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예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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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발생에는 근원이 있는 법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발생하는 일이란 없기에 무엇이든 반드시 원인은 존재한다. 문제라면 그 흔적이 얼마나 오래됐고, 현재 얼마나 남아 있냐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라면 모를까, 훨씬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건 사연을 넘어서는 역사가 된다. 현 시점 이전에 다른 무언가 존재했던 시절. 아니,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던 자연 그대로의 맨땅이었던 시절까지 가야 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가서 마주해야 할 것이란, 과연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작가인 나는 예전에 썼던 공포소설 후기에 적힌 제보글을 통해 쿠보 씨라는 기자로부터 어떤 공포 체험담을 듣게 된다. 새로 이사한 집의 침실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자신이 지켜보고 있지 않을 때만. 이것만 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던 상황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한다. 소리와 함께 어떤 물체가 목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걸 들은 나는 문득 기시감을 느끼다가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 동안 독자에게 받은 괴담글 중에서 쿠보 씨가 사는 곳과 번지수가 같은 편지가 있었고, 거기에 적힌 내용이 쿠보 씨의 경험담과 똑같아 보인 것인데...

하나의 괴담을 통해 공포의 근원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종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 시작은 단순한 탐구에 가까웠다. 이러한 괴담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나 사연이 있을까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게 점차 스케일이 커지며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구덩이가 되어간다. 분명 무언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파해쳐도 흔적이 나오질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어디까지 가야 실체가 나올지 알 수 없다고 해야겠다. 괴담이라는 작품 특징을 살리려 했는지 작가가 실제로 겪은 일처럼 서술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지는 일상적인 면이 묘사 되고, 실존 인물인 동료 작가가 등장한다던지 말이다.

괴담의 원류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꽤 많은 걸 느끼게 된다. 내가 사는 지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전에 누가 살았고. 지금은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살고 있고. 지금 살던 자리에 이전에 무엇이 있었고. 그 당시에는 또 누가 살았고. 무슨 일이 일어난 적은 없을까. 하나를 따지기 시작하면 이렇게까지 많은 게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땅에 대한 역사는 깊어지고, 수많은 이들이 거쳐간 기록은 계속 쌓여간다. 그 안에는 간혹 꺼림 직한 일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생겨난 이후로 아무런 손이 닿지 않은 땅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작중에서 발생 중인 괴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나 체계적이라 놀랍게 한다. 특히 여기서 처음 알게 되는 사예라는 것과 일본 문화에서 더러움(케가레)이란 단어를 인식하는 의미가 정말 흥미롭다. 사실 이 사예라는 건 이미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봤을지도 모른다. 일본 공포영화에서 묘사된 저주 형태로 말이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장소에서 들러 붙는 무언가. 한 번 접촉하면 죽을 때까지 따라오는 것. 당사자가 아닌 관계자에게도 따라 붙어 이어지는 공포. 이러한 것이 바로 사예이자 케가레라고 한다. 다만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퍼져 나가는 형태는 아니다. 어느 정도 규칙이 있으면서 언제 어떻게 붙을지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렇기에 뭔가 더 무섭다는 인상이 든다. 생각지도 못하게 불행이 따라오는 일이 생기거나, 아니면 의도치 않게 남에게 불행을 떠넘기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 이걸 보며 국내에서도 상갓집에 다녀오면 소금을 뿌리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보통 이렇게 괴이한 사건의 파편을 맞춰가며 점차 무서운 일을 겪게 되는 전개가 흔하긴 하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작중 주인공이 당하는 무서운 묘사가 일절 없다. 전부 과거 시점으로 들려주는 체험담이나 찾아낸 문헌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시점에서 관련 있을 어떤 사건을 알게 되도 진위를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 그러니까 전부 이야기 듣고 맞춰가며 전해지는 무서운 분위기가 전부인 것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무섭다는 느낌이 점차 강해지기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무서운 존재를 등장시켜서 무섭게 하는 것보다, 분위기로 이끌어가는게 더 어려운 편이라 그렇다. 영화도 그렇지 않은가. 귀신이나 괴물이 나오고 점프 스케어를 쓰는 경우라면 쉽고, 분위기와 상징성으로 불길함을 강조하는 오컬트 류가 어려운 것처럼.

