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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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 일본 서브컬쳐 작품이 들어온지 꽤 되었다. 추리소설하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시마다 소지 등. 만화하면 코난의 아오야마 고쇼, 원피스의 오다 헤이이지로, 드래곤 볼의 토리야마 아키라 등. 그런데, 이 분. 오쓰카 에이지라고 들어봤는가?

           

 

        

 

 

 


 본 저서는 선정우 씨가 오쓰카 에이지를 만나 나눈 인터뷰 내용을 담은 대담집이다. 만화작가이자, 편집자이자, 만화창작 관련 강의도 하고 계신 분이라는데, 이 분의 유명작 중 국내에 들어온건 '다중인격 탐정 싸이코'라는 것 뿐이라 아시는 분이 적은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더군다나 19금 판정 받은 거라...)

 앞의 서문에서부터 눈여겨 볼 점이 있었는데, 바로 자아실현이나 자기표현의 욕구부족이 범죄로 이어지고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에게도 공감이 되는 게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을 통해 나를 나타내고, 또는 방법만 알면 내가 원하는 걸 만들 수 있는 쉬운 길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터뷰 내용에는 정말 의외라고 여겨지는 내용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일본을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쓰카 에이지의 말을 보면 아직 일본을 이해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일본에서는 몇 년 동안 해온 당연한 관례인 것이나, 정확한 작법서 없이 구두로 서로에게 알려지는 것을 보면 역시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듯, 출판문화나 만화 쪽에 특이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주로 오쓰카 에이지가 다룬 주제는 오타쿠, 문화, 스토리텔링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가지가 어떻게 보면 관련성이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들에 대해 오쓰카 에이지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오타쿠라는 말이 생긴 배경과 실제 오타쿠로 불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차이가 있었다면, 현재 오타쿠와 과거의 오타쿠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문화적 해석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당연시 여기던 부분이 잘못알고 있거나,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진리가 많았다.
 많은 주목할 것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오쓰카 에이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명 순문학 논쟁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그 동안 고뇌하던 순문학, 장르문학 문제가 약간은 해결점을 본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순문학의 죽음에 대해 보면서 단순히 가치로서의 판단 뿐만 아니라 판매부수와 다른 불공정한 관계, 끼리끼리 노는 폐쇄적 분위기이면서 유명하다고 자부하는 실태는 충분히 비판 받을만한 점이라 생각된다. 오쓰카 에이지가 순문학 논쟁에서 비판한 점을 보면서 우리나라 출판사들도 이런 게 아닌 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는 장르문학을 취급하지 않던 출판사에서 어느순간 장르문학 브랜드를 신설하거나, 돈 되는 유명 장르문학 소설을 싹쓸이 하려는 행보를 보면 이게 단순한 의심인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피해자 의식에 대해 나온 부분은 현재 한중일이 겪는 온갖 분쟁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현재.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따져보기 이전에 대부분 그들의 인간성이나 민족성 같은 걸 걸고 넘어지며 한치의 양보가 없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 하니 바로 피해자 의식이라는 것이다. 피해자라고만 여기고 가해자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니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인데,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의식이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관련 없는 이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한데에서 비롯된다.
 21세기, 문화가 요동치는 시대. 한 번 쯤은 오쓰카 에이지처럼 뒤돌아보고 현 상태에 대해 평가하고 앞날을 설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순문학 논쟁은 이미 내구연한이 끝난 문학을 그렇게까지 해서 연명시킬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준엄한 문제였던 겁니다.

