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리커버 특별판)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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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 인물의 생애는 역사이자, 장대한 서사시가 된다. 당시 시대적 상황과 주변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의 목격자이면서, 점점 성장해가는 인간상이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열정과 감동으로 생생히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인물의 행적을 완벽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꽤 많다. 과거에는 한 번 연락이 끊기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어렵고, 어린 시절의 경우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 경우가 거의 드문데다, 기록을 남겨도 유실되는 일이 종종 있어 결국에는 다른 목격자의 증언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기에 당사자 본인이 직접 쓰거나 다른 사람에게 남긴 행적 만큼 귀한 것은 없다. 독립운동가 김산과 작가 님 웨일스의 만남이 특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인물의 전기, 자서전 부류의 책을 보면 그 사람의 사상이나 주장이 더 돋보이는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학습책 부류의 위인전에 꼭 들어가는 비범한 일화나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드라마적인 구조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것들과 달리 아리랑에 나타난 김산의 생애와 행적은 있는 그대로다. 특별한 면은 하나도 없고, 사상이나 주장하는 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계속 바뀌고, 하루하루가 성공이 없는 시련 뿐이다.

 김산의 행적과 함께 묘사되는 주변인물과 역사의 흐름은 사진보다도 더 생생하다. 사진으로만 나타난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이 실제로는 어떤 인상인지, 평소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볼 수 있다. 위인전이나 업적 위주로 나타난 책에서만 보던 인상과 다른점이 많아 그 어떤 위대한 인물이라도 똑같은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역사의 현장은 더 깊이 있게 다가왔다.

 보통은 이런 일이 있었고 어느, 어떤 세력, 인물의 행적이 나오고, 결국에는 이렇게 됐다, 정도 밖에 기록이 안 되어 있는 걸 많이 봤다. 더 자세한 기록을 있어야 몰입하면서 보고 느낄 수 있는데 김산의 기록이 딱 그랬다. 시시각각 상황이 변하는 역사의 현장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난의 여정이 말 그대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처절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한계에 직면해도 마지막까지 살아날 수 있다는 걸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냥 몸이 망가질 정도로 힘든 여정을 겪었다고 썼으면 이런 걸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물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나타난 부분도 꽤 의미있어 보였다. 있는 그대로의 행적을 나타낸 만큼 김산이라는 인물의 생각이나 사상이 특정 사건 전후로 변화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점차 확고한 주장이 생기고 하고자 하는 걸 어떻게 해야할지 구상할 정도로 발전한다. 그 동안 위대한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특별하다는 인상이 있던 터라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해서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평범해서 이 정도까지 밖에 못한다는 건 없었다. 김산처럼 수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그에 맞춰 생각과 행동노선을 수정는 과정 속에서 위대한 인물상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꽤 어린 나이부터 한창 젊을 나이 때까지 김산의 행적은 그야말로 열정 그 자체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더 많았어도 그는 한층 더 발전해서 목표한 바를 향해 나아갔다. 지금 시대도 힘든 점이 많은데, 김산 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도전해 본 적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잠깐 해보고 힘들다고 하는 건 아닌지. 실패를 끝으로 방치하고 있는 건 없는지. 열정이 부족하다 싶을 때는 이 책을 다시 볼지도 모르겠다. 아마 여러 번 다시 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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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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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부터 완성체로 나타나는 것은 없다. 기초적인 원형을 시작으로 발전해서 현대의 모습에 이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고, 기존의 요소가 삭제되면서 본연의 모습이 사라지기도 한다. 좀비가 이런 부류의 대표격일지도 모른다.
 역자 서문에서도 언급되지만 현대의 좀비와 원래 시초인 아이티의 부두교 좀비는 확연히 다르다. 발생의 과정부터, 각종 세부요소, 거기에 공포를 일으키는 관점까지. 지금의 과학적인 좀비와 비교하면 판타지적인 면이 강하다. 물론 그 당시에도 과학적으로 연관지으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에는 주술이나 마술 같은 개념과 초자연적인 모습이 주류였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에서는 정통 좀비를 거의 볼 수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옛 것이라고 반드시 사라지는 법은 없으니까.
 
