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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옷의 어둠 ㅣ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4년 4월
평점 :
사회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확인할 기준은 시장의 제 역할이라고 본다.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실물경제를 체감함으로서 실생활이 보장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그렇다. 이는 곧 어떤 식으로든 시장이 붕괴되면 대다수의 일상에 지장에 생겨 대혼란이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합법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연스레 무법지대가 늘어서고 당장의 일상을 보장할 별다른 방도가 없다면 그대로 역할을 대체하게 된다. 좋고 나쁨의 기준을 따질 여력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한 번 형성된 어둠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어둠을 낳으며 은밀한 공포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지, 그냥 떠도는 소문인지 모를 괴이를 말아다.
키타큐슈 탄광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광부를 그만둔 직후에 대학 친구인 쿠마가이 신이치의 연락을 받고 도쿄로 상경한 모토로이 하야타. 신이치는 패전 직후 형성된 암시장을 관리하는 데키야인 아버지로부터 '붉은 미로'라는 암시장에 출몰한 붉은 옷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야타에게 실체를 밝혀 달라고 부탁한다.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여자를 뒤쫓아 다닌다는 괴담 그 자체의 존재라 하야타는 다소 난감해 하면서도 문제의 암시장으로 향한다. 거기서 미군 병사가 얽힌 살인사건에 대한 소문이 괴담으로 발전된 사실을 듣게 되고, 붉은 미로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에 밀실 살인이 벌어진 현장을 목격하는데...
1편인 〈검은 얼굴의 여우〉와 2편인 〈하얀 마물의 탑〉 사이의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룬 내용이다. 〈하얀 마물의 탑〉에서 도쿄 암시장 사건으로 미리 언급되기도 해서 상당히 궁금했다. 솔직히 암시장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것이라 평소에 듣기 힘든 편이다. 그 부분에서 호기심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암시장이라는 단어가, 그것도 수도인 도쿄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일 정도면 대체 패전 직후의 일본 내 사정은 어느 정도였다는 말인가. 단어 그 자체에 어둠이 존재하는 만큼 암시장 안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사건 발생 장소인 붉은 미로는 구조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그 안에 다양한 생활상이 공존하는 면에서도 그렇고, 혼란한 사회상을 눈에 보이는 구조물로 표현한 것이나 다름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는 불량 식품. 길바닥을 떠돌며 살아 남고자 하는 전쟁 고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남은 제3국인이라 불리는 이들 사이에서 발생한 이권 다툼. 이 모든 것은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발생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국가는 책임을 회피하며 사실상 방치를 하고 있으니 그 자리를 합법을 자처하는 불법이 차지하게 된 셈이다. 이 당시에 만연하던 암시장의 존재란 이렇게 설명된다고 본다.
문제의 괴이인 붉은 옷에 대한 부분은 여러모로 독특하다. 기본적으로는 원래부터 일본에 존재하던 도시괴담과 서양의 유명 도시전설이 섞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다만 둘 다 사람을 해치는 위협적인 존재로 알려진 것에 비해 붉은 옷은 다소 애매모호한 면이 강하다. 직접적인 해를 끼친다기 보다는 그저 존재 그 자체가 불쾌감을 조성한다고 할까. 명확한 무언가 없이 소문의 소문일 뿐인 상태에서 사건이 발생하니 이 애매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아쉽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정체불명의 존재로서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많이 놀랐다. 익숙한 청바지의 청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밀실 사건에 당대의 어둠이 반영된 괴이의 존재까지 나와서 무엇을 어떻게 이어갈지 기대하게 만들만하다. 하지만 뭔가 기발한 트릭 같은 걸 기대했다면 좀 싱겁게 보일 수도 있다. 사실 모토로이 하야타가 등장한 시리즈는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공포 요소가 섞여 있다는 점 외에는 다소 이질적인 면이 많긴 했다. 가령 패전 직후의 역사적 분위기를 짙게 반영하여 당대의 현실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이번 작품에서는 유독 크게 강조되어 있는 편이라 반전 요소가 강한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해석을 통해 당시의 시대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을 선호한다면 괜찮게 볼 만하고. 트릭이나 괴이한 부분이 강조 되는 본격 미스터리를 원했다면 다소 호불호가 생길 만도 하다.
국가에 버림 받은 이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형성된 어둠이 끝내 폭발한 것이 이번 사건의 실체에 가깝다. 모두가 형편이 어려운 상황에서 불만을 표출하고 싶어도 어디에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높으신 분들에게 따져봐야 늘 기대를 배신 당하기에 각자도생이 우선시 되고 만다. 결국 돌고 돌아서 남는 건 황폐한 세상에서 최대한 살아남기 위한 생존 본능과 해소되지 않고 쌓여가는 불만이다. 이성적으로는 최대한 둘을 서로 분리해서 따로 보려고 하지만, 같이 놔두면 언젠가 폭발할지 모를 인화성 물질이나 다름 없다. 언젠가 터질지 모를 잠재된 불안 요소이기에 도화선만 준비되면 폭발은 시간 문제였던 셈이다.
처음부터 남을 챙길 여유 따위 전혀 없는 매정한 경우였다면 모를까, 붉은 미로 안의 인물 대부분은 인정 넘치는 모습이라 더 안타깝게 보인다. 아무리 각자의 사정이 있다고 하지만, 암시장의 형성 과정처럼 은밀한 어둠을 숨긴 채로 살아가고 있어서 그렇다. 이게 악의적으로 숨겼다기 보다는 일부러 이러지 않고서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아무런 구분이 없으면 그저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무언가 다르다고 인식이 생기면 꺼리는 존재로 인식된다. 그 어떤 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 돌며 거리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마치 붉은 옷처럼 말이다.
이건 반대쪽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히 무슨 일이 발생한 적은 없지만 자신들에 대한 꺼림직한 시선을 경험함으로서 붉은 옷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즉, 모두가 공통적으로 붉은 옷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서로 다른 존재를 지칭하던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붉은 옷이란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차별이 형상화된 존재라고 본다. 그렇기에 확고한 정체 없이 피해자만 존재하는 한편으로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식으로 상당히 뒤틀려 있다. 미지의 공포가 어느 한 곳을 향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잣대를 제시하며 사회를 뒤흔든다. 이건 작중 암시장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벌어지고는 일이다. 그러니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붉은 옷 같은 불길한 존재를 떠올리기 앞서 스스로가 붉은 옷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탄광, 등대, 암시장. 이제 모토로이 하야타가 향할 곳은 어디일까. 늘 범상치 않은 곳을 배경으로 하기에 기대가 크다. 역자 후기에 나온 정보를 보니 이미 정해진 배경이 있다고 하니 기다려 봐야겠다. 아니, 나오더라도 번역이 될지 부터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