 최근 10여 년간 전쟁을 긍정하는 일본 영화가 꽤 만들어졌는데요. 그것도 히트하니까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윤리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진짜 피해자에 대해서는 보듬지 못하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긍정을 위해 피해자 의식을 만들 뿐입니다. '피해자 의식'이라는 것은 진짜 피해자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오쓰카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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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시집 : 체임버 뮤직 - 수동 타자기 조판 아티초크 빈티지 시선 6
제임스 조이스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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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조이스하면 생각나는 건, 영문학 희대의 괴작으로, 번역마저 불가능하다고 평가되는 피네간의 경야와 율리시스가 있다. 그나마 쉬운 책이라면 더블린의 사람들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있지만, 이것 역시 호불호가 갈려서 뭐라고 딱히 꼬집어 말하기 애매하다. 그래서 이 분 하면 이러한 가치가 있지만 읽기가 어려운 괴작들만 주를 이루는데 이런 것들을 쓰기 이전에 썼던, 그야말로 처녀작인 이 시집을 보면서 이 분도 한때는 평범한?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제임스 조이스의 시는 제목인 체임버 뮤직에 걸맞게 정말 노래 가사 같은 느낌을 어필한다. 음색이 흐르는 문장과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선율이 음악에 각별한 사랑이 있었다는 조이스의 면모가 잘 들어나 보였다. 그 동안 나온 시선과 다른 타자기 느낌의 글씨도 거기에 한몫을 더했다는 느낌이었다.
 읽다보면 알겠지만, 전부 쭉 이어지는 시이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자에 대한 내용으로. 이게 정말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점이다. 사랑하는 이에 대해서 쓴 시는 대개 짧고 간결한 내용 안에서 강한 애정을 표현하는 경우를 보았는데, 조이스는 1번 부터 36번에 이르는 긴 시를 통해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훗날 율리시스와 피네간의 경야를 쓴 그를 생각하면 이렇게 애정있는 긴 시를 쓴 것도 분명 예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긴 만큼 내용 안에서 사랑하는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이나 표현이 수시로 달라지고, 분위기 또한 좋아지다가 나빠지기도 한다. 좋아할 때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좋다는 듯이 표현하면서도, 점차 그 사랑이 멀어져 갈 때는 그 어떤 상황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다는 듯이 나타나 상징물로 서의 사랑하는 여인이 아닌 진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생각하며 쓴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묘사를 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는 그 만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결국에는 모든 게 지옥이 되어 버리기에 이른다. 심각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파괴적으로 변모하는 만큼 사랑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리 설득력 있는 설명을 요구한다 해도, 사랑의 상실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듯하다.
 마지막에 수록된 소설 <더블린 사람들>의 한 파트인 에벌라인은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감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더블린을 떠나고 싶어하는 여자의 행적만 나오지만, 감정적인 면에서만 보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다는 심리적 압박이 강하게 느껴졌다. 제임스 조이스 역시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거나, 자신이 이러고 싶었다고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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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밀매인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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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하면 주로 서구권에서의 문제거리라던가,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 지역의 카르텔을 떠올린다. 우리나라와는 먼 얘기 같아도 사용하다 걸린 사례가 두드러지게 들어나지 않아서 그렇지, 대체로 밀수입이나 밀매 관련해서 적발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가 마약 관련해서 이정도인데 외국, 특히나 다양한 인종들이 사는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일까. CNN까지 찾아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 난장판이라는 건 다들 알 것이다.
 새벽의 아이솔라 거리를 순찰하던 경관 딕. 한 공동주택의 지하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접근한다. 그런데 지하실에는 침대에 앉은 자세로 목을 맨 소년의 시체가 있었다. 딕의 신고로 도착한 카렐라와 클링. 현장을 확인하던 중, 카렐라는 소년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마약 주사기를 발견하면서 자살이 아닌 살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처음 읽는 87분서라 기대가 많았다. 경찰소설은 일본 추리 쪽에서 요코야마 히데오와 혼다 테쓰야의 히메카와 레이코, 그 밖에는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와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반장 등으로 접해 보았다. 대체로 보면 경찰에 소속된 개인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특징이 있는데, 87분서는 단독 주인공이 사건 전체를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한 부서라는 개념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각 시점에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각자 역할을 맡아 다 같이 사건을 이끌어간다.
 부서라는 개념으로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경찰이라는 직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쉬웠다. 보통 추리물에서 감식반이나 형사들이 하는 일들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게 다 나온다. 그렇다보니 정석적인 추리 느낌보다는 현실적인 경찰수사의 모습들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예상치 못한 변수라던가, 꾸며낸 것처럼 보여도 진짜로 밝혀진 것들이 그렇다. 이런 전개를 보면서 보통 추리소설에서 떨이 취급을 많이 받는 경찰도 이렇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또한 현장에서의 경찰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같이 나와서 경찰이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고충도 나름 느낄 수 있었다.