지옥에서 온 비둘기_로버트 E. 하워드

 친구 존과 함께 휴가로 뉴잉글랜드 외딴 곳으로 나간 그리스웰. 그들은 깊은 소나무 숲에서 발견한 폐가에서 하룻 밤을 지내게 된다. 그런데, 불길한 꿈으로 인해 잠에서 깬 그리스웰은 존이 정수리가 깨진 상태로 도끼를 들고 나타난 모습을 목격하는데...
 러브크래프트와 가까운 작가답게 공포의 근원에 다가가는 전개를 보여준다. 정체가 불분명한 미지의 공포와 명백한 위협이 도사리는 실체적인 공포가 혼합되어 있어 독특한 분위기였다.
 클래식한 좀비는 대체로 서인도 제도의 부두교 좀비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예상대로 이 소설 역시 그렇다. 감염이라는 질병 형태로 좀비 자체가 공포로 몰아 넣는 현대 스타일과 달리, 괴기한 분위기 속에서 다소 초월적인 존재의 면모를 보인다. 특히 분위기로 몰아가는 부분은 이 만한 공포스러운 걸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검은 카난_로버트 E. 하워드

 카난 출신의 커비 버크너는 어느 흑인 노파로부터 경고를 듣게 된다. 서둘러 카난으로 돌아가던 커비는 3명의 흑인 무리들에게 습격을 당하지만 무사히 물리치고 근처를 순찰하던 이들과 함께 카난에 도착한다. 카난은 과거에 일어난 학살의 재림이 예고된 분위기에 솔 스타크라는 흑인 주술사가 늪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하는데...
 지옥에서 온 비둘기와 달리 인종차별적인 면이 강하게 느껴져서 불편했다. 노예제의 문제점과 백인들의 차별이 아예 다루어지지 않은 건 아닌데도, 특정 인종을 대놓고 너무 악당처럼 묘사한 점 때문에 그렇다. 역시사지 적인 면을 공포로 다룬 것을 보면 차별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작중 인물들의 행동이나 언행이 지금의 시점에서는 부적절하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천 번의 죽음_잭 런던

 영국의 은행가 집안 출신의 나는 떠돌이 생활 중에 수상쩍은 배의 선원으로 들어갔다 탈출 도중에 익사를 하고 만다. 그런데, 다른 선박 안에서 수상한 실험으로 되살아나고 기획자가 아버지라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인체소생술 실험을 하고 있었고, 이후로 내가 실험체가 되어 수 천 번을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데...
 흔히 아는 좀비의 개념이 아니라서 당황스러웠다. 죽었다 살린다는 개념을 보면 좀비에 속하긴 하지만, 클래식한 부두교 좀비나 현대식 바이러스형 좀비를 떠올려보면 이건 약간 러브크래프트의 허버트 웨스트 <리애니메이트>에 가깝지 않나 싶다.
 좀비요소를 따지지 않고 봤을 때는 거의 SF스릴러에 가까운데, 좀 웃기는 점이 막상 보면 정말 암울한 상황인데 작중 주인공도 미치광이라 그런지 담담하게 진행된다. 또, 신체에 상해를 가하지 않으면서 죽는 방법이 이렇게 다양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_가넷 웨스턴 허터

 아이티의 호텔에 투숙 중인 나는 소금을 쏟는 바람에 아이를 혼내는 마리 할멈이라는 노인을 목격한다. 아이는 부두교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 지방 특유의 미신이라 생각하며 무시한다. 하지만 워낙 관심이 많은 나머지 마리 할멈의 관심을 끌어서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전통적인 아이티 부두교가 기반이 되긴 했지만, 좀비 자체보다는 삶과 죽음이라는 심오한 주제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흔히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모습이 없다보니 어딘지 모를 기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흔히 바라는 영생은 대부분 죽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각하지 못한 상태라면 어떨까? 죽었지만 죽었다는 인식 없이 예전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 가장 현실적인 영생의 형태이며, 나쁘게 악용되거나 무서운 이미지가 아닌 가장 이상적인 좀비의 형태가 아닐까.

