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신 이야기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오근영 옮김, 고바야시 기유우 사진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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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를 들면 성냥갑 라벨, 우유병 뚜껑, 책갈피, 전단, 화장지 등의 포장지같은 장기보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진, 이른바 쓰고 버리는 인쇄물 종류를 ‘프린티드 에페메라‘라고 한다. 에페메라는 ‘단명한‘, ‘쓰고 버리는‘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번역해보면 ‘하루살이 인쇄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인쇄용어다. 
... "소비자는 포장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벗겨내버리지요. 그런 점에 하루살이 인쇄물로서의 역할을 느낍니다." ... "화장지는 종이가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운명의 종점이라서, 즉 재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에페메라 컬렉터의 경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뒤처리를 맡아 종이로서의 마지막 생명을 다하는 화장지의 안타까움, 허무함은 이해가 된다. 포장지의 감촉 역시 얇고 팔랑팔랑한 재질이라 손에 쥐기도 허무하다. - P46

종이라는 게 어차피 시간이 지나고 빛을 쬐면 퇴색하게 마련. 변화하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완성품이 아니다. - P54

몇 년 전뷰터 일부 작업자들 사이에서 활판인쇄는 꽤 열띠게 회자되었다. 그러나 와타나베 씨는 그 흐름이나 붐을 잘 알지 못한다.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속 편한 이야기가 아니고 그에게 있어서 활판인쇄는 가족을 부양하는 생계수단인 것이다. 주문한 인쇄물을 납품할 때, "일이 익숙지 않아 번져버렸습니다" 같은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프로로서 완벽한 인쇄물을 납품하는 것이 최소한 해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마음으로 정신없이 활판인쇄 기술을 연구했다.
"무조건 많이 경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잉크 배합도 여름과 겨울이 달라서 직접 수백 번을 만들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지요." - P163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내가 직접 키운 닥나무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연구를 반복하는 거지요. 유유자적한 생활은 절대로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그랬다면 더 깊은 산속에서 살고 있겠지요."
모리타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겼다. 닥나무는 쑥쑥 자라기 때문에 베어내고 껍질 벗기고, 말리는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한가로운 일상일 수 없다. 자연을 상대로 하는 작업은 일 년 내내 바쁘다.
"쑥쑥 자라는 닥나무를 보면 마음이 급해져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요. 무럭무럭 자라는 닥나무에서 매일 힘을 얻고 있습니다." - P177

디지털을 눈엣가시로 여겨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디지털에는 흔적과 감촉이 없다. 만지고 느낄 수가 없다. 나는 종이에서 전해오는 감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다. 그 감정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흔들리고 변화한다. 그것을 숫자나 수요, 환경으로 분석하고 제품화하는 것이 분명 아오야나기 씨나 야마네 씨의 일일 것이다. 색깔이 있는 실을 넣어서 종이를 뜨는 ‘데마리‘처럼 개발에 5년씩 걸리는 종이도 있다. 장사니까 채산성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5년이 걸려도 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 종이의 품질, 디자인 수준, 풍부한 품목이 주목을 받고 그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케오에 가길 잘했다 싶은, 10년 전 방문 때와 똑같은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프로덕트를, 참을 수 없이 종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개발하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189

포장해서 선물하고
받은 사람이 내용물을 꺼내면 그 역할은 끝난다.
포장지는 잠깐 동안의 생명.
그러나 그 덧없는 한순간에
점포의 위신과 긍지, 시대의 향기와 고객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단지 맛있는 음식을 포장해왔을 뿐인 조역은
주역인 음식 없이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 P209

종이에는 감촉과 주름과 두께라는 물리적인 실감이 있다. 거기에 필적이나 잉크의 질감, 때로 눈물자국이라는 감상적인 느낌까지 포함하여 기억이나 시간의 퇴적이 시각화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각각의 종이에 퇴적된 마음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종이가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종잇조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정과 추억을 엿볼 수도 있다.
그것들을 ‘종이의 신‘이라고 부르고 싶어진 것은 순식간에 쓰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도구와 구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종이에 담은 생각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거겠지 하고.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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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 신 이야기
오다이라 가즈에 지음, 오근영 옮김, 고바야시 기유우 사진 / 책읽는수요일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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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나 활판인쇄에 끌리는 사람은 그릇이나 옷의 소재에 관심이 높고 나아가서는 생활양식에도 애착을 가진 사람과 교차가 되는구나 하고." - P18