 미국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마약 밀매와 그걸 쫓는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나름 치밀하고도 엄청난 신경전을 볼 수 있었다. 굳이 멕시코 카르텔처럼 무자비한 세력이 나오지 않더라도 마약거래를 위해 경찰을 속이고, 심지어 협박하는 모습은 실로 엄청나게 보였다. 그리고 마약에 손대는 연령이 꽤 낮아서 우리나라에서 담배를 일찍 시작하는 것 마냥, 미국에서는 마약도 일찍 시작하는 악습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청소년 흡연 문제처럼 청소년 마약 문제로 인한 가정 갈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흡연과는 차원히 다른 양상이라 겪는 인물이 정말 힘겹게 보일 정도였다.
 에드 멕베인의 87분서는 한 사건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보게 하고, 이들의 비중이 나름 적절하게 돌아가면서 여럿이서 한 사건을 해결한다는 분위기를 확실히 어필하는 게 보였다. 앞으로도 87분서의 경찰들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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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루조당 파효 서루조당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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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과거에 문자가 생기고 기록한 뭉치들이 쌓이면서 책이라는 것이 만들어 졌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지구상에 만들어진 책은 전 인류와 맞먹고도 남을 것 같기도 한다. 이렇게 깊이 따지고 보면 책이라는 건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으로 인해 현재는 많은 이들에게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새로운 시리즈 서루조당. 이건 세상에 인쇄되서 나온 모든 책에 의한 책에 대한, 책을 위한 기묘한 이야기다. 묘하게 섬뜩한 분위기나 전체적인 느낌은 교고쿠 나츠히코식 비블리아 고서당이다. 다만, 비블리아 고서당은 책과 이어진 숨겨진 사연을 찾는 것이지만 서루조당은 한 사람, 즉 개화기의 변화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길을 안내해줄 책을 찾아준다는 게 다르다. 그래도 시대적 트랜드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비슷한 소재를 부분적 요소만 바꾸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전개와 느낌을 보여주기 때문에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수첩'처럼 마냥 인기작을 따라한 아류작이라고 볼 수는 없다.(커피점 탈레랑에 대한 점은 대부분의 일본 독자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일본 아마존 서평란을 조금만 번역해보면 알 수 있다.)
 서루조당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서루조당 입구에 걸려 있으며, 책표지에도 그려져 있는 弔(조상할 조)라는 한자였다. 이 글자의 뜻을 알기만 했는데도 벌써 섬뜩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弔(조상할 조)는 조문하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제목인 서루조당은 대략 이런 뜻이리라.
 書 글 서
 樓 다락 루
 弔 조상할 조
 堂 집 당
 다락에 있는 글(책)을 조문하는 가게(제 나름의 해석이라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책에 대한 교고쿠 나츠히코의 철학을 많이 보았는데, 주로 책 안에서 기묘한 존재를 꺼내 설명하던 것과 달리 서루조당은 아예 책 자체를 기묘한 존재로 만들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책이란, 무덤이자 시체라고 한다. 그런 책을 읽는 독서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한다. 나도 한 때 이것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책 하나하나의 내용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축에 있는 시공간이며, 책을 잔뜩 모아 놓는 것은 여러 시공간이 모인 우주이며, 읽을 때는 시간축이 움직여 세계가 살아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시간이 죽어버린 책의 무덤이라고.(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읽고 얻은 이미지다.)
 길을 잃은 자에게 지도를 건내주듯이 서루조당에서는 이 말이 진리로 안내해주는 안내말이다.

 "당신은 - 어떤 책을 원하십니까."

