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시스트
윌리엄 피터 블래티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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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다. 평온하던 일상에 서서히 파고들어 예고도 없이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혼란을 초래한다. 이걸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다양한 해석이 시도된다. 대체로 현대 의학이나 학문으로 접근하여 이전 사례와 비슷한 경우가 있는지 비교하는 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걸로 전혀 설명되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 원론적인 설명으로 현상 유지를 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 악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데, 믿음만 불분명해 지는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다. 여기서 과연 믿음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할리우드 배우인 크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딸 리건의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지만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간다. 그런데 갑자기 리건이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며 일상이 엉망이 되어 간다. 병원에서는 신체적 이상이 아닌 정신적 이상으로 진단을 내리며 점차 포기 상태가 되어간다. 결국 남은 선택인 종교의 도움을 구하고자 인근 대학 예수회 소속 사제인 데이미언 캐러스를 찾아가게 되는데...

영화가 먼저 유명하다 보니 원작 소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목 때문에 오컬트와 악령 퇴치 관한 내용으로만 예상 되겠지만, 실제로 읽어 보면 그렇게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사실상 믿음의 대한 논쟁을 다룬다. 믿음이란 단어 자체는 굉장히 쉬운 의미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가면 보장이 안 되는 애매모호한 것이 되기도 한다. 확고한 믿음으로 이어지기까지 거쳐야 되는 단계가 생각보다 많다. 이 단계 마저 진행되지 못하고 자체적인 판단 선에서 끝나는 경우 역시 존재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문제는 꽤 복잡하다.

잔잔한 일상에 이변을 발생 시켜 섬뜩함으로 몰아치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공포 장르에서는 보통 처음부터 뭔가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기 마련이다. 이상한 소문이나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 수상쩍은 지역 같은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프롤로그부터 전조라고 할 만한 것이 있긴 있지만 구체적인 인상은 아니다. 애매하고 단순한 분위기. 쉽게 오해할 법한 사소한 일. 그러다 갑자기 예고 없던 폭풍우가 몰아친다. 리건이 점차 망가져 가는 모습은 상당한 충격을 주고, 현실적으로 접근하려던 모든 이들을 경악 시키며 상식을 파괴한다.

엑소시즘을 시도하게 되는 과정을 굉장히 현실적으로 그려내서 꽤 놀라웠다. 그냥 무작정 악마가 들려서 괴이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고. 성직자가 슈퍼히어로처럼 금방 나타나 퇴치하는 그런 게 아니다.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한 모든 검토 과정을 계속 나열해서 끊임 없이 의심을 하게 만든다. 진짜 악령이 들려서 종교인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정신질환이라서 의사를 불러야 되는가. 최근 연구 결과 뿐만 아니라 먼 옛날부터 기록된 논문과 사례를 거슬러 올라가며 비교하기에 무작정 단정 지으면 안 되는 이유를 실감하게 된다. 작중 주요 인물인 캐러스 신부가 종교인이자 의사 경력을 가진 특이점 때문에 더 그렇다.

물론 이 과정이 답답하게 보일 수도 있다. 당장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망설이는가. 신부라면서 믿음이 전혀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작중 행적을 보면 캐러스 신부는 포기하고도 남을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음에도 뭐든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많다.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다. 사실상 이게 문제라고 보면 된다.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에게 믿음이 존재야 한다. 믿음을 믿음으로서 보답하기란 그래서 힘들다. 어디서부터 시작될지 알 수 없을 최초의 믿음이 발생하고 움직여야 눈으로 보이는 결과와 진정한 의미로서의 믿음이 만들어지는 거니까.

포기하지 않고 버텨줄 시간과의 싸움. 이게 이 작품에서 말하는 믿음의 핵심이나 다름없다. 악은 존재한다고 금방 믿으면서 그 반대의 선은 왜 쉽게 믿지 못하는가. 분명 악이 존재하니 그 반대에 해당되는 것 역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건 악은 너무 쉽게 찾아오는 반면 선은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언제 닿을지 알 수 없는 믿음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게 선이다. 이 소설에서 그 힘겨운 과정과 결실을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엑소시즘이라고 본다. 공포 장르로서 다룬 자극적인 흥미 요소가 아니라 믿음의 증명에 해당되는 숭고한 대결 장면인 것이다. 이 대결의 결과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점을 많이 남기지만 이거 하나 만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증명하고자 온 몸을 바쳐서 노력했다고.