그렇게 이 괴담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하자면 이거다. 서로 관계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사실은 하나의 시작점에서 연계 됐을지도 모른다. 원래 있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새로 들어온 타지 사람이 생기는 과정을 통해 이야기의 잔여물이 계속 퍼져나간다. 그래서 기존의 형태를 잃고 흔적만 남을 수도, 아니면 거기서 파생된 다른 이야기로 발전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무서운 이야기의 파급력을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 설명했다 할 수 있다. 제 아무리 관여되고 싶지 않더라도 언제 어떻게 접하게 될지 모르는 것이 이야기고, 특히 괴담 같은 무서운 이야기라면 피할 수 없다고.

이 연계성이 작중에서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살짝 놀라웠던 순간이 있다. 이 소설과 연관성 있는 다른 작품인 <귀담백경>에서 본 듯한 괴담이 언급된 부분이다. 맨 처음 편지의 존재로 언급된 것과 거의 결말 쯤에 가서 언급되는 것. 이렇게 두 개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될 여지도 있다. 사실 <귀담백경>에 나온 괴담 중에 이 소설과 알게 모르게 연결된 것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귀담백경>과 이 작품이 연관성이 있다고 들었지만 이런 식이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또한 이야기의 파급력을 나타내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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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모자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기원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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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서 답을 찾아내는 과정이란 퍼즐 맞추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나의 과정을 통해 그림 일부를 만들고, 이게 어느 부분과 연결되는지 다시 찾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 과정 속에서 공정성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긴 하다. 그냥 봐서는 알 수 없을 감춰 놓은 조각이나 예상하지 못할 조각이 존재하느냐고 말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시대가 지날 수록 확장성을 떨어뜨린다고 지적 받기에 지금 와서 보면 경직되어 보일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퍼즐형 추리소설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뉴욕 브로드웨이 극장가에 있는 로마 극장에서 공연 도중 관객석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뉴욕 경찰청의 리처드 퀸 경감과 그의 아들인 엘러리 퀸이 현장에 도착해 조사를 시작하니 피해자는 질 나쁜 변호사로 알려진 몬테 필드다. 사인은 독살로 추정되는 와중에, 엘러리는 몬테 필드의 모자가 어디서에도 발견되지 않은 점에 의문을 가진다. 이 모자는 수사를 진행할 수록 중요 단서로 떠오르기에 엘러리와 퀸 경감은 어떻게든 찾아내려 하는데...

수 많은 인원이 있는 극장에서 발생한 독살 사건. 그 자리에 있던 범인과 연관성을 가진 다수의 인물. 정통적인 추리소설 전개로서 아주 그럴 싸한 무대다. 제목처럼 모자가 사건의 핵심으로 주목 받으며 끊임 없이 언급되기에 특이성 면에서도 주목 받을 만하다. 대체 모자가 뭐길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걸까.

모자로 시작된 미스터리를 완성 시켜 나가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온갖 가능성 속에서 모자가 왜 중요한지 체계적으로 정리해 강조하고. 의미 있는 추리와 단서를 통해 모자의 진짜 의미를 알아내고. 이 모자 때문에 사건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는지 밝혀질 때는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조금만 눈썰미가 있으면 초반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어서 작가가 추구한 대결 구도에 어느새 빠져들게 된다.

다만 이런 기대에 비해 스토리 자체는 크게 특별한 것이 없긴 하다. 질 나쁜 악당이 살해 당했고, 범인은 그와 가깝거나 연관된 인물 중 하나. 이 구도 안에서 앞서 말한 퍼즐형 추리를 추구하기에 다소 정해진 패턴대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편이다. 인물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인다기 보다는 그 자리에서 가능한 추리를 진행 시키고 단서나 용의자가 지목되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식이다.