 첫 번째 탐서, 임종

 갑작스럽게 도쿄 한구석에 집을 마련하고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된 나. 일자리 없이 거리를 배외하던 중, 한 책방의 사환과 얘기를 나누다가 기이한 책방에 대해 듣게 된다. 마침 아무런 할 일도 없는 참이던 그는 문제의 책방을 방문하게 된다. 책방의 이름은 서루조당. 해가 떠 있는데도 음침한 어둠을 띄는 그곳에서 책방 주인과 얘기를 나누던 중, 신경증을 앓고 있는 누추한 남자 손님이 찾아오는데...
 서루조당이라는 세계를 알아가는 입문장이자, 실존하는 세계와 허구의 세계를 구분 짓는 고찰을 느낄 수 있는 파트였다.
 주로 보여야 할 것과 보이지 말아야 대한 고찰로, 괴이한 현상을 당연시 받아들이던 중세적인 세계관과 미신으로 치부하는 현대적인 세계관의 충돌이었다.
 단순히 있는 것은 보이고 있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있어야 하지 않을 게 보인다면 정신에 병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걸 바꾸어 생각하면 어떨까?
 오히려 있어서 안 되는 걸 보아서 그걸 부정하려하기 때문에 병이 생기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보았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현실이 무너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 역시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던 나머지, 너무 쓸데없는 고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다.
 또한 당시 우키요에 화가가 서양화에 대해 생각하던 바와 거기서 느끼는 박탈감을 보며 한 예술가가 시대적 흐름 속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서루조당의 손님이 과거 메이지 시대에 실존 인물이었고, 그 손님이 사간 책이 후에 놀라운 흔적을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실존인물을 이용한 창작이겠지만 역시 세상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일까?

 두 번째 탐서, 발심

 새로 신설된 다리를 건너보기 위해 거리로 나온 나.
 별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다가 근처 책방에 들리기로 한다. 그런데 길을 잃고 우편집중국으로 갔다가 수상쩍은 행동을 하는 젊은 서생을 목격한다. 그 후, 목적지인 책방에 가서 책을 추천 받던 중, 아까 본 그 서생이 다시 나타나는데...
 문학에 대한 내용이 주로 많지만 실제로는 미신, 더 넓게는 토속 문화와 현대적 감각의 충돌이 더 많았다. 지금도 귀신이라던가 현실적이지 않은 괴담은 미신으로 치부하지만, 즐길 사람은 즐기고 아닌 사람은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막 세상이 변화하던 시기에는 그런 관점이 하나의 큰 고민거리였나보다. 확실히 미신이나 귀신을 좋아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을 것이다. 거기에 미신은 속 된 것이라 쓸모가 없다고 하기도 하고. 하지만 조당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예. 이 세상에 쓸데없는 것이라곤 없습니다. 세상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어리석은 자가 있을 뿐이지요."-142p

 나 역시 귀신이나 요괴를 좋아한다. 단순히 공포스러운 존재라기 보다는 이런 게 나타난 기원이라던가, 무언가의 상징, 또는 토속문화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에 비하면 너무나 사장된 게 많은지라, 하나하나 살리다 보면 뭔가 엄청난게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감도 한몫한다.
 토속적인 부분이 많지만, 문학적인 부분 역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문학이란 순수하게 사람사는 세상을 그리는 것이고, 그에 반하는 건 문학이 아닐까. 하는 부분을 보며 마치 우리나라에서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구분지어 대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해 자격이 있냐, 없냐 대한 말까지 나왔는데, 굳이 이렇게 구분짓기 보다는 여러갈래가 있다고 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굳이 따지자면 길은 많지만, 그냥 편한 길과 뜻을 이루기 위한 험한 길이 있다는 차이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반전이라면 바로, 서생의 정체일 것이다. 임종에 나오는 인물은 잘 모르는 인물이라 그렇구나, 하고 넘겼는데 이 인물은 내가 아는 인물이라 좀 충격을 받았다. 국내에는 번역서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라 이 분을 아는 사람이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 번째 탐서, 방편