단순히 크게 흥행한 정도가 아니라 전설이 된 영화의 원작 소설은 확실히 뭔가 다르긴 다르다. 이걸 이제서야 접하게 된 것 만으로도 정말 감사한 일이다. 심도 깊은 믿음의 문제를 그냥 악령 퇴치라는 종교적 신세계로만 알고 지나갔을지도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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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그레 매그레 시리즈 19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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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극적인 드라마 같은 일이 종종 있다. 늘 멀리서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자신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은 드라마 속의 주인공 같은 게 아니라 배경에 지나가는 엑스트라나 무대 밖에 있는 관객일 뿐이라고. 그러나 드라마란 특정한 이들의 전유물 같은 게 아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귀찮고 힘겨운 일인데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런 순간이 있다면 그게 바로 드라마다. 온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 없다. 자신의 일상을 지켰다면 그것 만으로 가치가 있으니까.

늦은 밤, 은퇴하고 시골로 내려간 매그레를 찾아온 조카 필리프. 파리 경찰청 형사인 그는 마약 사건 수사로 어느 카바레 주인을 감시하기 위해 가게 안에 숨어들어 잠복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들리며 카바레 주인이 죽은 채로 발견됐고, 당황한 나머지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을 맨손으로 집어 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대로면 필리프가 범인으로 체포될 상황이기에 매그레는 다시 파리로 향해 수사를 하게 된다. 하지만 퇴직한 형사가 사건을 수사하기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는데...

그 동안 경찰로서 수사를 하던 매그레가 개인으로서 사건에 끼어들고, 가족이 엮인 내용이다 보니 이렇다고 할 수 있다. 매그레 개인의 사건이자 드라마. 늘 사건 안에서 나타나는 드라마를 지켜보던 입장에서 이제 당사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작가는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마지막은 역시 매그레 본인에 대한 드라마로 해야 적절하겠다고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다(출간 당시에는 19권이 마지막이었지만 8년 후에 다시 시리즈를 재개하며 75권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매그레 본인이 사건의 당사자이자, 해결사라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됐다고 본다.

사실상 범인이 미리 공개된 상태로 진행되는 수사임에도 만만치 않다는 걸 계속 느끼게 한다.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이전 같으면 거침없이 밀고 들어갔을 행동들을 할 수가 없다. 간접적으로 접근하는 게 전부인데, 이것마저 악의적인 방해를 받는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에 얽힌 용의자들은 매그레의 수사 방식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일상에 숨겨진 사연이나 드라마 같은 건 일절 없는 비열한 악당들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구식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를 정도니 매그레가 심리적으로 동요하게 될 수밖에 없어진다. 자신이 없는 사이 현장 분위기가 많이 바뀐 건가. 이제 한물 갔다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스스로가 형편 없어진 건가.

여러모로 최악의 상황임에도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왕년의 경력이 있다 보니 이전 동료들에게 여전히 신뢰도는 보장되고.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스타일을 바꾸지 않고 본연의 스타일을 유지한 채. 전혀 상대해 본 적 없는 범죄자를 공략하는 과정은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기존 작품들에서 볼 수 없던 범죄자와 정면 승부라는 점만 해도 흥미진진한데, 매그레 특유의 사람을 판단하는 심리 분석으로 예상치 못한 부분을 파고들어 결정타를 날린다. 세상의 흐름에 억지로 맞추지 않고, 자신 만의 스타일로 무모하게 도전한 거나 다름없기에 상당히 극적으로 보였다.