이 밖에도 유노키 씨는 여행을 하면서 수집한 추억이 되는 종이류를 많이 갖고 있었다. 냅킨, 식탁매트, 커피설탕 봉투, 컵받침, 전단 등등. 이런 것들을 커다란 포켓파일에 한 장씩 넣어 두었다가 여행별로 파일을 만들어 보관한다.
"귀한 물건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전이었습니다. 좀 더 생활에 가까운, 이런 종이를 좋아해요. 생활도구란 그런 것일 테니까요."
여행지에서는 옛날 도구가게를 자주 들른다. 거기에 깃들어 있는 옛주인의 생활을 몸으로 느끼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 물건을 갖고 있던 사람을 상상하면 바로 그 사람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 P25

" ... 나는 여행에서 찍은 추억의 사진들을 뽑아서 일일이 앨범에 붙입니다. 거기서 비로소 여행이 끝나지요. 이런 건 이제 아무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 앨범이 자꾸 늘어나다 보니 최근에는 정리하는 데 애를 먹긴 합니다만."
그 말을 하는 표정은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아니라 괜히 웃음이 났다. 파리의 블랑제리 폴은 지금 신주쿠에도 진출해 있지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예술의 거리 상제르망 드 프레에서 갓 구운 빵을 샀던 그날 파리의 하루는 이 봉투에만 담겨 있다. - P26

종이라는 표현수단을 갖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똑같이 자유롭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미나의 사상이 배어든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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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디테일 -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한 끗 디테일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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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에게 노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20대는 돈이 없어서 좋은 물건을 살 수 없다. 하지만 갖고 싶다는 욕망을 가질 수는 있다. 이들이 30대가 되면 비싸더라도 오래 쓸 수 있는 물건들을 구매한다."
- 고스게 다쓰유키 - P197

긴 여행에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다. - P209

‘로프트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있다‘는 인식은 여행객인 저에게도 심어졌습니다. 일본을 여행할 때 로프트에 꼭 들르는 이유는 어떤 물건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색다른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경험의 습관화가 브랜드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졌죠. 애정으로까지 발전한 경험 습관화의 핵심은 결국 ‘제품‘입니다. 로프트의 제품을 보면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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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장미의 이름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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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이 원고를 남기지만, 누구를 위해서 남기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 P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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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장미의 이름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8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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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서책을 읽으시다니요? 한 서책의 내용을 알기 위해 다른서책까지 읽어야 하나요?」「그래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책들은 종종 다른 책들에 대해 말하지. 간혹 무해한 책은 위험한 책에서 꽃을 피우는 씨앗과 같거나 그 반대라고. 독초대궁이에 단 열매가 열리는 격이라고나 할까.」 - P51

「과연 그러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때까지 내가 안 바로,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든 하느님이든, 책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만 다루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서책이라는 것은 서책 자체의 내용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나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문득 장서관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장서관이란, 수 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인 셈이었다.
「사부님, 드러나 있는 서책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서책에 이를 수 있다면 어째서 굳이 서책을 숨기려 하는 것인지요?」「몇 세기가 지나면 숨기는 것도 쓸모없는 짓이 돼버리지. 하나 몇 해 또는 며칠의 기간 동안에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다. 우리를 봐라. 이렇게 헤매고 있지 않느냐?」「그렇다면 장서관이라고 하는 게, 진실을 퍼뜨리는 곳이 아니라 진실이 드러날 때를 늦추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밖에는 할 수 없구나…………」 - P52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 P104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 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두루 꿰고 있다고 믿었고, <묵시록>을 본으로 삼아 호르헤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단일한 범인을 추적하다가 호르헤에게 이른 것뿐이다. ... 내 지혜라는 것은 어디로 갔느냐? 나는가상의 질서만 좇으며 죽자고 그것만 고집했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다.」...「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 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깐 말이다.」 - P376

「유용한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언젠가는 버려야 할 연장과 같은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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