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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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멸종은 자연사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한 생명이 사라져야 새로운 생명이 등장할 수 있다. 현생인류조차도 이러한 과정을 밟아와서 지금에 이르렀다. 이 책의 제목인 “찬란한 멸종”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은 멸종의 시각에서 지구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인류가 멸망한 미래부터 시작해 구석기인과 네안데르탈인의 멸종 6번의 대멸종을 거슬러 올라 진화의 과정을 거쳐 45억년 전 태초에 존재했던 생명의 시작까지. 미래에서 시작해 과거로 가다 보면 이렇게 길고 긴 과정을 거쳐 현대에 이른 인류 문명이 대단하게 여겨진다. 인간 중심적인 서술 방식과 달리 인공지능이나 범고래, 산호, 공룡 등 다른 생명체의 관점에서 보는 지구의 역사는 신선하다.


 지구의 역사를 24시간으로 볼 때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은 5초 전이라고 한다. 수십억년간의 진화와 대멸종의 과정을 거쳐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야말로 수차례의 찬란한 멸종의 과정을 거쳐 인간의 시간이 도래했고, 인간 문명은 짧은 시간 안에 번성하며 그 시간을 누리고 있다.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인 만큼, 인간도 언젠가는 멸종할 것이다. 다만 모두가 그게 근시일 내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뿐. 사실 멸종이라는 단어는 공룡의 멸종과 같이 아주 옛날의 일이거나, 아득한 먼 미래의 일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만큼 파괴적인 단어라서 당장 현실로 닥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최근의 기후변화는 인간의 멸종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피부에 와 닿게 한다. 책이나 TV로만 보던 불타는 아마존이나 작은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북극곰을 볼 때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이 매일같이 울리는 폭염 경보와 호우 경보 앞에서는 예리하게 느껴진다. 그간 있었던 멸종과 지금의 차이점은 이번의 멸종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점이다.


 인류의 멸망이 지구의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없는 지구에는 또 다른 생명체가 등장해서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지구와 공존할 것이다. 그 시간이 자연스럽게 도래할 때까지 인간도 충분히 공존의 시간을 즐긴 뒤에 찬란한 멸종을 맞이할지, 아니면 마지막을 앞당겨서 스스로 파멸할 것인지는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간은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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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짜르트가 살아 있다면 Endless 1
김미진 지음 / &(앤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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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1995년에 출간된 작품인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각자의 사정으로 머나먼 미국에 만나게 된 청춘들이 펼치는 예술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청춘들이라면 공감할법한 내용이라 더더욱 그렇다. 특히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듯 등장인물간의 이야기가 서로 연결되어 점차 확장되는 서술이 신선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소재는 바로 돈가방. 누군가 고액권 지폐가 가득한 돈가방을 들고 와서 내게 떠나자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결국은 돈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같은 내용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 질문에 대해 각자의 답변을 제시한다.


 유학생인 쌍, 윤, 지후, 류, 지니나 입양아인 글라스, 이민자인 쿠키 등 등장인물 대다수는 한국인이다. 미국에 살고 있거나, 미국 국적자라 해도 이들 모두는 어느 정도 이방인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등장인물 하나 하나에 마음이 가고, 이들간의 관계도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특히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지후와 글라스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는데, 빨간색을 보지 못하듯이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되었던 지후와 자신의 상처를 꽁꽁 싸맨 글라스의 관계가 결국 파국에 이른 것이 안타까웠다. 글라스에 대한 사랑이 비참하게 끝나면서 예술에 대한 열정도 사라져 지후가 현실에 안주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마지막에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후가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알게 되고, 예술에 있어서도 새로운 활력을 찾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불법체류자인 윤도 돈가방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고, 실제로 꽤 큰 돈을 벌 기회가 찾아온다. 본인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감지덕지할 일이지만 윤은 외려 돈가방이란 화두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예술혼을 불태우게 된다. 비록 그 결정으로 쿠키가 떠나지만 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리고 돈가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지니와 류. 돈가방에 얽힌 미스터리가 본격적으로 풀려나가기 시작한다. 마약과 범죄조직이 얽혀 그간의 스토리 진행과 달리 스케일이 엄청나게 커지지만 현실성 있는 일이라 생뚱맞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조직에 쫓기는 와중에도 동료와의 약속을 지키려는 류와 그런 류를 저버리지 않는 지니의 모습이 돈보다 중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의 단초를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이 왜 ‘모짜르트가 살아있다면’ 일지 궁금했는데, 작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모짜르트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기타를 치면서 록 밴드에서 활동했을거라나. 클래식 음악도 당시에는 현대 음악이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읽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다. 모짜르트가 살아있다면, 그는 돈가방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돈 앞에서 사랑, 예술, 인간을 선택한 우리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선택을 했을까, 다른 선택을 했을까. 이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 책의 재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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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시대 - 기록, 살인, 그리고 포르투갈 제국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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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발견시대라고도 불리는 대항해시대는 15~17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시작으로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와 인도, 중국 항로를 개척하던 시기를 말한다. 이를 계기로 동서양이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유럽의 식민지 건설과 제국주의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라는 말 자체가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나온 단어다. 이전에도 동서양간의 교류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중동과 동남아, 동아시아간의 물자 교역과 사람의 이동은 활발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라고 하면 보통은 유럽이 일방적으로 동양을 발견했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 그 당시 동서양간의 만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물의 시대는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연 포르투갈과 두 남자에 초점을 두고 이 시기를 파헤친다.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다미앙과 대항해시대에 걸맞게 인도와 동남아, 동아시아를 다녀온 남자 카몽이스. 저자는 이 두 사람의 경험이 교차로 서술하면서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신항로 개척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넘어 아시아까지 하나로 연결했고, 다양한 물자와 정보가 유럽으로 몰리게 되었다. 정작 아시아 내에서는 이미 교역이 활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도달한 포르투갈인들은 당혹감을 느꼈지만 곧 그들만의 교활한 방식으로 아시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설명 중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그들이 이교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기독교적 방식으로 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던 포르투갈인들이 동서양의 사상간 균열을 발견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거나. 각각의 방식을 상징하는 인물이 다미앙과 카몽이스이다.