귀환자의 마을_라프카디오 헌

 열대지방의 마을에서는 밤에 돌아다니는 좀비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하다. 간혹 낮에도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던 중, 사탕수수 농장 근처를 지나가던 검은 상복을 입은 여인을 한 일꾼이 쫓아가게 되는데...
 앞서 좀비 개념과 다른 걸 넘어 아예 좀비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게 나온다. 이름만 좀비인 다른 것이거나, 부두교 본산지인 아이티 부근에 있던 좀비 관련 다른 설화의 내용을 차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으로 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좀비가 그렇게 알려지지 않던 시대였던 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반영된 것도 있을지 모른다. 약간 동양적인 유령의 형태로도 보이는데, 아마도 작가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나트에서의 마법_클라크 애슈턴 스미스

 유목민 땅, 자라의 왕자 야다르는 노예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당한 약혼녀를 찾기위해 조디크 대륙을 해매고 다닌다. 그러던 중, 요로스 왕국으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듣고 야다르는 상선에 올라타게 된다. 상선은 서쪽을 항해하던 중, 검은 바다 쪽으로 휩쓸리게 되고 그곳은 마법사들이 사는 나트 섬 근처라고 하는데...
 판타지적인 세계관이지만 상당히 음습한 분위기다. 여기서 나오는 좀비는 마법과 판타지 세계관이 적용됐긴 하지만 부두교 좀비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되살아난 시체라는 특징을 너무 잘 살린 나머지 묘사한 문장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라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보면 작가만의 색체가 정말 확고하다는 생각이 든다.
 징그러울 정도의 묘사와 어두운 세계관에 비해 다소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어서 상당히 독특하다. 웅장한 배경과 야다르의 시점에서 나타나는 여정의 흔적이 옛 신화나 설화 같은 분위기를 조성해서 비극이 더 깊게 다가오는 감도 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_이네즈 윌리스

 법으로도 좀비를 사실로 규정하고 있는 아이티. 그곳에서는 좀비와 관련된 많은 이들이 존재한다. 간혹, 몇몇 사람들이 좀비를 다룬다던지. 그것도 특정 지역 출신이...
 앞서 나온 단편들에 비하면 짤막하게 몇몇 에피소드를 시놉시스 형태로 모아 합쳐놓은 구성이다. 대체로 아이티에는 좀비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이 있다, 정도다. 몇몇 부분만 빼면 좀비에 관한 부분은 다른 단편과 크게 다를게 없어서 좀비가 있다는 가정에서 쓴 논픽션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역시 그 당시에는 상당한 화제거리였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심심한 인상이다.

화이트 좀비_비비언 미크

 아프리카에 파견나가 있는 에일릿은 어느 날부터 한밤 중에 심각한 악취를 느낀다. 신비주의를 어느 정도 믿던 에일릿은 자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들을 떠올리던 중, 이미 죽은지 오래인 동료 존 싱클레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배경이 아프리카라는 점만 빼면 <검은 카난>과 비슷한 내용이다. 아마도 이 당시의 좀비 이미지가 유색 인종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백인 좀비가 다소 파격적이라는 생각에 나온 것 같다. 그렇기에 현대의 시점에서 보기에는 아프리카 본토의 야생적 분위기의 좀비물 정도라는 인상이라 특별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할로 맨_토머스 버크

 런던에서 식당을 하고 있는 모모. 영업이 끝난 한밤 중에 별 생각 없이 식당에 나와 있던 중, 갑자기 방문한 거구의 남자를 보고 경악한다. 다름 아닌, 15년 전 아프리카에서 본인이 직접 죽였던 남자였는데...
 분명 좀비물인데 좀비 자체가 주체가 되기 보다는 죽은 자가 돌아왔다는 개념이 더 영향력이 크게 나타난다. 보통 죽었다 살아났다는 개념은 신비로운 현상으로 여기는데, 작중의 모모처럼 자기가 죽였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상당한 공포나 다름없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점만 빼면 그냥 똑같은 사람이라 공포스러운 외형은 아니다. 딱히 무언가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불길하고 소름돋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묘하게 무섭다는 인상이다. 결말을 보면 좀비물 골격을 빌린 심리 호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든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에서 절대 도망치기 힘드니까.

마법의 섬_윌리엄 뷸러 시브룩

 아이티에서 사는 나는 농부 폴리니스가 얘기해주는 미신적인 것들을 듣던 중, 좀비에 대해 묻게 된다. 미신을 믿지 않는 폴리니스는 좀비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면서 한 상업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데...
 서양권에서 좀비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쓰인 소설이라는데, 가장 아이티 전통에 가까운 좀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 않나 싶다. 앞에서 나온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와 비교하면 내용이 더 흥미진진하고 공포면에서도 섬뜩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과 <투셀의 창백한 신부> 두 파트로 나누어진 구성이다. 사탕수수밭의 경우, 전형적인 아이티 전통 좀비 스토리이긴 해도 중간에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구성 덕에 단조로움은 면했다. 창백한 신부의 경우는 보기드문 부유층 시점이라 다소 신선하면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제대로 만든다.