보기보다 단순한 구성이면서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며 검토 하는 부분이 많아 좀 더디게 보일 만하다.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이다. 사건의 진상 역시 당시 시대상이나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라는 걸 감안해도 조금 불호의 의견이 나올 만하다. 동기에 대한 부분이 이해 못할 건 아니지만,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인상이라 그렇다.

물론 이런 단점으로 지적된 부분들은 대체로 요즘 시대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엘러리 퀸의 스타일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사건 현장 도면, 주요 인물 정리 같이 사전 정보를 제공한다는 부분은 지금도 많은 작품에서 사용할 정도로 익숙한 부분이고. 독자와의 대결 구도를 추구하는 만큼 추리 과정을 상세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쉽다. 그 만큼 기초적인 토대가 잘 들어나 보여서 추리 과정을 상세히 알고 싶은 경우라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공정성을 추구하는 만큼 탐정을 따라 다니며 과정과 결과만 보는 게 아니라,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구조다 보니 더 그렇게 보인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는 추리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너무 오래된 작품이라 시시하고 감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평가 받는 의견이 나와도 굳이 찾아 읽어봐야 할 가치는 여전히 있다. 제대로 된 바탕을 다지기 시작하고, 기발함 하나로만 시도한 수 많은 가능성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의 작품인 만큼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날 것이란 이런 거다. 별거 아닌 기발함을 토대로 복잡한 논리를 구축하거나, 엄청 어려워 보이는 걸 간단한 논리로 풀어내는 것. 오로지 가능성에만 무게를 두고 진행시키기에 생각 이상으로 자유분방하다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전 추리의 이러한 부분에 감탄하고는 한다. 그래서 이 가능성의 문제를 잘 나타내는 작품일 수록 흥미를 느끼고, 엘러리 퀸이 재미 있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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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동물 기록 - 피터 아마이젠하우펜 아카이브
호안 폰쿠베르타.페레 포르미게라 지음 / 이은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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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같은 가짜. 예전부터 이런 것에 많이 끌리고는 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는 이런 게 진짜 있을까 싶었고. 가짜라는 걸 알았을 때도 그건 그것대로 대단했다. 상상의 세계를 현실과 구분이 되지 않게 구현했다는 것이니 말이다. 현실에 구현한 환상. 대부분의 곳이 실체가 밝혀지고 미지가 거의 사라진 현실에 큰 자극을 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오랜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소문. 이 책에서는 그러한 상상의 동물에 가까운 생명체들을 소개한다. 단순히 가벼운 도감 같은 게 아니다. 우연히 발견된 독일의 어느 생물학자(이 역시 가공의 인물이다.)가 실제로 조사한 기이한 생물 기록을 정리해 출간한 연구집이란 설정으로 나온 책이다. 그래서 생물학 연구 자료 같은 느낌의 서술에 진짜 목격하고 촬영한 듯한 사진들이 실려 있다.


대부분 기존에 알던 동물들의 외형이 섞여 있거나 어딘가 변형된 듯한 생명체들이다. 표지에 있는 것부터 원숭이와 조류가 섞인 외형이고. 그 밖에도 다리 달린 뱀, 팔이 달린 조개, 거북이 등껍질이 달린 새, 토끼 발이 달린 오리 등등. 글로 된 설명으로는 별거 아니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진짜처럼 찍은 사진이 같이 있다 보니 상당히 기상천외한 느낌을 받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흑백사진으로 찍은 게 상당한 효과를 발휘 했다고 본다. 단순히 이 생물을 발견한 시대적 배경에 대한 고증이라 할 수 있지만, 다소 어색할 수 있을 부분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린 것 같기도 한다. 해당 생물의 사진 뿐만 아니라 원본 원고와 해부학 스케치 같은 사진들도 같이 있어 사실감을 더해준다.

생물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참 재미있다. 대체로 발견한 상황에 따라 어디까지 조사했는지 기술하는 편이다. 생물이 발견된 상황이나 습성에 따른 변수나 학자로서의 판단, 주변 환경에 따른 제약. 이러한 실제로 겪을 법한 상황 설정이 반영되어 있어 글로서도 꽤 현실감을 부여한다. 또한 해당 자료들이 세상에 처음 발견됐을 때 상당수가 유실됐다는 설정이 있어 설명 없이 사진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오직 사진으로만 감상하고 해석해야 되기에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이건 어떤 상황에서 촬영한 걸까. 이건 어떤 습성을 가지고 있을까.

