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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들 - 기묘하고 아름다운 명화 속 이야기
이원율 지음 / 빅피시 / 2024년 7월
평점 :
그림은 그 자체로도 의미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의도나 화가의 이력, 아니면 모델과 화가의 관계 등 그림 뒤에 펼쳐진 세상은 그 자체로도 무궁무진하다.
'무서운 그림들'도 그림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나 위압감 보다는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한다. 순백색의 옷을 아름답게 차려 입은 소녀의 그림에서는 처연함은 느껴질지언정 무섭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백색이 납으로 만들어진 물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 자체가 위험물질로 보이기도 하고, 소녀가 더 창백해 보이기도 한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다니면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화가의 그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절망감과 두려움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19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익숙한 화가와 낯익은 그림도 있지만, 처음 듣는 화가와 그림도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이미 알고 있던 화가와 작품에서도 내가 잘 알지 못했던 화가의 이력이나 작품 속에서 내가 놓쳤던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고, 새로운 화가와 작품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의 미술관이 넓어지는 경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깊었던 작품 3점을 소개하자면, 먼저 엘리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이다. 처음 보자마자 19세기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그림 속에 돌무더기로 그려진 문명의 몰락,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 널부러진 기둥과 돌무더기, 흠집이 가득한 얼굴만 남은 스핑크스. 답변이 들릴 리 없건만, 스핑크스의 입술에 귀를 대고 있는 남자는 수천 년간 인류를 지켜본 스핑크스의 지혜라도 빌리고 싶은지 절박하게 스핑크스에게 뭔가 묻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전쟁, 그것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국가가 파탄난 상황을 비유적으로 담아내었다. 이 그림이 지금도 울림을 주는 것은 각종 갈등과 분열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과연 인류 문명이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의 질문자>, 엘리후 베더
부끄럽게도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신곡의 구성이나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 방대한 양에 질려서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시도를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신곡의 삽화라니, 삽화가 있으면 좀 더 신곡을 읽기 편할까, 신곡의 내용을 어떻게 그림에 담아냈을까, 궁금증이 앞섰다.
이 책에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신곡의 삽화 여러 점이 실려있는데, 그 중에 내 눈을 가장 잡아끌었던 것은 <천국>이었다. 삽화다 보니 무채색에 투박한 그림이겠거니 했는데, 이 그림은 보자마자 신성하다는 인상과 함께 화려함, 장엄함까지도 느껴진다. 하단 중앙에 있는 두 사람처럼 삽화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무채색이 주는 명암의 확실한 대비가 오히려 이 작품의 멋을 확실하게 살린다. 이 그림을 보고 나니 신곡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 더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천국(신곡 삽화 중 일부)>, 귀스타브 도레
흰 꽃병에 한아름 꽂힌 풍성한 꽃이 화사하다. 알록달록한 꽃들을 보고 있자니 코 끝에 꽃향기가 스치는 듯도 하고, 요즘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오딜롱 르동의 다른 작품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그리스 신화를 담은 <키클롭스>는 그렇다 쳐도, <물의 수호신>이나 <영원을 향해 움직이는 풍선 같은 눈>과 같은 작품은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무섭고 섬뜩하다. 이 책의 설명처럼 이 그림들에는 오딜롱 르동의 불우했던 시절과 그 때의 상처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그린 아름다운 꽃 그림은 의미가 남다르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된 그가 말년에나마 행복했길 바라는 마음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흰 꽃병과 꽃>, 오딜롱 르동
그림 속에 담긴 인간의 감정은 지금이나 과거나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그려진 그림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울림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 얽힌 이야기까지 알아야 한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이 그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도 다룬 모나리자와 같이, 어쩌면 명화는 잘 그려진 그림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림과 그 그림의 사연이 엮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