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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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고집 센 나이 든 작가의 훈수 같은 이야기일까 싶었다. 그러나 읽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서늘하게 공명하는 부분이 많았다.
“요컨대 나는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내 불행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고, 나 또한 힘들다는 이유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내 고통이 너무 컸던 시기에 나는 그저 “나 지금 너무 힘들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결국 약해져 사라지는 감정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또 “답답한 일이 있거든 답답해하거라. 답답한 것과 맞서거라. 답답한 것을 답답한 줄 모르는 바보야말로 구제할 길 없는 바보가 아니겠는가.”라는 대목 역시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답답함을 느끼는 순간 그것을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단순한 충고가 아닌 삶을 대하는 태도처럼 다가왔다. 나 역시 누군가가 스스로의 답답함을 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더욱 갑갑함을 느끼곤 했기에, 이 문장은 유난히 깊게 와 닿았다.

자식에게 잘 익은 열매를 건네는 것보다, 그 열매를 가꾸는 과정을 함께 경험하게 해주라는 말도 마음에 남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일이 늘 쉽지만은 않다. 결과보다 과정을 존중하고, 아이가 스스로 해보는 기쁨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 속에서 나는 종종 조급해진다. 이 글은 다시 마음을 다잡게 하는 작은 멈춤의 순간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이 무게로 안 느끼게” 는 부모의 사랑이 아이에게 부담이 아니라 안식이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은 그 어떤 이론보다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잘 되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이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마음. 그것은 시대를 넘어 모든 부모가 가진 마음일 것이다.

오래된 글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박완서의 『사랑이 무게로 안 느끼게』는 마음이 답답한 사람에게는 숨을 고를 틈을,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담담한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마치 오래 알던 친구와 조용히 앉아 나누는 대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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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라 나비야 밤이랑 달이랑 10
노인경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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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색보다 절제된 검정과 노랑이 주를 이루는 이 그림책은, 오히려 가장 중요한 장면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다. 반짝이는 노랑빛은 여린 아이의 마음 같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순수함을 닮은 듯하다.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커다란 노랑 나비는 지쳐 있는 듯하다. 밤이와 달이는 나비를 위해 집을 만들어주고 지켜주려 하지만, 실수로 나비의 날개를 밟아버리고 만다. 망연자실한 아이들은 엉엉 울음을 터뜨리지만, 곧 스스로 해결하려 애쓴다. 바람을 불어 나비가 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그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자 주변의 모두가 함께 나서서 바람을 불어주고, 마침내 나비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예전에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많은 손과 마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책은 그 말을 아름답게 그림으로 풀어낸다. 아이들은 실수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려 노력했고, 부족한 부분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채워졌다. 낯선 이들까지 함께 힘을 보태며 하나의 따뜻한 장면을 완성해냈다.

요즘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이의 실수와 서툼을 탓하기보다 기다려주고, 작은 도움을 더한다면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은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시간을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다. 우리 또한 그런 시간을 거쳐 자라왔듯, 아이들의 시간을 존중하고 지켜봐야 한다.

만약 어른이 나서서 나비의 일을 대신 해결했다면, 아이들은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어른의 도리이며 마음가짐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세상을 배우고 부딪힐 수 있도록, 너그럽게 기다려주는 어른이 되자. 그리고 그들이 한 걸음씩 나아갈 때 따뜻한 버팀목이 되어주자.

노인경 작가의 그림책 시리즈 마지막 이야기, 『날아라 나비야』는 밤이와 달이의 여정을 따뜻하게 마무리하며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한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 이 책을 함께 읽으며 “괜찮아, 다시 날아오를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느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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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망명 공화국 - 제2회 위즈덤하우스 판타지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파란 이야기 23
노룡 지음, 카인비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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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완전히 다르더라도 함께 즐겁게 놀 수 있다. 그게 초등학생의 특권 같다. 미취학 아동은 아직 세상을 다 모르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규칙과 평가의 틀에 갇히지만, 초등학생 시절만큼은 나이만 비슷해도 금세 친구가 되어 신나게 놀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자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학원 일정에 맞춰 살아야 하고, 공부 수준에 따라 반이 나뉘는 현실 속에서 아이들은 좀비처럼 ‘해야 하는 일’만 반복하며 지낸다. 과연 이런 아이들이 행복할까?

