로 모든 것이 썩은 물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그 썩은 물 아래에 쌓이고 쌓인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 눈에 보이는 실체로 구현되어 모든 것을 집어 삼키게 될 것이다. 온건하건, 극단적이건 가리지 않고 말이다.
구로 선배로부터 나라의 하미 지방에서 행해지는 기이한 기우제에 대해 듣게 된 도조 겐야. 13년 전 기우제에서 발생한 신남 사망 사건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열린다는 점과 미즈치라는 물의 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부분에서 관심을 끈다. 그렇게 하미 지방에 도착한 도조 겐야는 기우제와 관련된 신사 네 곳의 관계를 통해 뭔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다는 걸 느끼던 중에, 예정대로 진행된 기우제에서 13년 전과 마찬가지로 신남이 사망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동안 시대적 배경이 종전 이후라고는 했지만 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정도였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느니, 전쟁으로 누가 죽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꽤 직접적으로 다루는 느낌이 강하다. 만주국에 거주하던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은 일을 다루고, 자살 특공대 출신의 인물이 나온다는 점에서 그렇다. 작중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까지는 아니고 배경을 설명하는 요소로 나오는 것이 전부이긴 하다. 그럼에도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비정상적인 집단문화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부분에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배경 설명이 중요하다보니 본 사건에 들어가기까지 꽤 장황하게 보일만하다. 대체로 초반이 그런 편이고 후반으로 갈수록 메인 사건에 집중하는 편인데, 사건 파트에서도 민속학 관련 내용이 많아서 역시 쉽지만은 않다.
상당히 폐쇄적인 하미 지방의 분위기는 여러 방면으로 압박감을 준다. 다소 상식 밖의 상황에서 진행되는 사건 수사는 기초적인 조사 이상으로 진전이 불가능하게 제한을 만들어 버리고. 여기에 정체불명의 괴이까지 느껴지니 현실과 비현실 양쪽에서 공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쪽은 현실에 실체를 가지고 존재하며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과거의 망령. 다른 한쪽은 실체와 존재가 불분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관념적인 존재. 마치 다른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이런 경우가 존재할 수도 있다. 영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존재감의 무게가 다르겠지만.
미즈치라는 존재는 단순한 괴이가 아니라 신성하게 모셔지는 것이라 그런지 직접적으로 묘사되는 이미지나 대략적인 인상이 나타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불가사의한 존재 같은 것이 아니라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될 정도다. 꽤 소름끼치는 괴이 여럿이 묘사되긴 하지만 물이라는 연관성을 가지는 정도지 미즈치 그 자체로 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잔잔한 수면마냥 미즈치는 그 어떤 움직임도 반응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냥 신성한 존재라면 그 만큼 보기 힘든 것이라고 이해되겠지만 점차 밝혀지는 하미 지방의 기우제에 숨겨진 진실을 생각하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마치 수면 아래에 숨어서 엿보는 악어처럼 덮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용하던 물속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기우제를 더럽힌 진짜 원흉과 이유가 뭐가 됐든 결론적으로 방관한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애초에 물의 신이라고 불리는 점에서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즈치는 조용하면서도 천천히 움직이다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덮쳐버린 것일 테다.
추리 요소에 대해서는 자연 환경에서 발생하는 꽤 그럴싸한 밀실 트릭을 사용해서 흥미롭다. 다소 우연이 많고 정황 증거에 의존하다보니 보기에 따라 별로라고 생각될 수도 있으나 앞서 언급된 상식 밖의 상황이라는 점을 기억해둬야 한다. 보통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 진행되는 경우를 클로즈드 서클이라고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는 환경적 고립이 아닌 문화적 고립에 가깝다. 즉 외부와의 왕래는 자유롭지만, 내부적으로만 통하는 규칙과 이해관계로 인한 제한과 불이익이 발생하기에 문화적 클로즈드 서클이라 해도 되겠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해나가며 정황 증거로만 추리한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다른 작품 같으면 지적받을 증거 부족으로 인한 비판에 대해서는 나름 자유로운 편이라 할 수 있다. 그 부족한 증거에 대한 부분도 다른 방식으로 보충해주거나 해석이 뒤따르는 편이라 아예 방치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고.
사실상 사건의 배경부터 발생 원인까지 따져보면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이 왜 위험한 일인지 보여주는 예시나 다름없다. 단순히 오랜 인습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폐해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다. 이미 사라진 악습이 되살아나 무고한 희생자들을 발생시키고, 그 업보가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엄청난 참극으로 이어진다. 제 아무리 희생을 요구하는 형식으로 당장 큰 효과를 보더라도 결국에는 책임이 돌아오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대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느 개인의 잘못도 책임도 아니다.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는데도 미리 막지 못하고 방치해버린 모두의 책임이다. 그 책임을 통감하고 기억하는 자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풍요와 발전을 기원하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