다소 참고해야 할 부분이라면 각 생명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다, 라는 식의 세세한 설정이나 상황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도감 같은 걸 생각하면 실망할 가능성이 없잖아 있다. 글로 된 설명은 해당 생물을 보고서 쓴 관찰 자료나 수필 같은 느낌이고. 사진만 있는 경우라면 아예 아무런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라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이 책은 단순 흥미 위주의 도감이 아니라 예술 사진을 감상하는 아트북에 가깝다고 알아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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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면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박수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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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얼굴이란 모든 본질을 비춘다고 봐야 할까. 표정과 속마음이 서로 다르고, 진실보다는 거짓인 경우가 더 많으니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 되는 게 없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가면이란 도구와 단어의 쓰임새가 괜히 생겨난 게 아니다. 처음부터 본질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아예 알 수 없게 가려버리는 역할. 이걸 하나의 개인이 아닌 세계를 덮어버리면 본질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진실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가면 너머에는 어떤 진실이 존재하는 걸까.

시시야 가도미는 괴기 소설가인 휴가 쿄스케의 부탁으로 도쿄 외진 곳에 위치한 기면관에서 열리는 모임에 대신 참석하게 된다. 희귀한 가면 컬렉션으로 가득한 어느 재력가의 별장으로 역시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가게 된 것이다. 눈이 내리는 4월에 예정된 참가자들이 저택에 모이고 개인실 외에는 정해진 가면을 쓰고 다녀야 한다는 규칙 속에서 정해진 일정이 진행된다. 그런데 다음 날 폭설로 인해 기면관이 고립되고, 안채에 있는 기면의 방에서 주최자인 카케야마 이츠시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는데...

암흑관 이후로 오랜 시간이 걸려 나온 관 시리즈 후속작이다. 전작인 암흑관에서 그 동안 나온 관의 흔적이 모두 들어 있어서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기면관의 경우는 거기서 미리 예고한 거나 다름 없다고 작중 스토리에서 언급된다. 사실상 모든 관들의 종착점이 암흑관인 셈이라 그 동안 보아온 관들의 흔적은 물론, 앞으로 나올 관에 대한 예고 역시 존재했다고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기면관의 특징이라면 비슷한 체형의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가면이다. 보통 추리소설에서 사건이 발생하면 신원을 확인하는 문제가 우선인데, 이 작품은 그걸 대놓고 이용한다고 예고하는 거나 다름 없다. 다만 신원 확인을 숨기는 트릭은 너무나 고전적이고 비교적 추리 과정이 심심한 편이다. 이걸로 메인 추리 전부를 담당하려면 자연스레 대단한 걸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커지게 된다. 게다가 관 시리즈 특성상 비밀 장치의 역할 역시 주요 관심 대상이고. 그렇기에 이 작품은 비교적 아쉽다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긴 하다.

트릭이나 추리 자체가 흥미롭지 않다는 건 아니다. 가면이란 제한적인 상황에서 주어진 정보로만 진실을 찾아내는 과정은 보기보다 어렵게 나타난다. 끊임 없는 가정이 제시 되고. 이미 증명됐다고 여기던 사실에도 계속 혹시나 하는 여지를 두게 되고. 결론적으로는 뚜렷하게 증명되는 건 얼마 없이 의심만 늘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맹점과 고정 관념을 타파하며 조금씩 논리를 구축해 밝혀지는 반전은 꽤 나쁘진 않다. 진짜 가면으로 가려 놓은 듯한 시커먼 어둠의 비밀 그 자체였다.