점비_헨리 S. 화이트헤드

 세계대전 후유증 치료차 해외 미국영토 중 하나인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떠난 그랜빌 리. 그는 그곳에서 각종 민간전설을 접하던 중, 점비에 관해 듣게 된다. 아프리카계 혼혈이자 섬의 신사인 제프리 다 실바는 점비에 대해 얘기하면서 자신의 친구로 인해 겪은 일을 알려주는데...
 흔히 좀비의 영어철자를 보면 Zombie인데, 이 소설의 제목은 특이하게도 앞자리를 J로 썼다는 것부터 눈에 띈다. 그래서였는지 번역도 J발음이 더 강하게 점비로 했던 걸로 보인다. 작중에 언급된 바로는 아이티의 좀비와 다른 걸로 보이는데, 이때문에 차별성을 두면서 발음이 비슷하게 J로 바꾼 듯하다.
 이름만 좀비에 가깝지 실제로는 전혀 다른 부류의 존재가 등장해서 좀 당황스러운 면이 적지 않았다. 분명 처음에는 약간 유령 형태의 좀비처럼보였는데, 뒤에 가서는 늑대인간 같은 게 나오다보니 그렇다. 좀비가 다른 것으로 변신을 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강시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중국 전설 속의 강시는 몇 년을 묵으면 후라는 짐승으로 변한다고 한다.

좀비 감염 지대_엘피어스 하이엇 베릴

 저명한 생물학자 고든 파넘은 수명연장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고 오히려 미치광이로 몰아가자 파넘 박사는 연구자료들을 가지고 아빌론 섬에 숨어 버린다. 섬에서도 실험이 계속되는 와중에 박사는 사람에게 임상실험을 시도하게 되는데..
 제목만 봐도 감이 오겠지만, 모두가 잘 아는 현대적 스타일에 가까운 좀비가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소 차이점이 존재한다. 현대 좀비는 바이러스성 질병 형태에 가깝지만, 작중의 좀비는 발생과정이 현대의학과 부두교적 이미지가 섞여서 러브크래프트의 <허버트 웨스트-리애니메이트>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물리면 감염된다는 형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식인을 하는 부분에서는 다소 현대적 인상을 찾을 수 있긴 하다. 그런데 좀비의 특성이 상당히 독특해서 꽤 주목했다. 다소 기괴하고 초월적인 특성이 부두교 좀비의 형식에서 벗어난 발전의 단계로 보였다. 게다가 절대 죽지 않는 다는 점만 빼면 다소 바이오하자드에 나오는 좀비가 연상되서 상당히 놀라웠다.
 신선하고 발전된 좀비가 나오는 것에 비해 마무리에서 약간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뭐, 애초에 좀비가 나온다는 것부터 현실성을 따질 것도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비 해결책 치고는 상당히 뜬금 없어 보이고 배경적 설정에서 개연성도 없어 보여 영 시원치 않게 보인다. SF적인 부분으로 보려고 해도 파넘 박사의 실험 외에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여서 역시나 시원치 않다. 결론은 작가 마저 감당 못할 작중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어떻게든 끼워 맞춘 와장창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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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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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하던 삶이 갑자기 요동칠 때가 있다. 살아가던 환경이 변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 선택과 상관없이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없게 되고,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뒤쫓아오는 세상의 흐름에 금방 깔려 죽고 만다. 과거를 뒤돌아보며 앞으로 계속 뛸 수 밖에 없는 게 삶이라면 그것대로 잔인한 일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록 얻는 것보다 잃어버리는 게 더 많은데 이게 진짜 삶을 사는 이유일까.

 꽤 긴박하게 나타내긴 했지만, 실제 현실은 이렇게까지 스릴 넘치지 않는다. 진짜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할 엄청난 일이 닥친다면 앞만보고 뛰는 것도 버거워 아마 살기 싫어질지도 모른다.