언제나 보아온 익숙한 주인공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었을 것이다. 매그레 역시 하나의 일상을 가진 개인이자, 수사를 맡았던 사건 속 인물들과 같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분명 소설 상에서는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사건 속 관계자들의 시점에서 생각해 보면 조연이나 지켜보는 관객일 뿐이다. 자신들의 이야기에 갑자기 끼어든 낯선 이에 지나지 않으니까. 이제 경찰이 아닌 그는 관객석이나 무대 한쪽 옆이 아닌 중앙에 서게 됐으니 진짜 주인공이 된 셈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일상을 지킨다는 사명을 가지고. 크게 특별할 건 없다. 화려한 조명이 아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전구 불빛으로 자신을 비추더라도 상관 없다. 가족이 모두 무사하고 자신 역시 편안히 지낼 수 있는 삶이면 그게 바로 드라마다. 그러니 언제나 관객일 뿐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신 역시 주인공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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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수문 매그레 시리즈 18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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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삶이 피곤해지는 순간이 온다. 모든 걸 내려 놓고 싶다. 주변에 있는 것들 전부가 귀찮다. 대체로 인정 받기 보다 요구 사항과 책임만 늘어나서 회의감을 많이 느끼게 된 경우에 해당된다. 자신의 노력과 업적은 당연한 것에 지나지 않은 그저 그런 것으로 치부되고. 자신이 있을 자리는 점차 줄어드니 쓸쓸해지기만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이 생긴다면 무작정 달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결과를 불어올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파리 외곽의 샤랑통에 위치한 제 1호 수문에서 큰 소동이 발생한다. 술 취한 노인이 실수로 물에 빠진 걸 구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은 수문 일대를 총괄하는 에밀 뒤크로였고 칼침을 맞은 흔적까지 있어 죽은 거나 다름 없어 보였다. 다행이 에밀은 죽지 않았고 자신을 공격한 범인을 찾아 달라며 돈을 걸고 경찰에 의뢰를 한다. 한편 퇴직을 앞두고 사건을 맡은 매그레 반장은 노인과 뒤크로의 주변 인물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또 다른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며 더욱 소란스러워지는데...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다가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에 제법 큰 사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사건의 피해자인 뒤크로도 그렇고, 수사하는 입장인 매그레 반장도 그렇고 침착하다 못해 태평하게 보일 정도다. 이전 작품들에 비해 자세한 서술 줄어 다소 추측하게 만드는 면이 많다 보니 더 그렇다. 하지만 침착함 뒤에 각자의 불안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나타나며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 저건 태평이 아니라 약해 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가면이라고.

수문은 매그레 반장 시리즈의 작품을 보다 보면 상당히 많이 나오는 장소다. 운하나 항구가 배경이면 반드시 나오는 곳이라 그렇다. 그럼에도 수문은 언제나 지나가는 풍경일 뿐이고, 다른 부분이 핵심이 되고는 했다. 그래서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수문 주변의 풍경은 또 색다를 수밖에 없다. 수문 주변이 메인이 되고, 수문과 관련된 이들의 일상. 흘러가고 또 흘러가던 배 위의 삶과는 다르게 다소 정체된 분위기이지 않을까 한다. 늘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 보기에는 안정적이겠지만 따분함이 생길 만도 하다. 무료함에서 나오는 단순한 지루함 같은 게 아니다. 이러한 일상에 대한 가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안에서 나의 업적이라는 것을 얼마나 알아줄까. 인생의 피로감이란 이렇게 찾아온다고 본다.

수문 주변의 일상에서 느껴지는 피로감과 별개로 매그레 반장 역시 퇴직을 앞두고 쓸쓸한 모습을 보인다. 곧 익숙하던 모든 장소들이, 자신의 자리였던 장소가 사라져 간다. 갈 곳이 없어진 그에게 파리는 한없이 외롭고 낯설어 진다. 이게 단순히 해당 지역에 자신의 집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언제나 함께 하던 일상이 존재하지 않기에 느껴지는 공허함이다. 일상이란 크게 특별한 게 아니다. 소소한 행복과 자연스레 느끼는 삶의 보람참. 이게 없으니 남은 건 그저 사람만 가득한 배경일 뿐이다. 그 배경 속 개인은 그저 하나의 오브젝트이자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이 없다는 건 바로 이런 거다.

사건 규모와 분위기 간에 발생하는 이질감의 정체 역시 이 피로감과 관련이 있었다. 대부분의 인물들 행동이 자포자기한 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이건 포기가 아니라 방황에 가깝다. 포기라고 한다면 이미 그만 두거나 내려 놓은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 건 전혀 없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 태연한 척 하고 있을 뿐이다. 내려 놓으면 그 만큼 잃는 것이 많다. 내려 놓지 않으면 피로에 절어 가치를 잃은 일상만 계속될 뿐이다. 이 저울질 속에서 계속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쉬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길고 오래 가는 삶이 좋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무사태평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아슬아슬한 일이 있을 수 있고, 참으로 질기고 끈질긴 인연이 생길 수 있고, 나중에 돌아보면 후회할 일이 분명 존재하게 된다. 애초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게 최선이지만 외줄타기 하듯이 이걸 끌어 안고 나아가는 이도 종종 있다. 처음에는 자신 있다고 여기겠지만 무의식 속 긴장감은 계속 축척되고, 사람은 나이를 먹을 수록 마음이 약해진다. 결국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삶의 피로란 언젠가 찾아오는 것이겠지만 이런 식의 피로를 맞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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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바 매그레 시리즈 17
조르주 심농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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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쓸쓸함이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찾아오거나,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닥칠 수도 있는 분기점 같은 것이라 해야 할까. 한창 불타오르다가 꺼져 버린 잿더미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과거의 화려하던 시절이 덧없게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여전히 숨겨진 열정을 가지고 불씨를 갈망하는 잿더미. 이러한 잔불은 언제 어디에서 다시 불을 지필지 알 수 없고, 어떤 식으로 번질지 예상 할 수가 없다. 또 어떤 오해를 불러 일으킬지도.