 옛날에 다니던 담배회사 창업자인 야마쿠라와 함께 샤미센 공연을 보러온 나. 공연이 끝난 후, 근처 식당에서 술 한 잔을 하던 중, 구석에 있던 노신사를 발견한 야마쿠라는 반가운 듯이 그와 대면한다. 야마쿠라의 말에 따르면 그 노신사는 도쿄에서 일어난 괴사건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결해 신문에도 난 경시청 야하기 순사라고 한다. 야하기는 야마쿠라와 합석해 자기가 최근에 다니고 있는 철학관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개화기의 계몽운동과 학자의 시점에서 보는 계몽의 방법론에 대한 고뇌가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부제인 방편에 대한 게 많이 나오는데, 쉽게 말하자면 어린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면 도깨비가 잡아간다고 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믿게하거나 가르치기위해 미신적인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잘 보면 방편이라는 게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 방편만 내세우고 정작 실천을 하지 않거나 방편을 진리로 받아들이면서 문제점이 된다. 즉, 예를 들면 신이 있다고 하며 자비와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오직 신이 있다고 믿으며 신이 있다고 믿질 않으면 신앙심이 없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철학하면 다들 어려운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그럼으로 거리가 멀다고 여기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철학이 생겨난 이유를 보면 단순히 학자들의 영역에서만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석가도 공자도 진리를 가르쳤어요. 그들은 누구를 향해 진리를 가르쳤습니까? 지혜도 지식도 없는 대중을 향해 가르쳤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도, 칸트도,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철학을 말한 것은 아닙니다. -236p

 이는 결국 계몽의 시대에는 대중에게 쉽게 설명하지 못해서 어렵다고 어겨진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쉽게 설명하려고 해도 그저 학자들만 이해하는 어려운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 아닐 까 한다.
 앞에서 방편이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학문을 어렵게 받아들이는 대중을 이해시키려면 역시 방편이 필요한 모양이다. 하긴, 지나치니까 문제지 원래부터 문제였던 것은 없었고, 아무래도 학문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색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이걸 오해할 수도 있는데, 쉽게 설명한다고 주장하려는 철학이나 주장의 본질은 변함이 없다. 다만, 설명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려운 것을 쉽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지옥이니 신이니 헛소리하는 종교인 같은 게 아닌 진정한 사회 개혁가이며, 교육자이자, 계몽운동가가 아닐 까.

 네 번째 탐서, 속죄

 추운 겨울날, 뱀장어 요리 때문에 집을 박차고 거리로 나온 나. 이윽고, 처음보는 뱀장어 요리점을 발견하나 입구에 죽치고 앉은 시커먼 남자를 보게 된다. 머뭇거리고 있던차, 남자의 일행인 노인이 그를 가게 안으로 불러들이며 나 역시 들어서게 된다. 나카하마라 소개한 노인의 별의미 없는 인생을 얘기를 듣던 중, 그 시커먼 남자는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정치적인 부분이 많아서 메이지 유신 당시의 역사적인 면이 많이 나왔다. 존왕양이니, 신정부파니하는 역사 교과서에 나올 법한 용어부터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한 유명 정치인들이 언급되서 앞의 내용보다 조금 따분한 면이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는 정치판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없진 않아서 완전한 일본 정서적인 내용으로만 보기는 어려웠다.
 주로 도쿠가와 막부와 가신들 간의 관계에서 오는 의와 도리를 지켜야하는 관점과, 에도시대에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던 관습의 병폐가 보였다.
 천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심판을 빙자한 악행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진짜로 신이 그렇게 악행한 자를 죽이라 명령하고, 정치적 뜻을 행하라고 주장할까. 그건 일종의 회피이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하기 위한. 여기에 충(忠)과 의(義)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관점이나, 오해가 더해지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정치판이 복잡해진다.
 역사는 기록하는 관점에 따라 평가된다는 걸 느끼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행한 일도 기록자가 불순한 의도라 하면, 후대에도 불순한 의도가 되고 심지어는 살아있음에도 죽었다면 죽었다고 되는 것이다. 아무리 어떤 큰 뜻을 가지고 행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런 거대한 영향력을 보며 역사라는 거대한 물결이 제대로 흘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시다시피 에도시대에 무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빈번했었다. 물론 아무런 이유없이 죽인다는 것보다는 모종의 근거가 있어서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범죄자고, 나쁜 짓을 한 놈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범죄의 심판과 살생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천벌이라 할지라도 그건 곧 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사형이라는 중형도 있지만, 이러한 판결 없는 살생은 아무리 정당성이 있다 한들 범죄나 다름 없을 것이다. 만약 사람을 죽이고 속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아무리 오랜 수감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른다.

