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러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는 적지 않게 놀랐다. 그때까지 내가 안 바로,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든 하느님이든, 책 바깥에 놓여 있는 것들만 다루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사부님 말씀에 따르면, 서책이라는 것은 서책 자체의 내용도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책끼리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을 나는 사부님 말씀을 듣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고 보니 문득 장서관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장서관이란, 수 세기에 걸쳐 서책끼리의 음울한 속삭임이 계속되는 곳,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는 정복되지 않는, 살아 있는 막강한 권력자, 만든 자, 옮겨 쓴 자가 죽어도 고스란히 살아남을 무한한 비밀의 보고인 셈이었다.
「사부님, 드러나 있는 서책을 통해 드러나지 않은 서책에 이를 수 있다면 어째서 굳이 서책을 숨기려 하는 것인지요?」「몇 세기가 지나면 숨기는 것도 쓸모없는 짓이 돼버리지. 하나 몇 해 또는 며칠의 기간 동안에는 어느 정도 쓸모가 있다. 우리를 봐라. 이렇게 헤매고 있지 않느냐?」「그렇다면 장서관이라고 하는 게, 진실을 퍼뜨리는 곳이 아니라 진실이 드러날 때를 늦추는 곳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밖에는 할 수 없구나…………」 - P52
「나는 기호의 진실을 의심한 적 없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나아갈 길을 일러 주는 것은 기호밖에 없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기호와 기호와의 관계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두루 꿰고 있다고 믿었고, <묵시록>을 본으로 삼아 호르헤에게 도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나는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단일한 범인을 추적하다가 호르헤에게 이른 것뿐이다. ... 내 지혜라는 것은 어디로 갔느냐? 나는가상의 질서만 좇으며 죽자고 그것만 고집했다.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나…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다.」...「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 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깐 말이다.」 - P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