 평범한 인생을 살던 택배 배달원 아오야기 마사히루가 총리 암살범으로 몰려 쫓기는 내용으로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다. 내용만 보면 정치 음모론적인 스릴러로 보이지만, 아오야기를 중심으로 한 주변인물들 간의 삶이 더 강조되는 부분이 많아 사건의 전말보다는 인생에 대한 생각을 더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건의 실체를 알고 싶어하는 경우라면 김빠진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정치계 관련 미스터리처럼. 개인적으로는 음모론적인 배경과 삶에 대한 철학을 같이 잘 살렸다고 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 뜻밖의 만남과 인연. 전부 스릴러적인 분위기로 보여도 실제 일상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아무 탈 없던 인생이 갑자기 뒤집어지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인생 계획을 세워도 자의든 타의든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언제 어디서 아는 사람을 만나거나, 또는 생판 모르는 이와 갑자기 인연이 생기는 것도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보면 삶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정말 이상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총리 암살 사건도 아오야기의 입장에서 보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삶의 위기다. 이런 엄청난 일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나랑 관련없는데 휘말렸거나, 억울한 일이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모른다. 교통사고나 질병, 자연재해 같은 것도 예고하고 오지 않듯이. 결국에는 내 삶의 일부분이다. 그래서 피하려고 해도, 이전과 같은 때로 돌아갈 수도 없어서 이겨내거나 혹은 도망치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도망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힘든 순간을 무조건 이겨 내라는 법은 없다. 안 되면 때로는 도망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세상의 흐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앞에서 삶이 강조된다고는 하지만 추격 부분도 나쁘지 않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긴장감과 스릴이 부족한 감이 전혀 없고,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흔히 영화를 보는 듯한 속도감이라는 걸 이런 것이라고 해야겠다.

 미디어에 관한 비판도 꽤 주목하는 부분이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떠들지만 세세하게 들어가면 대부분 검증되지 않는 것이나 추측을 기정사실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어디서는 좋은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다른 곳에서는 나쁜 이미지가 만들어져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어도 책임을 지지 않아서 더 문제다. 정보의 빠른 공유와 파급력이 중요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건 빠른게 아니라 그냥 성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제목이자, 작중에서도 간간히 언급되는 비틀즈의 골든 슬럼버 가사를 보면 구슬픈 느낌을 준다. 진짜 힘든 순간에는 좋았던 시절이 떠오르고, 이대로 다 내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 어딘가 도망칠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 이 모든 상황을 버리고 피하는 도망이 아니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이들의 도움이 있는 곳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한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다.

 힘들 때 잠드는 것보다 더 편한 건 없다.

 잠들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건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시절의 지인들.

 비록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때의 사람들은 변함없는 미소로 깨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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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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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앞으로 나가면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고는 한다. 정해진 수순인 것, 한철인 것, 시대흐름인 것. 그 외의 여러 이유로 수 많은 것들은 없어졌다. 영원했으면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고 아쉬움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결국에는 변함없이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쓸쓸함만 남는다. 만화 보노보노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 있다. 어째서 재미있는 일은 끝나는 것일까. 어째서 재미있는 일은 계속될 수 없는 걸까. 어릴 때 많이 생각하던 것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시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엘리엇 가족처럼 유령 혹은 흔히 몬스터라 불리는 존재가 가족으로 생활하는 스토리는 간간히 본 적 있다. 본질은 무서운 존재지만 가족이라는 구성을 넣으면서 친근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생활방식을 알아가는 과정과 존재의 다름으로 인해 생기는 위기에 대한 걱정이 더해져 이 세상에 없을 특별한 가족상이라는 점이 참 재미있는 요소로 작용해 깊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저런 가족과 함께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가끔 한 적이 있는데, 작중 주인공인 소년 티모시는 나의 상상이 나름대로 실현된 모습처럼 보였다.