 당신은 사람이 왜 살아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312p

 다섯 번째 탐서, 궐여

 벚꽃이 질 무렵, 본가로 돌아갔던 나. 그러나 반가움도 잠시, 가족들의 냉대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도쿄 외곽으로 다시 떠난다. 불편한 마음을 추스리지 못한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아침 일찍 근처 책방, 마루젠에 들린다. 그때 점원인 야마다가 나를 찾고 있었다며 반갑게 맞이한다. 야마다의 말에 따르면 소설가 오자키 고요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인데...
 어른이 어른 다워야 한다는 얘기, 다들 많이 들었을 것이다. 애늙은이는 몰라도 어린이 같은 어른은 인정받기는 커녕, 어른답지 못하다고 비판받는다. 이와 같은 관점과 갈등은 메이지 시대에도 있었나 보다.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군다는 것은 단순히 성숙하지 못한다는 것을 넘어, 과거로 도피한다고도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 맞서는 것 만이 진리이고 정답일까? 보면 사람은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럼으로서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도 도망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물론, 끝까지 맞서는 대범함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생각해도 안 될 걸 아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맞서는 것은 대범함이 아닌 그냥 스스로 자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도망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단순히 이미지만 따지다가는 그런 것도 따지지 못할 정도로 망가질지도 모르니까.
 또한 아동용과 성인용을 구분하는 잣대에 대해 생각해 보게 금 하는 내용이 많았다. 아동이 성인용을 보는 건 정서적인 문제 때문에 당연히 안 된다. 하지만, 성인이 아동용을 보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그냥 애들이 보는 거다, 그래서 수준이 떨어질 것이다, 라는 고리타분한 이유가 전부다. 그러나 현재 성인인 사람도 어릴 적에는 아동용 도서를 읽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동용 도서를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는 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준에 대한 문제도 아동과 성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학이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쓸데 없는 구분을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라는 요소가 있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장래의 문제에 대해 나와서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조당 주인의 말을 보며 시대의 방향과 맞지 않게 가도 거기에 나 자신이 이루고 싶은 뜻과 의미가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겠다.

 승패라는 천한 가치판단으로밖에 사물을 파악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열등한 자가, 도망치는 것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374p

 모두가 오른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은 오직 혼자, 왼쪽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오른쪽에 목적이 있다면 왼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왼쪽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목적은 왼쪽에 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도피가 아니지요. 모두가 오른쪽을 향해 달리고 있다고 해서 당신의 목적도 오른쪽에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375p

 여섯 번째 탐서, 미완

 주인집에서 맡아달라고 부탁한 고양이와 집에 있던 나. 아무런 의미없이 죽치고 있던 중, 서루조당 사환인 소년이 찾아온다. 다름이 아니라 방대한 양의 고서적을 사드리는 과정에서 일손이 부족한 나머지 부탁함과 동시에 고양이를 새로 맡길 곳을 찾았다는 것이다. 별수 없이 사환 소년과 길을 나서서 도착한 곳은 나카노의 위치한 신사였는데...
 드디어 우리의 주인공이자, 교고쿠도 시리즈의 세키구치와 견주어도 손색 없을 음침한 남자가 주연으로 나오며, 교고쿠도의 할아버지 쯤 되는 인물이 등장해서 나름 기대하며 읽었다.
 그 동안 근대적 시각과 전통적인 시각의 대립이 많았는데 여기서는 종교적인 면, 일본 신토를 비롯한 음양사에 대한 고뇌가 많이 보였다. 음양사가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마 우리나라로 치자면 무당이 자신이 하는 모든 의식이 아무런 효엄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 똑같을 것이다. 즉, 오래 전에는 위대한 주술사로 칭송 받았으나, 현대에 와서는 속임수를 쓰는 것에 불과하다고 위축된 것일 테다. 그 동안 지식인층이나, 정치인, 평민들이 시대 변화 속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많이 보았지만, 음양사와 같은 이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아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나 신앙은 사기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해야 말이 되는 것들도 많다. 실재로 마음이나 냄새는 눈으로 보이지 않아 존재 자체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처음에는 어려워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는데, 그 뜻은 간단했다. 바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언어로서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주술이라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속임수라 할 수도 있으나, 위의 방편과 마찬가지로 큰 뜻을 전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사기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말이 가장 큰 의의로 다가온다.

