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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수문 ㅣ 매그레 시리즈 18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평점 :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삶이 피곤해지는 순간이 온다. 모든 걸 내려 놓고 싶다. 주변에 있는 것들 전부가 귀찮다. 대체로 인정 받기 보다 요구 사항과 책임만 늘어나서 회의감을 많이 느끼게 된 경우에 해당된다. 자신의 노력과 업적은 당연한 것에 지나지 않은 그저 그런 것으로 치부되고. 자신이 있을 자리는 점차 줄어드니 쓸쓸해지기만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이 생긴다면 무작정 달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결과를 불어올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파리 외곽의 샤랑통에 위치한 제 1호 수문에서 큰 소동이 발생한다. 술 취한 노인이 실수로 물에 빠진 걸 구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수문 일대를 총괄하는 에밀 뒤크로였고 칼침을 맞은 흔적까지 있어 죽은 거나 다름 없어 보였다. 다행이 에밀은 죽지 않았고 자신을 공격한 범인을 찾아 달라며 돈을 걸고 경찰에 의뢰를 한다. 한편 퇴직을 앞두고 사건을 맡은 매그레 반장은 노인과 뒤크로의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또 다른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며 더욱 소란스러워지는데...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에 제법 큰 사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피해자인 뒤크로도 그렇고, 수사하는 입장인 매그레 반장도 그렇고 침착하다 못해 태평하게 보일 정도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자세한 서술 줄어 다소 추측하게 만드는 면이 많다 보니 더 그렇다. 하지만 침착함 뒤에 각자의 불안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나타나며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저건 태평이 아니라 약해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가면이라고.
수문은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작품을 보다 보면 상당히 많이 나오는 장소다. 운하나 항구가 배경이면 반드시 나오는 곳이라 그렇다. 그럼에도 수문은 언제나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고, 다른 부분이 핵심이 되고는 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수문 주변의 풍경은 또 색다를 수밖에 없다. 수문 주변이 메인이 되고, 수문과 관련된 이들의 일상. 흘러가고 또 흘러가던 배 위의 삶과는 다르게 다소 정체된 분위기이지 않을까 한다. 늘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 보기에는 안정적이겠지만 따분함이 생길 만도 하다. 무료함에서 나오는 단순한 지루함 같은 게 아니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가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안에서 나의 업적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아줄까. 인생의 피로감이란 이렇게 찾아온다고 본다.
수문 주변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피로감과 별개로 매그레 반장 역시 퇴직을 앞두고 쓸쓸한 모습을 보인다. 곧 익숙하던 모든 장소들이, 자신의 자리였던 장소가 사라져 간다. 갈 곳이 없어진 그에게 파리는 한없이 외롭고 낯설어 진다. 이게 단순히 해당 지역에 자신의 집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언제나 함께 하던 일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느껴지는 공허함이다. 일상이란 크게 특별한 게 아니다. 소소한 행복과 자연스레 느끼는 삶의 보람참. 이게 없으니 남은 건 그저 사람만 가득한 배경일 뿐이다. 그 배경 속 개인은 그저 하나의 오브젝트이자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이 없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사건 규모와 분위기 간에 발생하는 이질감의 정체 역시 이 피로감과 관련이 있었다. 대부분의 인물들 행동이 자포자기한 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이건 포기가 아니라 방황에 가깝다. 포기라고 한다면 이미 그만 두거나 내려 놓은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건 전혀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 태연한 척 하고 있을 뿐이다. 내려 놓으면 그 만큼 잃는 것이 많다. 내려 놓지 않으면 피로에 절어 가치를 잃은 일상만 계속될 뿐이다. 이 저울질 속에서 계속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길고 오래 가는 삶이 좋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무사태평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일이 있을 수 있고, 참으로 질기고 끈질긴 인연이 생길 수 있고, 나중에 돌아보면 후회할 일이 분명 존재하게 된다.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게 최선이지만 외줄타기 하듯이 이걸 끌어 안고 나아가는 이도 종종 있다. 처음에는 자신 있다고 여기겠지만 무의식 속 긴장감은 계속 축척되고,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록 마음이 약해진다. 결국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삶의 피로란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겠지만 이런 식의 피로를 맞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