 다미앙은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종교적 광풍이 불어오던 시기,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데도 그는 아프리카, 북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들어오는 신문물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종교법정과 미스터리한 죽음이었다.


 반면 카몽이스는 직접 아프리카 너머의 세상에 가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지만 결국에는 유럽 중심적 사고를 버리지 못했다. 그의 행적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아 카몽이스가 아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의 그의 작품에는 유럽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진하게 묻어난다.


 다미앙은 잊혀지고 카몽이스는 지금까지도 포르투갈의 유명 시인으로 그 이름이 내려오는 것과 같이 승리자는 카몽이스였다. 이미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발흥 등 내부적으로도 어지러웠던 유럽은 근본적으로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결국 동서양은 경제적으로는 단단히 결합하면서도 사상적으로는 대립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세계화라는 단어가 식상해진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마치 다미앙이 일했던 톰부 탑의 기록보관소와 같이 양식이 맞지 않는 제각각의 서류처럼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미앙의 유산이 몽테뉴에게로, 라무시오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고, 현대사에도 흔적을 남긴 것처럼 서로에 대한 몰이해도 극복할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서류 한 장 한 장을 한 권의 책으로 묶고, 그 책을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을 때 진정한 대항해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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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단장해드립니다, 챠밍 미용실
사마란 지음 / 고블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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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어떤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는 판타지인데, 흔한 힐링 판타지가 아니라 다크 판타지에 가깝다. 으스스한 호러소설의 요소도 있다. 그런데 이런 다크 판타지나 호러적 요소는 현실에 맞닿아 있다. 갓난아기를 학대하고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비정한 엄마, 이웃 아무도 모르게 고독사한 할머니,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부모에게 방치된 아이, 유기된 강아지 등등. 현실에서 너무나 익숙해서 이젠 들어도 놀랍지도 않고 그저 쯧쯧 혀만 차게 되는 일들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들이 드라마틱하게 해결되지 않듯이, 이 책에서도 챠밍이나 도깨비가 적극적인 해결사 역할을 하진 않는다. 챠밍이 지닌 능력 내에서 해결을 하긴 하는데 뭔가 히어로 무비를 보듯 속이 시원하진 않다. 오히려 그래서 판타지임에도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그와중에 사건이 해결되니 힐링도 된다. 실제 세상에서도 산적한 문제들이 이 정도 수준에서만 해결되어도 좋겠다 싶은, 아주 현실적이고 과하지 않은 수준의 힐링이라 더욱 좋았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현월동과 현월동 주민들 또한 어딘가 본듯한 장소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원미동 사람들을 다크 판타지로 쓰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너스 호프, 지물포 주인은 그야말로 소시민의 전형이고, 도깨비마저도 가끔은 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챠밍 또한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존재임에도 속물적인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판은 악덕 고용주 그 자체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신들의 모습이 웃음 포인트이다.


 이 책에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의명도 빼놓을 수 없다. 처음에는 요리가 가능한 자기 부엌을 가졌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는 의명을 보며 한국의 2030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다가도, 101호 할아버지 때문에 의명이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리는 모습을 보다 보면 안타까움과 함께 섬뜩함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다 자신의 영매 능력을 깨닫고 혼을 거두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보면 마치 내 친구인냥 뿌듯하기도 하다. 이 작품 내에서 아마 의명이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캐릭터가 아닐까.

