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시대 - 기록, 살인, 그리고 포르투갈 제국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 까치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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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발견시대라고도 불리는 대항해시대는 15~17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시작으로 영국,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와 인도, 중국 항로를 개척하던 시기를 말한다. 이를 계기로 동서양이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유럽의 식민지 건설과 제국주의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대항해시대라는 말 자체가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나온 단어다. 이전에도 동서양간의 교류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미 중동과 동남아, 동아시아간의 물자 교역과 사람의 이동은 활발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라고 하면 보통은 유럽이 일방적으로 동양을 발견했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 그 당시 동서양간의 만남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물의 시대는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연 포르투갈과 두 남자에 초점을 두고 이 시기를 파헤친다.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다미앙과 대항해시대에 걸맞게 인도와 동남아, 동아시아를 다녀온 남자 카몽이스. 저자는 이 두 사람의 경험이 교차로 서술하면서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신항로 개척은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프리카 넘어 아시아까지 하나로 연결했고, 다양한 물자와 정보가 유럽으로 몰리게 되었다. 정작 아시아 내에서는 이미 교역이 활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시아에 도달한 포르투갈인들은 당혹감을 느꼈지만 곧 그들만의 교활한 방식으로 아시아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저자의 설명 중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그들이 이교도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기독교적 방식으로 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던 포르투갈인들이 동서양의 사상간 균열을 발견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방식은 두 가지였다.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거나. 각각의 방식을 상징하는 인물이 다미앙과 카몽이스이다.


 다미앙은 현재의 관점에서 봐도 코스모폴리탄적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종교적 광풍이 불어오던 시기,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는데도 그는 아프리카, 북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들어오는 신문물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종교법정과 미스터리한 죽음이었다.


 반면 카몽이스는 직접 아프리카 너머의 세상에 가서 새로운 세계를 보았지만 결국에는 유럽 중심적 사고를 버리지 못했다. 그의 행적이 자세하게 남아 있지 않아 카몽이스가 아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의 그의 작품에는 유럽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진하게 묻어난다.


 다미앙은 잊혀지고 카몽이스는 지금까지도 포르투갈의 유명 시인으로 그 이름이 내려오는 것과 같이 승리자는 카몽이스였다. 이미 당시 프로테스탄트의 발흥 등 내부적으로도 어지러웠던 유럽은 근본적으로 유럽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지도 없었고, 결국 동서양은 경제적으로는 단단히 결합하면서도 사상적으로는 대립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세계화라는 단어가 식상해진 지금까지도 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마치 다미앙이 일했던 톰부 탑의 기록보관소와 같이 양식이 맞지 않는 제각각의 서류처럼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다미앙의 유산이 몽테뉴에게로, 라무시오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고, 현대사에도 흔적을 남긴 것처럼 서로에 대한 몰이해도 극복할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서류 한 장 한 장을 한 권의 책으로 묶고, 그 책을 우리 모두가 함께 읽을 수 있을 때 진정한 대항해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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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단장해드립니다, 챠밍 미용실
사마란 지음 / 고블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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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어떤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는 판타지인데, 흔한 힐링 판타지가 아니라 다크 판타지에 가깝다. 으스스한 호러소설의 요소도 있다. 그런데 이런 다크 판타지나 호러적 요소는 현실에 맞닿아 있다. 갓난아기를 학대하고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비정한 엄마, 이웃 아무도 모르게 고독사한 할머니,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부모에게 방치된 아이, 유기된 강아지 등등. 현실에서 너무나 익숙해서 이젠 들어도 놀랍지도 않고 그저 쯧쯧 혀만 차게 되는 일들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들이 드라마틱하게 해결되지 않듯이, 이 책에서도 챠밍이나 도깨비가 적극적인 해결사 역할을 하진 않는다. 챠밍이 지닌 능력 내에서 해결을 하긴 하는데 뭔가 히어로 무비를 보듯 속이 시원하진 않다. 오히려 그래서 판타지임에도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느낌이다. 그와중에 사건이 해결되니 힐링도 된다. 실제 세상에서도 산적한 문제들이 이 정도 수준에서만 해결되어도 좋겠다 싶은, 아주 현실적이고 과하지 않은 수준의 힐링이라 더욱 좋았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현월동과 현월동 주민들 또한 어딘가 본듯한 장소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는 내내 원미동 사람들을 다크 판타지로 쓰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너스 호프, 지물포 주인은 그야말로 소시민의 전형이고, 도깨비마저도 가끔은 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챠밍 또한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존재임에도 속물적인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판은 악덕 고용주 그 자체이다. 인간보다 더 인간같은 신들의 모습이 웃음 포인트이다.


