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쓰카 에이지 - 순문학의 죽음, 오타쿠, 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쓰카 에이지.선정우 지음 / 북바이북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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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 일본 서브컬쳐 작품이 들어온지 꽤 되었다. 추리소설하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시마다 소지 등. 만화하면 코난의 아오야마 고쇼, 원피스의 오다 헤이이지로, 드래곤 볼의 토리야마 아키라 등. 그런데, 이 분. 오쓰카 에이지라고 들어봤는가?

           

 

        

 

 

 


 본 저서는 선정우 씨가 오쓰카 에이지를 만나 나눈 인터뷰 내용을 담은 대담집이다. 만화작가이자, 편집자이자, 만화창작 관련 강의도 하고 계신 분이라는데, 이 분의 유명작 중 국내에 들어온건 '다중인격 탐정 싸이코'라는 것 뿐이라 아시는 분이 적은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더군다나 19금 판정 받은 거라...)

 앞의 서문에서부터 눈여겨 볼 점이 있었는데, 바로 자아실현이나 자기표현의 욕구부족이 범죄로 이어지고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에게도 공감이 되는 게 이야기를 창작하는 것을 통해 나를 나타내고, 또는 방법만 알면 내가 원하는 걸 만들 수 있는 쉬운 길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인터뷰 내용에는 정말 의외라고 여겨지는 내용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일본을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쓰카 에이지의 말을 보면 아직 일본을 이해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한테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일본에서는 몇 년 동안 해온 당연한 관례인 것이나, 정확한 작법서 없이 구두로 서로에게 알려지는 것을 보면 역시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듯, 출판문화나 만화 쪽에 특이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주로 오쓰카 에이지가 다룬 주제는 오타쿠, 문화, 스토리텔링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가지가 어떻게 보면 관련성이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들에 대해 오쓰카 에이지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오타쿠라는 말이 생긴 배경과 실제 오타쿠로 불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차이가 있었다면, 현재 오타쿠와 과거의 오타쿠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문화적 해석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당연시 여기던 부분이 잘못알고 있거나,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진리가 많았다.
 많은 주목할 것들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내 시선을 끈 것은 오쓰카 에이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명 순문학 논쟁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내가 그 동안 고뇌하던 순문학, 장르문학 문제가 약간은 해결점을 본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순문학의 죽음에 대해 보면서 단순히 가치로서의 판단 뿐만 아니라 판매부수와 다른 불공정한 관계, 끼리끼리 노는 폐쇄적 분위기이면서 유명하다고 자부하는 실태는 충분히 비판 받을만한 점이라 생각된다. 오쓰카 에이지가 순문학 논쟁에서 비판한 점을 보면서 우리나라 출판사들도 이런 게 아닌 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처음에는 장르문학을 취급하지 않던 출판사에서 어느순간 장르문학 브랜드를 신설하거나, 돈 되는 유명 장르문학 소설을 싹쓸이 하려는 행보를 보면 이게 단순한 의심인지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뭔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피해자 의식에 대해 나온 부분은 현재 한중일이 겪는 온갖 분쟁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는 현재.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를 따져보기 이전에 대부분 그들의 인간성이나 민족성 같은 걸 걸고 넘어지며 한치의 양보가 없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나 하니 바로 피해자 의식이라는 것이다. 피해자라고만 여기고 가해자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니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인데,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 의식이 가장 필요한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관련 없는 이들이 피해자라고 주장한데에서 비롯된다.
 21세기, 문화가 요동치는 시대. 한 번 쯤은 오쓰카 에이지처럼 뒤돌아보고 현 상태에 대해 평가하고 앞날을 설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순문학 논쟁은 이미 내구연한이 끝난 문학을 그렇게까지 해서 연명시킬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준엄한 문제였던 겁니다.

 최근 10여 년간 전쟁을 긍정하는 일본 영화가 꽤 만들어졌는데요. 그것도 히트하니까 만들어지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관객의 윤리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진짜 피해자에 대해서는 보듬지 못하면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긍정을 위해 피해자 의식을 만들 뿐입니다. '피해자 의식'이라는 것은 진짜 피해자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오쓰카 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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