휴양지로 유명한 앙티브의 어느 별장 단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조사를 맡게 된 매그레 반장. 상부에서 피해자가 전직 군 첩보원 출신이라 일이 커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미리 들은 상황이다. 사건은 이렇다. 피해자 브라운은 두 명의 여자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여자가 갑자기 짐을 꾸려 도주를 시도하다가 교통사고를 내면서 브라운의 사망이 확인된 것이다. 두 여자의 주장으로는 브라운이 등 뒤에 칼침을 맞은 채로 집에 도착해 끝내 죽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시체와 며칠을 함께 지내다가 끝내 마당에 암매장까지 한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했는데...

고급 휴양지. 전직 스파이. 의문의 살인. 이런 점만 보면 뭔가 엄청난 사건이라는 인상이 확 생길 것이다. 그러나 매그레 반장에게는 그저 불필요한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겉으로만 보이는 가십 거리에 가까운 이미지일 뿐, 진정한 일상과 거리가 먼 것들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이목을 끌 스캔들에 해당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대할 법한 그런 게 아닐 뿐이다. 아니, 애초에 누군가의 일상에 과도한 관심을 가지며 억측을 내놓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다. 작중에서도 그러한 시선들이 많이 묘사되다 보니 매그레 반장 역시 불편해 하는 걸 볼 수 있다. 무엇을 보게 되든 한 사람의 삶이 구경거리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경인 앙티브에 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의 칸 영화제로 유명한 칸과 가까운 휴양지라 그런지 그 당시에도 휘황찬란한 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곳에서 일어난 이번 사건은 그 화려함 뒤에 숨겨진 이면에 해당된다. 사실 화려한 휴양지 같은 곳에 존재하는 이면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눈부신 빛이 존재하는 만큼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그림자 속에는 양지에서의 삶을 잊지 못하거나 그 밖에 다른 이유로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갑자기 활력을 불러 일으키는 도화선이 발생한다면 그건 희극일까, 아니면 비극일까.

피해자인 윌리엄 브라운의 모든 것으로부터 시작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장대하고 쓰디 쓴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 처음으로 보게 된 유흥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과정. 불빛만 보고 무작정 달려드는 나방과 같은 인생으로 결국 도달하게 된 곳. 쓸쓸함 속에서 방황하는 브라운으로 인해 생겨난 인연과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단순히 철없는 남자의 방탕한 인생이라 하기에 너무나도 허무하다. 여기에서 돈이란 그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진정한 본질은 공허함을 채워줄 심리적인 안정감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이걸 찾아가는 방식이다. 가까이에 있을 잔잔하고 오래가는 은은한 불을 찾지 않고, 오래가지 못할 크고 화려하게 불만 바랬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의 결이 달라서 발생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흔해 빠진 치정 싸움이라고 보기에 쓸쓸함의 무게가 너무나 커서 그렇다. 제목이자 작중에서 주요 배경이 되는 리버티 바에서 그게 확 느껴진다. 스스럼 없이 친숙한 분위기이면서 화려한 세계의 밑바닥이나 다름 없는 음울함이 감도는 곳. 활기라고 전혀 없는 이런 곳에 기회가 찾아온다면 그건 놓치고 싶지 않을 마지막 순간 같을 것이다. 희극에 가까운 드라마라고 해도 되겠다. 그랬기에 이번 사건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본다. 그 어떤 다른 의도나 재물에 대한 탐욕 없이 공허함에서 떠오른 진실된 사랑이었기에.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과 그 안에 숨겨진 진실된 모습의 차이를 보며 가십이 가진 문제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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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항구 매그레 시리즈 16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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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간의 관계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 믿고 싶을 때가 많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누가 어떤지 잘 안다고 여겼는데 전혀 모르던 사실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던 정보가 사실은 전혀 달랐다는 현실이 밝혀지고. 이러면 그 동안 알고 있던 모습들은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안개 속에서 마주친 누군가와 마찬가지 아닌가. 여기서 진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건 따로 있다. 숨겨진 일이 어떠한 성격인가. 보통 숨긴다 하면 나쁜 것만 떠오르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란 언제나 존재한다. 의도적으로 숨긴 건지, 아니면 숨길 수밖에 없던 건지 말이다.