 이 세상의 절반은 거짓입니다. -450p
 
 끝으로 미완이라는 단어를 보며, 완성되지 않은 채 버려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지만, 여기서는 색다른 뜻으로 받아들여 졌다.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 끝은 존재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다. 즉, 이는 앞날을 알 수 없는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내일을 걱정하며 살아가고, 내일을 걱정하며 골머리를 썩힌다. 이건 우리가 완성된 채라고 받아들임으로서 빠지는 고뇌가 아닐 까. 차라리 지금의 상태로 전전하며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미완인 채로 있어야 예상치 못한 내일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즉, 미완은 정체되고 도태된 상태로 보일지 몰라도 무언가를 하게 되리라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결론은 너무 앞날만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지기 보다는 지금을 생각하며 즐기는 게 더 좋다는 게 아닐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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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구기담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는 의외로 공포물을 맛깔나게 쓴다. 그가 쓴 살인귀라는 소설은 온갖 잔혹 표현을 서슴없이 쓴다고 들어서 국내에 들어올 수나 있을지 관심의 대상이다.
 공포 단편집인 안구기담은 초반부터 아름다운 공포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아야츠지 씨의 공포성향은 절대 어디가지 않는다. 뭐,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단지 보통 사람의 범주에서 보면 전혀 아니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이 단편집의 묘미는 전부 다른 내용의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공통된 사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맥거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재생

 알콜 중독이었던 나는 우연히 병원에서 지금의 아내와 만나 결혼하게 된다. 교수와 학생이라는 관계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지내던 중, 아내는 뜻밖의 비밀을 말하게 되는데...
 마치 이토 준지의 토미에를 감동적으로 만든 것 같았다. 분명 헌신적인 사랑은 사랑인데 토미에에서 나오는 비뚤어진 사랑 같으면서도, 어딘가 감동적인 이상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뭐, 어떤 설명을 하든 전반적으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지만, 결론적으로는 기괴한 기담이다.
 아마 이 단편집이 전체적으로 어떤 성향인지 잘 알게 해주는 내용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그나마 수위가 좀 낮은 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요부코 연못의 괴어

 아내의 유산과 그로 인한 불임으로 적적함을 느끼던 나는 뒷산에 있는 요부코 연못에 낚시를 하러 간다. 미끼도 없이 마냥 시간만 때우던 중, 빈 낚시바늘에 기이한 물고기가 잡히게 되는데...
 마치 생물의 진화를 신비롭게 나타낸 내용이었다. 신비롭다고는 했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목격한다면 경이롭다기 보다는 공포가 먼저 엄습하고도 남을 것 같다. 무엇보다 계속된 진화의 끝에 나올 생명체에 대한 불안감은 그 아무리 경이로운 존재라 할지라도 경계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른 단편들에 비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말이 특징이다. 그러니 다른 단편들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알겠지요..?

특별요리

 남들이 먹지 못하는 혐오음식을 즐겨먹는 나. 대학 동창들을 만난 자리에서 아는 선배에게 취향에 맞을 한 맛집을 추천받는다. 그 후, 우연히 아내와 외출을 했다가 맛집에 들리게 되는데...
 내용 전반적으로 괴식이 많이 나오지만, 결론적으로 먹는 것에 대한 고찰을 넘어선 공포다. 이전에 읽은 토탈호러에 실린 흉포한 입과 비슷하게 보이지만, 흉포한 입은 애초부터 정신나간 전개라 미친 놈의 끝을 본다는 느낌이고 특별요리는 거기에 뭔가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게 차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이상한 것들이 정당성을 부여받는 게 많은 현실이다. 그런데 이게 도가 지나치면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일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아마 기어코 나 자신에게 까지 예술을 들먹여야 감이 잡히지 않을까 한다. 그래도 소용이 없다면 결론적으로 예술을 빙자하며 나 자신까지 파괴한 것에 지나지 않겠지만.