 이 책에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캐릭터인 의명도 빼놓을 수 없다. 처음에는 요리가 가능한 자기 부엌을 가졌다는 사실에 행복해 하는 의명을 보며 한국의 2030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다가도, 101호 할아버지 때문에 의명이 정신적으로 핀치에 몰리는 모습을 보다 보면 안타까움과 함께 섬뜩함까지 느끼게 된다. 그러다 자신의 영매 능력을 깨닫고 혼을 거두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걸 보면 마치 내 친구인냥 뿌듯하기도 하다. 이 작품 내에서 아마 의명이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캐릭터가 아닐까.

 

 일상 판타지인 줄 알았던 이 책은 챠밍의 과거가 드러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왜 하필 미용실일까 궁금해 했는데 챠밍의 과거에 힌트가 있다. 챠밍이라는 이름 자체도 우연히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도깨비와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도깨비가 어떻게 성숙해져 가는지도 차근차근 설명된다. 


 챠밍을 인간도 신도 아닌 불사의 존재로 살게 만든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챠밍은 제 손으로 이 사건을 끝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동시에 펠리치따 오피스텔에는 또 다른 세입자가 이사온다. 새로운 사건, 인물과 함께 이 책은 마무리된다. 시리즈의 첫 권에 알맞게 매력적인 인물들과 배경, 설정들이 등장해서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가 된다. 과연 챠밍은 복수의 굴레를 끊고 평안을 찾을 수 있을지, 그 과정에서 보여줄 도깨비, 의명과의 케미도 궁금하다. 비로소 3인방이 된 그들의 활약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순영 아주머니도 나도, 복수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몰라서 저지른 일로 너무 오래 대가를 치르고 있잖아요. 그 오랜 시간 후회했던 일 중 단 하나라도 제자리로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네요. 너무 많이 늦었지만..." -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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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들 - 기묘하고 아름다운 명화 속 이야기
이원율 지음 / 빅피시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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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그 자체로도 의미와 이야기를 품고 있지만, 그림 뒤에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었을 때 비로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다.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의도나 화가의 이력, 아니면 모델과 화가의 관계 등 그림 뒤에 펼쳐진 세상은 그 자체로도 무궁무진하다.


 '무서운 그림들'도 그림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나 위압감 보다는 그림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좀 더 집중한다. 순백색의 옷을 아름답게 차려 입은 소녀의 그림에서는 처연함은 느껴질지언정 무섭다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백색이 납으로 만들어진 물감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 자체가 위험물질로 보이기도 하고, 소녀가 더 창백해 보이기도 한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다니면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던 화가의 그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절망감과 두려움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19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익숙한 화가와 낯익은 그림도 있지만, 처음 듣는 화가와 그림도 있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이미 알고 있던 화가와 작품에서도 내가 잘 알지 못했던 화가의 이력이나 작품 속에서 내가 놓쳤던 포인트를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고, 새로운 화가와 작품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의 미술관이 넓어지는 경험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상깊었던 작품 3점을 소개하자면, 먼저 엘리후 베더의 '스핑크스의 질문자'이다. 처음 보자마자 19세기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그림 속에 돌무더기로 그려진 문명의 몰락,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 널부러진 기둥과 돌무더기, 흠집이 가득한 얼굴만 남은 스핑크스. 답변이 들릴 리 없건만, 스핑크스의 입술에 귀를 대고 있는 남자는 수천 년간 인류를 지켜본 스핑크스의 지혜라도 빌리고 싶은지 절박하게 스핑크스에게 뭔가 묻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전쟁, 그것도 동족간의 전쟁으로 국가가 파탄난 상황을 비유적으로 담아내었다. 이 그림이 지금도 울림을 주는 것은 각종 갈등과 분열이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과연 인류 문명이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스핑크스의 질문자>, 엘리후 베더


 부끄럽게도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신곡의 구성이나 대강의 내용은 알고 있지만, 그 방대한 양에 질려서 언젠가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고 시도를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신곡의 삽화라니, 삽화가 있으면 좀 더 신곡을 읽기 편할까, 신곡의 내용을 어떻게 그림에 담아냈을까, 궁금증이 앞섰다. 