비밀 장치에 대해서는 전작인 암흑관에서 뭔가 의존도를 줄여 나가려는 듯한 느낌이 없잖아 있어서 기대를 낮추고 있던 편이다. 그런데 기면관이라는 컨셉과 꽤 어울리는 비밀 장치를 보여주고, 이게 사건의 트릭과 매우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져서 상당히 좋게 봤다. 추리에서 비밀 통로하면 반칙이라는 인상이 너무 강하다 보니 활용도를 더욱 살릴 필요가 있다. 관 시리즈의 경우는 초창기 시절에 이런 지적을 많이 받은 편이고, 갈수록 비밀 장치가 필수요소가 되면서 개선하려 노력한 편이다. 그렇게 무엇을, 어떤 식으로,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를 비밀 통로와 잘 엮은 트릭으로 거듭된 개선을 증명했다고 본다.

문제라면 사건이 발생해서 해결되기까지 시간상의 과정은 자체는 짧은데, 분량은 길다는 점이다. 여기에 긴박하고 스릴 있게 하는 요소가 거의 없이 잔잔한 하게 흘러가서 템포가 축 처지게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추리 과정 대부분이 신원 확인에 대한 부분이 많고 그 만큼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경향까지 있어 더하다 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 장황하게 다룰 필요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분량이 늘어진다는 느낌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이 단점을 감안하고 계속 읽을 필요가 있느냐 하면 호불호가 있다고 밖에 말하지 못하겠다. 이 작품의 기묘한 분위기에 나름 몰입했다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을 테고. 그저 가면의 정체만 중요하게 여겼다면 불필요한 잔가지가 많게 보일 만해서 그렇다.

이제 남은 관은 작가가 집필 중이라고 밝혔던 쌍둥이 관이다. 국내 번역 기준으로는 아동도서 시리즈에 묶여 나와 정발이 되지 않았던 깜짝관까지 해서 두 개라 할 수 있다. 최후의 피날레인 만큼 시시야 가도미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에게 어떤 마지막을 보여줄지 기대가 크다. 이건 언제 볼 수 있을까. 번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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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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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확인할 기준은 시장의 제 역할이라고 본다.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실물경제를 체감함으로서 실생활이 보장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그렇다. 이는 곧 어떤 식으로든 시장이 붕괴되면 대다수의 일상에 지장에 생겨 대혼란이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합법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연스레 무법지대가 늘어서고 당장의 일상을 보장할 별다른 방도가 없다면 그대로 역할을 대체하게 된다. 좋고 나쁨의 기준을 따질 여력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한 번 형성된 어둠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어둠을 낳으며 은밀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지, 그냥 떠도는 소문인지 모를 괴이를 말아다.

키타큐슈 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광부를 그만둔 직후에 대학 친구인 쿠마가이 신이치의 연락을 받고 도쿄로 상경한 모토로이 하야타. 신이치는 패전 직후 형성된 암시장을 관리하는 데키야인 아버지로부터 '붉은 미로'라는 암시장에 출몰한 붉은 옷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야타에게 실체를 밝혀 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여자를 뒤쫓아 다닌다는 괴담 그 자체의 존재라 하야타는 다소 난감해 하면서도 문제의 암시장으로 향한다. 거기서 미군 병사가 얽힌 살인사건에 대한 소문이 괴담으로 발전된 사실을 듣게 되고, 붉은 미로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에 밀실 살인이 벌어진 현장을 목격하는데...

1편인 〈검은 얼굴의 여우〉와 2편인 〈하얀 마물의 탑〉 사이의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하얀 마물의 탑〉에서 도쿄 암시장 사건으로 미리 언급되기도 해서 상당히 궁금했다. 솔직히 암시장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것이라 평소에 듣기 힘든 편이다. 그 부분에서 호기심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암시장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수도인 도쿄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일 정도면 대체 패전 직후의 일본 내 사정은 어느 정도였다는 말인가. 단어 그 자체에 어둠이 존재하는 만큼 암시장 안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사건 발생 장소인 붉은 미로는 구조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그 안에 다양한 생활상이 공존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혼란한 사회상을 눈에 보이는 구조물로 표현한 것이나 다름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는 불량 식품. 길바닥을 떠돌며 살아 남고자 하는 전쟁 고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제3국인이라 불리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이권 다툼. 이 모든 것은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는 책임을 회피하며 사실상 방치를 하고 있으니 그 자리를 합법을 자처하는 불법이 차지하게 된 셈이다. 이 당시에 만연하던 암시장의 존재란 이렇게 설명된다고 본다.