생일선물

 크리스마스 이브가 생일인 나. 파티 장소로 가는 길에 있는 한 가게에는 그녀가 자주 들여다보는 칼이 있었는데, 오늘은 칼이 없었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울리는 기억의 파편. 이 모든 것은 파티 장소에서 알게 되는데...
 상당히 기묘하면서 강렬한 잔혹 묘사가 특징인 단편이다. 모든 단편을 통틀어 잔혹묘사가 가장 심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가장 행복하게 보일 것 같은 생일선물이라는 제목을 달고서 말이다.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무너져 있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한 구석을 강하게 느꼈다. 어쩌면 모든 게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분명 생일이고, 선물을 받았고, 가게의 칼은 없어졌다. 이 확실한 3개의 구성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내용상의 현실은 비현실을 공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합쳐져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는 건 현실이 문제가 아니라 주인공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크리스마스가 이브인 만큼 분명 분위기는 훈훈하다. 단지, 상황이 전혀 훈훈하지 않아서 문제지.

철교

 고등학교 동창인 두쌍의 커플은 여름을 맞아 열차를 타고 놀러가는 중이다. 야간 열차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이즈미는 곧 지나게 될 철교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전반적으로 전형적인 전개에서 오는 반전이 묘미다. 여행가는 도중에 무서운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무슨 일이 터지는 클리셰는 많이 보았을 것이다. 이 역시 전개상으로는 비슷하지만, 주제가 되는 무서운 이야기 속에 있는 섬뜩함과 훈훈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교차되는 게 정말 기묘하다. 그리고 앞서 다른 단편들에 비하면 약간 애들 장난 같은 느낌이라 쉬어가는 타임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인형

 소설가인 나는 건강검진을 받다가 몸의 이상을 발견하고 수술을 받게 된다. 이후, 요양차 고향집에 내려가서 밀린 원고를 집필하던 중, 강가에서 버려진 기괴한 인형을 발견하게 되는데...
 인형이 주제로 나오는 공포는 수 없이 많이 봐서 질리고도 남겠는데, 여기에 나오는 인형은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다. 이 인형과 주인공의 삶이 교차되면서 나타나는 비현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는 과연 같은 인간일까.
 과거의 나는 지금도 존재하는 가.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나는 죽은 것이고, 지금의 나도 곧 죽을 것인가.
 또,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인가.
 인생의 굴레를 깊이 따져보며 한 생각은 정말 기괴한 장면을 상상하게 했다. 내 뒤로 쌓여 있는, 나와 똑같은 한편 나이가 다른 수 많은 시체. 그리고 내 앞으로는 지금의 나를 죽이려고 대기하는 미래의 나.
 나 자신이라는 정체성이 망가지면 이런 것일까?

안구 기담

 출판사에 다니는 나는 어느 날, 동창으로부터 한 소설 원고를 받게 된다. 한밤 중에 혼자 읽으라는 기이한 말이 적힌 편지와 함께 배달된 원고의 제목은 안구기담. 대학 조교수인 주인공이 요양겸 동창회겸 고향 마을을 방문했다가 기이한 일을 겪게 되는 내용인데...
 전반적으로 주인공이 받은 원고인 안구기담이라는 소설의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제목 그대로 내용 곳곳에 사람의 눈이 굴러다녀서 보기에 혐오스러운 장면이 꽤 있다. 보통 눈이라고 하면 시선에 대한 공포가 많은데 여기서는 눈 자체, 즉 안구가 공포의 대상이다. 아니, 눈이 내뿜는 시선과 함께 눈의 외형이 주는 혐오감이 같이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눈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나는 와중에 숨겨진 반전은 현실과 환상이 이어지면서 끝나지 않은 시선에 대한 여지를 남긴다.
 시선을 느끼면 누군가 본다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그 시선이 많다면 보는 이들이 많다는 뜻일 테고. 하지만 그 많은 시선이 사실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누군가라는 존재가 아닌 눈이라는 물체 자체가 본다는 것이라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그건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서 느끼는 침입자에 대한 공포가 아닌, 눈 자체에 대한 공포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걸 읽으면서 내용 속에 언급되는 이 문장을 꼭 잊지 말자. 정말 묘할 것이다.

 읽어 주세요.
 한밤 중에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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