 이 책에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신곡의 삽화 여러 점이 실려있는데, 그 중에 내 눈을 가장 잡아끌었던 것은 <천국>이었다. 삽화다 보니 무채색에 투박한 그림이겠거니 했는데, 이 그림은 보자마자 신성하다는 인상과 함께 화려함, 장엄함까지도 느껴진다. 하단 중앙에 있는 두 사람처럼 삽화를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무채색이 주는 명암의 확실한 대비가 오히려 이 작품의 멋을 확실하게 살린다. 이 그림을 보고 나니 신곡이 얼마나 훌륭한 작품인지 더더욱 마음에 와닿는다.

<천국(신곡 삽화 중 일부)>, 귀스타브 도레


 흰 꽃병에 한아름 꽂힌 풍성한 꽃이 화사하다. 알록달록한 꽃들을 보고 있자니 코 끝에 꽃향기가 스치는 듯도 하고, 요즘같은 우중충한 날씨에 기분도 좋아진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린 오딜롱 르동의 다른 작품들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그리스 신화를 담은 <키클롭스>는 그렇다 쳐도, <물의 수호신>이나 <영원을 향해 움직이는 풍선 같은 눈>과 같은 작품은 이 책의 제목에 걸맞게 무섭고 섬뜩하다. 이 책의 설명처럼 이 그림들에는 오딜롱 르동의 불우했던 시절과 그 때의 상처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가 그린 아름다운 꽃 그림은 의미가 남다르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충만한 삶을 누리게 된 그가 말년에나마 행복했길 바라는 마음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흰 꽃병과 꽃>, 오딜롱 르동


 그림 속에 담긴 인간의 감정은 지금이나 과거나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 그려진 그림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울림을 제대로 느끼려면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 얽힌 이야기까지 알아야 한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들이 그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도 다룬 모나리자와 같이, 어쩌면 명화는 잘 그려진 그림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림과 그 그림의 사연이 엮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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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때가 오면 - 존엄사에 대한 스물세 번의 대화
다이앤 렘 지음, 황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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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기억하는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였다. 자취를 하며 취업 준비에 한창이던 어느 날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는 사실을 들었다. 수술을 했음에도 예후가 좋지 않았고, 결국 6개월 남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결론적으로 할머니는 6개월 보다는 더 사셨다. 마약성 진통제로도 완화되지 않는 고통을 삼키면서도 버티셨다. 사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가족들이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큰고모는 그래도 이제 안 아프시니 다행이다, 라고 읊조렸고 모두들 동감했다.


 이후 우리 가족들은 불필요한 연명치료는 받지 않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가족 중에 불치병에 걸리거나 하는 상황은 닥치지 않아서 정작 그 상황에서도 같은 결정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각자의 마음 한 켠 다짐처럼 새기고 있다. 그러던 중 존엄사에 대해 다룬 책을 접하게 되었다.


 '나의 때가 오면'은 저자가 각계각층의 사람과 나눈, 존엄사에 대한 대화를 묶은 책이다. 가족을 존엄사로 떠나 보낸 사람, 존엄사 지지자, 종교계, 의사, 국회의원, 불치병을 투병 중인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존엄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저자는 존엄사를 지지하지만, 존엄사를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도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있다. 


 현재의 나는 존엄사를 찬성하지만, 존엄사를 반대하는 사람의 주장에도 일부 공감한다. 경제적 이유로 인해 존엄사를 '강요'당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놀랐던 점은 인종에 따라 존엄사가 차별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종교인은 아니지만 종교계가 존엄사에 대해 지닌 시각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존엄사를 합법화했다고 해서 존엄사 사례가 급격하게 증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존엄사 절차가 까다롭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처럼 많은 사람들이 존엄사를 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신기했다. 심지어는 이 책에 나오는 몇몇 사례처럼 존엄사를 위한 약을 받아두고도 실제로 그 약을 쓰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인터뷰에 참여한 사람 중 한 사람도 언급하듯이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 아닌 희망으로 마지막을 위한 약을 처방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사용 여부와 무관하게 내가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약간의 위안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들 스스로 자신의 마지막에 대한 존엄을 지켰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나의 때가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모두들 평화로운 죽음을 원하지만, 정작 그런 죽음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쓸모없고 짐스러운 돌봄의 컨베이어 벨트에 우리를 묶어 놓고 우리에게서 삶의 질을 강탈하는' 경험은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존엄사에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개인이 생각하는 존엄이 모두 다른 만큼, 존엄사 또한 개인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 