『초딩 망명 공화국』은 이런 현실 속 아이들에게 상상의 도피처를 마련해 준다. 이서로, 장방랑, 은탁수, 소우주 — 서로 사는 환경과 형편은 다르지만 같은 학교를 다니는 네 아이가 중심이다. 이들은 동네의 ‘마수리마트’에서 기묘한 물건을 뽑으며 이상한 사건에 휘말린다. 세상의 전원을 꺼버리거나, 가족을 괴롭히는 늑대를 몰아내거나, 심지어 지긋지긋한 학원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일들이 벌어진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모든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신 ‘초딩만의 세상’, 즉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자신들만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아이들의 모습은 어른의 세계와 크게 다르다. 어른들은 돈이나 환경으로 사람을 나누지만, 아이들은 편견 없이 어울린다.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도 함께 웃고 싸우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더 건강하고 인간적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어쩌면 아이들의 세상이 더 어른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없다. 부모들은 자유를 주고 싶어도 위험한 세상 때문에 마음껏 놓아줄 수 없다. 그런 시대에 ‘초딩 망명 공화국’은 아이들이 잃어버린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학원과 숙제에 지친 아이들에게는 해방의 기쁨을,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이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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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고 생각하고 씁니다 - 워킹 에세이
정선원 지음 / 이은북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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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담은 책이라니, 읽기 전부터 마음이 끌렸다. 게다가 작가가 걸어온 길 중 절반 이상은 나도 걸어본 곳이라 더욱 정이 갔다.
도시를 여행하듯 걷는 것이 취미라, 여유가 될 때마다 계절에 맞는 길을 찾아 훌쩍 떠나곤 한다. 그래서 책 속 동네들의 풍경이 유난히 익숙하고 반가웠다.

작가는 그저 걸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늘 여정의 끝엔 가족이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사서 집으로 향한다. 여름에 걸을 땐 물을 준비해도 모자라 결국 여러 병을 사 마신다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났다. ‘얼린 물을 챙기셨으면 좀 덜 힘드셨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왠지 모르게 정겨운 미소가 지어졌다. 자주 나가 걷다 보면 가족의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동네의 맛있는 음식을 사 오는 사람이라면 그 눈총마저도 은근히 기다림이 되었을 것이다.

오래 걷다 보면 다리와 발목이 아파오지만, 통증을 이겨내고 계속 걷는 작가의 뚝심이 인상 깊다. 그는 ‘걷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진 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마음의 변화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걷는다는 건 몸을 움직이는 동시에 머리를 쉬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는 걷는 동안 에너지를 채우고, 삶의 소소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곧 단풍으로 물들 서울의 거리를 걸어보고 싶어졌다. 계절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떠나 커피 한 잔과 간식으로 짧은 가을을 만끽하며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싶다.
이 책은 문득 걷고 싶게 만드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하루를 선물하는 워킹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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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세계 문학 단편선
헤르만 헤세 외 지음, 유영미 외 옮김 / 다정한책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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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오 헨리 등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여름 언덕에서』는 읽는 내내 여름의 향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폭풍으로 모든 것을 잃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소년의 이야기, 느닷없이 사랑 고백 편지를 받게 된 기혼자의 당혹스러운 하루, 완벽한 도시를 떠나 남자의 고향 시골로 향하는 도시 그 자체인 신혼부부의 여정, 한여름의 꿈 같은 시간을 보내던 남매와 소년의 사연, 하숙집 청년의 돌이킬 수 없는 순간, 그리고 마지막의 유쾌한 단발 사건까지 단편 하나하나가 주옥같았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결코 무겁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흡입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내용이 어렵지 않아 고전 특유의 난해함 대신 편안한 몰입감을 주었다. 간혹 고전을 읽다 보면 문체나 사고방식이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이 책은 지금의 독자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올 만큼 번역이 매끄러워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여름의 폭풍과 열기 같은 강렬한 순간들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단발’에서는 웃음과 함께 여름을 훌훌 털어내듯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그래서인지 책을 덮을 때 마음이 후련했다.

여름이란 그런 계절이다. 폭풍처럼 몰아치다가도 눈부시게 찬란하고, 모든 것을 앗아가듯 사라지지만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뜨겁게 살아 있는 계절. 『여름 언덕에서』는 그런 여름의 모든 얼굴을 담아낸 단편선이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도 ‘여름’이라는 계절이 지닌 젊음과 생동감,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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