문제의 괴이인 붉은 옷에 대한 부분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기본적으로는 원래부터 일본에 존재하던 도시괴담과 서양의 유명 도시전설이 섞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다만 둘 다 사람을 해치는 위협적인 존재로 알려진 것에 비해 붉은 옷은 다소 애매모호한 면이 강하다. 직접적인 해를 끼친다기 보다는 그저 존재 그 자체가 불쾌감을 조성한다고 할까. 명확한 무언가 없이 소문의 소문일 뿐인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하니 이 애매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아쉽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존재로서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많이 놀랐다. 익숙한 청바지의 청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밀실 사건에 당대의 어둠이 반영된 괴이의 존재까지 나와서 무엇을 어떻게 이어갈지 기대하게 만들만하다. 하지만 뭔가 기발한 트릭 같은 걸 기대했다면 좀 싱겁게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모토로이 하야타가 등장한 시리즈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공포 요소가 섞여 있다는 점 외에는 다소 이질적인 면이 많긴 했다. 가령 패전 직후의 역사적 분위기를 짙게 반영하여 당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이번 작품에서는 유독 크게 강조되어 있는 편이라 반전 요소가 강한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을 선호한다면 괜찮게 볼 만하고. 트릭이나 괴이한 부분이 강조 되는 본격 미스터리를 원했다면 다소 호불호가 생길 만도 하다.

국가에 버림 받은 이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 어둠이 끝내 폭발한 것이 이번 사건의 실체에 가깝다. 모두가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불만을 표출하고 싶어도 어디에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높으신 분들에게 따져봐야 늘 기대를 배신 당하기에 각자도생이 우선시 되고 만다. 결국 돌고 돌아서 남는 건 황폐한 세상에서 최대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과 해소되지 않고 쌓여가는 불만이다. 이성적으로는 최대한 둘을 서로 분리해서 따로 보려고 하지만, 같이 놔두면 언젠가 폭발할지 모를 인화성 물질이나 다름 없다. 언젠가 터질지 모를 잠재된 불안 요소이기에 도화선만 준비되면 폭발은 시간 문제였던 셈이다.

처음부터 남을 챙길 여유 따위 전혀 없는 매정한 경우였다면 모를까, 붉은 미로 안의 인물 대부분은 인정 넘치는 모습이라 더 안타깝게 보인다. 아무리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하지만, 암시장의 형성 과정처럼 은밀한 어둠을 숨긴 채로 살아가고 있어서 그렇다. 이게 악의적으로 숨겼다기 보다는 일부러 이러지 않고서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아무런 구분이 없으면 그저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무언가 다르다고 인식이 생기면 꺼리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 어떤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 돌며 거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마치 붉은 옷처럼 말이다.

이건 반대쪽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히 무슨 일이 발생한 적은 없지만 자신들에 대한 꺼림직한 시선을 경험함으로서 붉은 옷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즉, 모두가 공통적으로 붉은 옷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존재를 지칭하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붉은 옷이란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차별이 형상화된 존재라고 본다. 그렇기에 확고한 정체 없이 피해자만 존재하는 한편으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식으로 상당히 뒤틀려 있다. 미지의 공포가 어느 한 곳을 향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잣대를 제시하며 사회를 뒤흔든다. 이건 작중 암시장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는 일이다. 그러니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붉은 옷 같은 불길한 존재를 떠올리기 앞서 스스로가 붉은 옷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탄광, 등대, 암시장. 이제 모토로이 하야타가 향할 곳은 어디일까. 늘 범상치 않은 곳을 배경으로 하기에 기대가 크다. 역자 후기에 나온 정보를 보니 이미 정해진 배경이 있다고 하니 기다려 봐야겠다. 아니, 나오더라도 번역이 될지 부터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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