 이 책은 죽음이라는 터부시 되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의미를 지니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죽음에 대해 이 정도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불길한 이야기를 하냐고 손사래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의 때가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음이 있어 생이 더 빛나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삶의 중요한 일부가 너무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어요. 그런 주제는 금기였고, 우리에게는 죽음과 죽어감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죠. 죽음은 감춰져서 눈에 보이지 않아요. 이제는 보통 병원이나 시설에서, 닫힌 문 뒤에서 일어나죠.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과 서로 교류하지 않아요. 그래서 더 낯설죠.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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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일기 : 영원한 여름편 - 일상을 관찰하며 단단한 삶을 꾸려가는 법 소로의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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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855년부터 1857년까지 소로가 쓴 일기 일부를 수록하고 있다. 1855년은 '일기에 날씨를 적는 건 중요한 일', 1856년은 '자연에서 만나는 진보와 보수의 공존', 1857년은 '단순하게 살고 번거로움을 피하자'라는 부제가 있다.


 사실 일기이다 보니 극적이거나 자극적인 내용은 없지만 오히려 그 평온함과 잔잔함에서 오는 안정감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의 한 조각을 엿보면서 현대의 우리는 얼마나 번잡하게 살고 있나 돌아보게 된다. 어릴 때 한 평생 도시에서 사시다 귀농한 이모 댁에 놀러 갔는데,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시골에 와서 받았던 충격이 생각난다. 이렇게 예쁜 새소리가 있었다니, 밤이 이렇게 어두울 수 있다니. 소로의 일기를 읽고 있자니 그 당시 생각이 떠오르면서 그 추억에 대한 그리움도 커졌다. 현대 문명을 만끽하는 입장에서 보면 분명 불편한 삶인데도 소로처럼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한 달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치여 조금씩 바스라지고 있어 소로의 말처럼 "단순하게 살고 번거로움을 피하는 것이 단단해지는 비결"이 필요한 시점이라서 그런가 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꾸준하게 일기를 쓰는 소로의 성실함도 놀라웠다. 매일매일은 아니어도, 가끔씩 긴 공백기가 있긴 해도 완전히 기록을 놓지 않고 몇 년 간 이어온 점이 정말 부럽기까지 하다. 사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하루 살다 보면 뭘 기록해야 할지도 알 수 없는 때가 많다. 아니면 매일 비슷한 내용을 쓰거나. 한동안 맨날 일기에 회사 욕을 썼더니 그 시기의 일기는 다시 펼쳐보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다 보니 일기를 점점 안 쓰기 시작해 요즘은 아예 손 놓은 지가 몇 개월이다. 


 이런 때 소로의 일기와 같이 날씨 이야기로 일기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날씨의 특징이 우리 기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소로의 말은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덥고 습한 날은 불쾌감을 쉽게 느끼고, 비가 오면 흔히들 축 처진다고 말한다. 쨍쨍한 맑은 날에는 파란 하늘만 봐도 괜스레 마음이 풀어지고 활기가 돈다. 날씨로 시작해 그로 인한 나의 감정을 들여다 보는 일기라니, 한 번도 시도해 본 적 없지만 왠지 이 방법이라면 일기 쓰는 재미가 다시 살아날 것 같다.


 '일기에 날씨를 적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 부제가 달릴 정도로 소로의 일기 대부분에는 날씨나 풍경 묘사가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 묘사가 얼마나 섬세한 지 소로의 일기를 읽다 보면 내가 마치 그 시공간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든다. 겨울날을 그려낸 그의 글을 보면 코끝이 시려오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 눈이 녹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할 때의 일기를 보면 그가 느꼈을 흥분이 온몸으로 전이된다. 애초에 글을 아름답게 쓴 소로도 그렇지만, 또 그의 글을 맛깔나게 번역한 번역가의 노고가 느껴진다. 


 가난 속에서도 의연하게, 오히려 특별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혜택이라는 소로. 일기 속에 담겨진 그의 일상을 가만 들여다 보면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 같아 그의 삶을 동경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내고 이를 아름다운 글로 기록한 그를 보며 나는 또 밝아오는 새로운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꽤나 묵직한 질문을 얻어간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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