파리 시내에서 발견된 어느 신원 미상자가 알고 보니 한 달 전에 위스트르앙에서 실종된 항만 관리소장이라는 걸 알게 된 매그레 반장. 그는 총에 맞아 두개골에 금이 갈 정도의 치명상을 입고 수술 받은 흔적을 가진 채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하녀를 통해 위스트르앙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한 반장은 하루 만에 항만장이 누군가에게 독살 당한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항만장은 그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을 정도로 청렴한 이미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뭔가를 숨기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아서 반장은 꺼림직한 느낌만 계속 받게 되는데...

수시로 안개에 휩싸이는 지역 특성처럼 모든 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건이다. 그냥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지방의 항구 마을. 무엇 하나 숨길 것이 없어 보이는 동네 사람들. 이러한 곳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기묘한 상황만 계속 이어진다. 그저 모른다며 애매하게 말을 흐리기만 하는 와중에도 무슨 일은 계속 벌어지고 있다.

분명 적당한 윤곽은 그려지는데 핵심만 쏙 빠져 있는 위화감만 가득해서 이런 상황에 짜증을 내는 반장 만큼이나 답답하게 보일 만도 하다. 그럼에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많은 편이라 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누가, 어떻게, 어디까지 엮인 건지 당최 구분이 안 되니 사건 관계자 모두가 잠재적 용의자나 다름 없다. 정보에 대한 부분 역시 뭔가를 숨긴다는 것만 파악되지, 이걸 누구랑 공유하고 동일한 내용인지도 알 수 없다. 일상을 중심으로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는 스타일인 매그레 반장에게는 유독 힘겨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충은 어떤 분위기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걸 감추는 형태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 책 만큼은 분량이 조금은 더 많은 편이다.

항구 마을인 만큼 뱃사람들의 삶에 대해 다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번에는 바다와 연관된 일이나 한정된 특정 집단 단위가 아닌 하나의 사회라는 형태다. 뱃사람들의 유대감이라 하면 엄청나다고 하지만 이래저래 썩 좋지 못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인해 생기는 편견에 어쩌다 수상쩍은 이력까지 밝혀지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걸 잊으면 안 된다. 어딜 가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비슷하다. 밝은 곳에 어둠이 숨어 있듯이, 어두워 보이는 곳에도 빛은 있다. 더 쉽게 말하자면 겉만 보고서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일이란 거다. 현실에서 굉장히 많이 벌어지는 일이라 자주 듣는 말이라도 늘 주목해야 한다.

필사적으로 숨기려 했던 안개 속 사건의 정체는 크게 심각한 범죄는 아니었다. 그저 드라마 같은 어느 싸움에 말려든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선의로 시작됐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일이 커지며 큰 소동으로 번진 거나 다름 없다. 거기서부터 그들 만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제 3자나 다름 없는 경찰까지 끼어든 시점에 조용히 끝내기는 이미 늦었다. 원래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사건의 당사자들이 간과한 것이라면 이거다. 매그레 반장은 따뜻한 일상을 목격하면 모른 척하지 않는 다는 점. 다른 경찰이었다면 몰라도 매그레 반장 앞에서는 딱히 숨길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짜 따로 숨겨할 일은 다른 곳에서 발견된다. 그건 겉으로만 그럴싸한 일상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추악함 그 자체인 위선이다.

보통 사건의 진실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거나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는 하는데, 이 사건 만큼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부분이 많다. 제 아무리 아는 사람을 위한다 해도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일에 위험을 무릅쓰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의도가 좋더라도 보기에 따라 시선이 갈릴 수 있는 일이란 이런 걸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늘 나쁜 일만 벌어진다고 생각했는데, 선행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해서 눈에 보인 대로 믿기 어려운 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진짜 아름다운 세상은 따로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눈에 띄게 보여야만 선행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공개되기 원치 않는 다면 그럴 이유가 있다고 여기며 모른채 해야 될 때도 있는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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