 

 일상 판타지인 줄 알았던 이 책은 챠밍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왜 하필 미용실일까 궁금해 했는데 챠밍의 과거에 힌트가 있다. 챠밍이라는 이름 자체도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도깨비와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도깨비가 어떻게 성숙해져 가는지도 차근차근 설명된다. 


 챠밍을 인간도 신도 아닌 불사의 존재로 살게 만든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챠밍은 제 손으로 이 사건을 끝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동시에 펠리치따 오피스텔에는 또 다른 세입자가 이사온다. 새로운 사건, 인물과 함께 이 책은 마무리된다. 시리즈의 첫 권에 알맞게 매력적인 인물들과 배경, 설정들이 등장해서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가 된다. 과연 챠밍은 복수의 굴레를 끊고 평안을 찾을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보여줄 도깨비, 의명과의 케미도 궁금하다. 비로소 3인방이 된 그들의 활약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순영 아주머니도 나도, 복수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몰라서 저지른 일로 너무 오래 대가를 치르고 있잖아요. 그 오랜 시간 후회했던 일 중 단 하나라도 제자리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네요. 너무 많이 늦었지만..."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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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들 - 기묘하고 아름다운 명화 속 이야기
이원율 지음 / 빅피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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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그 자체로도 의미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의도나 화가의 이력, 아니면 모델과 화가의 관계 등 그림 뒤에 펼쳐진 세상은 그 자체로도 무궁무진하다.


 '무서운 그림들'도 그림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나 위압감 보다는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한다. 순백색의 옷을 아름답게 차려 입은 소녀의 그림에서는 처연함은 느껴질지언정 무섭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백색이 납으로 만들어진 물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 자체가 위험물질로 보이기도 하고, 소녀가 더 창백해 보이기도 한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다니면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화가의 그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절망감과 두려움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19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익숙한 화가와 낯익은 그림도 있지만, 처음 듣는 화가와 그림도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이미 알고 있던 화가와 작품에서도 내가 잘 알지 못했던 화가의 이력이나 작품 속에서 내가 놓쳤던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고, 새로운 화가와 작품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의 미술관이 넓어지는 경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깊었던 작품 3점을 소개하자면, 먼저 엘리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이다. 처음 보자마자 19세기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그림 속에 돌무더기로 그려진 문명의 몰락,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 널부러진 기둥과 돌무더기, 흠집이 가득한 얼굴만 남은 스핑크스. 답변이 들릴 리 없건만, 스핑크스의 입술에 귀를 대고 있는 남자는 수천 년간 인류를 지켜본 스핑크스의 지혜라도 빌리고 싶은지 절박하게 스핑크스에게 뭔가 묻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전쟁, 그것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국가가 파탄난 상황을 비유적으로 담아내었다. 이 그림이 지금도 울림을 주는 것은 각종 갈등과 분열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과연 인류 문명이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의 질문자>, 엘리후 베더


 부끄럽게도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신곡의 구성이나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 방대한 양에 질려서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시도를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신곡의 삽화라니, 삽화가 있으면 좀 더 신곡을 읽기 편할까, 신곡의 내용을 어떻게 그림에 담아냈을까, 궁금증이 앞섰다. 


 이 책에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신곡의 삽화 여러 점이 실려있는데, 그 중에 내 눈을 가장 잡아끌었던 것은 <천국>이었다. 삽화다 보니 무채색에 투박한 그림이겠거니 했는데, 이 그림은 보자마자 신성하다는 인상과 함께 화려함, 장엄함까지도 느껴진다. 하단 중앙에 있는 두 사람처럼 삽화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무채색이 주는 명암의 확실한 대비가 오히려 이 작품의 멋을 확실하게 살린다. 이 그림을 보고 나니 신곡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 더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천국(신곡 삽화 중 일부)>, 귀스타브 도레


 흰 꽃병에 한아름 꽂힌 풍성한 꽃이 화사하다. 알록달록한 꽃들을 보고 있자니 코 끝에 꽃향기가 스치는 듯도 하고, 요즘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오딜롱 르동의 다른 작품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그리스 신화를 담은 <키클롭스>는 그렇다 쳐도, <물의 수호신>이나 <영원을 향해 움직이는 풍선 같은 눈>과 같은 작품은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무섭고 섬뜩하다. 이 책의 설명처럼 이 그림들에는 오딜롱 르동의 불우했던 시절과 그 때의 상처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그린 아름다운 꽃 그림은 의미가 남다르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된 그가 말년에나마 행복했길 바라는 마음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흰 꽃병과 꽃>, 오딜롱 르동


 그림 속에 담긴 인간의 감정은 지금이나 과거나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그려진 그림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울림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 얽힌 이야기까지 알아야 한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이 그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도 다룬 모나리자와 같이, 어쩌면 명화는 잘 그려진 그림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림과 그 그림의 사연이 엮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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