 다양한 가족들의 모습과 이들이 함께 모인 자리는 기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티모시가 느끼는 것처럼 즐겁게 보인다. 그리고 티모시와 마찬가지로 계속됐으면 하지만 책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건 쓸쓸하게 끝이 난다. 이렇게 보면 안 좋은 의미로 보이지만 작중 곳곳에서 끝이 가지는 여러의미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끝의 아쉬움만 생각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잘 생각해보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이란 의미와 그에 따른 불편함을 잘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끝이 있어서 영원을 생각하는 것처럼, 영원이 있어서 끝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죽음의 존재들이 끝을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영원을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마도 서로가 반대되는 존재이니 염원하는 것도 반대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영원은 끝을 모르고, 끝은 영원을 모르니까. 앞에서 말한 보노보노의 질문에 대한 답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순간, 좋은 날이라고 영원히 계속된다면 그 의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하나의 자원이 고갈되어 없어지듯이 좋은 순간도 어느 순간 동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오래된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것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기억 속에 단 하나의 좋은 순간만 영원하다는 건, 그 만큼 텅 빈 부분이 많아지는 것이고 의미도 변질되고 만다. 엘리엇 가족 중, 미라인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도 좋은 순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쌓여 있다. 그 순간들은 모두 다른 기억이지만 서로가 그때의 느낌을 공유하며 하나의 좋은 기억으로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과 끝 어느 하나가 반드시 좋다기 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라는 생각이다. 영원은 끝으로 사라지고, 끝은 곧 영원이 되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제목에도 있는 10월은 가을에 접어들어 낙엽이 지는 시기다. 거기에 연말, 정확하게 10월의 마지막 일인 31일에는 할로윈이 있다. 그 떠들석하고 즐거운 날이 지나면 11월, 곧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라 끝이 강하게 인식되는 감이 있다. 엘리엇 가족이 사는 저택도 이런 인상일지도 모르겠다. 끝에 존재하는 영원,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영원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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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름을 부른다면
김보현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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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나먼 오지나 조난 같은 단절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아도 현대사회에 고립은 존재한다. 그 중 심리적 고립이 많으며 해결하기 어려운 축에 속한다. 거대한 세상에 혼자 뚝 떨어져 있는 느낌, 모두의 시선이 나 자신을 한 없이 작은 존재로 여겨지게 만드는 느낌이라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깊이를 실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 그래도 무섭게 다가오는 세상. 그런데 그 세상이 어느 날 한 순간에 사라진다면, 모든 것이 단절되어 버린다면. 단절의 단절은 어떤 느낌일까?

 표지만 보면 잘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좀비소설이다. 좀비소설하면 가장 유명한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Z나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를 생각하면 간혹 나오는 잔인한 묘사나 종말적인 상황에서의 군상극을 쉽게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새벽의 저주나 28일 후 같은 좀비영화 역시 그렇고. 그런데 이 좀비소설은 조금 특별하다. 좀비가 발생하고 붕괴, 좀비묘사까지는 다른 소설과 거의 다를 것이 없지만 특별한 점은 그 이후 부터다. 지방 소도시와 시골을 배경으로 펜싱소녀가 좀비들을 지키는 것이다.

 좀비를 죽이지 않고 지킨다는 발상은 나름 여기저기서 시도되고 있는 소재이긴 하다. 국산 인디영화인 이웃집 좀비 3번째 에피소드인 <뼈를 깎는 사랑>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영화와 차이점이 있다면 소설은 대도시가 아닌 시골이고, 지키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대체로 이런 상황이면 갈등이나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어지지만, 이 소설은 거의 좀비가 들어간 성장물 같은 느낌이다.
 나름 고증이 탄탄한 농사방법과 함께 나타나는 시골풍경과 소녀의 일상을 보면 그 동안 보았던 소설이나 영화에서 봤던 좀비 아포칼립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뭔가 잔잔한 느낌이다. 이렇게 좀비를 격리 시킬 수도 있고, 안전하게 관리할 수도 있는데 무조건 죽이는게 답이라고 생각한게 잘못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시골동네라는 환경적인 이점이나 기발한 펜싱 응용법이라는 주인공만의 특성이 만들어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꼭 죽여야 한다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사실 좀비는 어디서 나오든 죽이고 보는 존재나 다름 없기는 하다. 게다가 세상이 망하면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차라리 죽이는게 속 편하다는 자기합리화로 나름의 설명을 하기도 한다. 희망이 없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조차 생각해보지 않고 최선이라 여겨도 되는 것일까.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고 나서 최선이라고 판단하는 게 더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는데. 그 동안 좀비소설하면 무조건 절망, 죽음을 떠올렸는데 지금 보면 그게 편견이었던 것이다.
 소중한 것은 없을 때 가치를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대체로 죽음 이후에 알게 되는데 좀비는 그걸 역설적인 상황으로 만든다.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죽었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죽었지만 곁에 있다.
 비록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이지만 소중한 것은 곁에 있으니 이만한 의미와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상황이 또 있을까. 모두를 피하고 싶고 불만스러운 세상이 어느 순간 나를 부르지 않는다면 일시적으로 편해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누군가 나를 불러주었으면 하는 때가 오고 만다. 그때가 됐을 때면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걸 대비라도 한 것일까. 원나에게는 나름 빠르고 의미있게 고립으로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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