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 키르케고르 아포리즘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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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쇠렌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서양철학 입문서에서 가볍게 만나봤었다. 기억나는 것도 신 앞에 선 단독자나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 정도? 그 당시 그의 철학은 왜 이렇게 어둡고 부정적인가 생각했었다. 심지어 그때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와서 세상 걱정거리 없이 캠퍼스 라이프를 즐기던 때였으니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고, 이런저런 풍파에 치인 사회인이 되고 나서 다시 읽은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제목. '우리에겐 절망조차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 절망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진정한 절망이다.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드는 절망. 이러한 절망은 자아 밖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요소 속에 있지 않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고 참된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절망이 그가 말하는 진짜 절망이다. 


 그는 우리가 진실로 절망을 원하고, 자신을 그 질병으로부터 나을 기대나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 진정한 행복을 향한 문이 열린다고 말한다. 절망 속에 침잠해서 허우적거리고 모든 걸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자아를 직시하고,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는 개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는 타인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받기 어렵다. 자기 자신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주체성을 강조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 앞에서 결정을 타인에게 미룰 수는 없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꽤나 크다. 일상생활에서 절망이라는 단어를 쓰는 일이 얼마나 될까? 생명이 달린 일이 아니면 절망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절망을 선택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누군가 진정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절망부터 해야 한다(121p)'고 말한다. 어찌 생각해보면 그가 말하는 절망도 생명,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직결되어 있으니 절망이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 그렇다고 그가 인생을 전부 부정하지는 않는다. 제대로 된 눈으로 바라본다면 인생은 풍부할 수 있다.


 이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그의 말이 전부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절망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지만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진정한 절망 속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자유롭게 살아기는 것. '그것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그 선택 자체는 나의 힘에 달려있다.'(99p)


 여담으로, 책의 구성이 독특하다. 책의 오른쪽 페이지에는 키르케고르의 말이 있고, 왼쪽 페이지는 단면인데 처음에는 새까맣단 페이지가 점점 밝아진다. 마치 진정한 절망에 빠졌다가 온전한 나를 찾아 자유를 되찾은 사람처럼. 독서의 재미를 더해주는, 세심한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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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흑역사 - 이토록 기묘하고 알수록 경이로운
마크 딩먼 지음, 이은정 옮김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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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는 지식, 기억, 감정, 추론 등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 영역을 관장하고, 심장과 함께 생명 유지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관이다. 이런 뇌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최근에는 정신의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져서 ADHD나 조현병, 공황장애 등 다양한 정신질환에 대해 익숙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정신질환은 낯설고 좀 더 심각하다. 자신이 죽었다고 믿거나, 자신의 다리가 자신의 몸이 아니라서 제거하고 싶어한다거나, 아니면 자신의 손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인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읽고 쓰는 능력을 잃어버린다거나. 모두 살면서 겪어보고 싶지 않은 일들이다. 


 심지어 이런 질환들은 그 원인이 완벽하게 밝혀진 경우가 많지 않고, 유력한 가설이 있어 이를 확인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아직 우리는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각양각색의 사례들만 봐도 뇌가 얼마나 섬세한 장기인지 느껴진다. 게다가 책 속의 사례들은 워낙 희귀 케이스여서 더더욱 연구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뇌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았을 옛날에는 이 환자들이 그저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으며 제대로 치료도 못 받았을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희귀한 정신질환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내 뇌가 정상 범위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에 감사함을 느꼈다. 이 책에 나온 그 누구도 자신이 이런 불편을 겪게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인해 말하고 걷는 법을 다시 배우느라 고생한 것을 본 아들이 나중에 뇌졸중을 겪었을 때, 그는 아버지와 같은 후유증을 예상했을 수는 있어도 자신이 오른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다행히 그는 회복했고, 오른손에 대한 통제력도 되찾았다.) 이는 뇌라는 기관이 얼마나 복잡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겼는지에 따라 생각지도 못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책은 뇌와 정신질환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고, 인간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지금 우리가 평범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 현재에 충실하게 살자는 것이다. 


 또 저자는 '정상적인 뇌'라는 개념이 비현실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에 나온 사례 중 강박증이나 피암시성 등 몇몇 사례는 일상에 장애가 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정도가 아닐 뿐 평범한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다. 나부터도 계획이나 통제에 대한 강박을 강하게 느껴 뭔가 생각대로 안되면 초조하고, 화까지 날 때가 있다. 스스로도 이게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안 그러려고 노력하지만 쉽지는 않다. 다들 이런 점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불완전한 뇌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좀 버리고 타인에 대해서 좀 더 이해심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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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현실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 보여준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하나의 사건이 나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삶을 살아간다. - P18

뇌를 더 많이 연구할수록 ‘정상적인‘ 뇌라는 개념이 적어도 우리가 떠올리는 방식에서는 다소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행복하고 온전한, 즐거운 삶을 못살게 구는 생각과 감각에 시달리는 때가 있다. 이러한 현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남들도 나와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 전체의 정신 건강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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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설자은 시리즈 1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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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미스터리, 남장여자

이 세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했다. 역사 좋아하고, 미스터리도 좋아하고, 남장여자는 (로맨스 위주면 별로지만) 그 속성 자체가 미스터리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시리즈물이라 해서 시작해, 말아 고민하다가 어느 날 도서관에 갔는데 반납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이 책을 보고 덥석 집어왔다.

일단 국내 역사 미스터리 소설은 정말 오랜만이다. 많이 읽지도 않은 국내 역사 미스터리 중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또, 보통 묵직한 역사 미스터리와 달리 전반적으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라 느낌이 새롭다.

이 책을 읽다보면 국사 시간에 들었던 단어들이 나온다. 당 유학생, 6두품, 화랑, 금입택, 보덕국, 상대등, 길쌈 등등. 어렴풋한 기억 한 켠에 남아있는 단어들을 볼 때마다 '와, 진짜 통일신라네(?)' 하며 설렘을 느꼈다.

보통 시리즈물은 각 편 또는 전 시리즈에 걸쳐 하나의 큰 줄기가 되는 사건이 있고, 그와 관련된 소소한 사건들이 터지는 반면 이 작품은 옴니버스식으로 4가지 사건이 일어나고, 각 사건은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니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 전개에 더 집중하게 된다.

첫 번째 사건은 설자은과 목인곤의 만남, 두 번째 사건은 설자은의 오빠의 정인이었던 산아(그리고 원치 않았지만 그녀의 남편)와의 연결고리가 된다. 세 번째 사건은 설자은의 가족인 호은과 도은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고, 설자은, 도은, 인곤이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또 설자은이 왕족과 관계를 맺는 사건이기도 하다. 마지막 네 번째 사건은 본격적인 시리즈의 시작의 발판이 된다. 앞선 사건들에서 설자은의 이름을 듣고, 마지막 사건에서는 그녀의 활약을 직접 목격한 왕이 설자은을 자신의 검으로 발탁한다.

캐릭터 설정도 흥미롭다.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된 가문 출신인 설자은은 여자(원래 이름도 미은)지만 타고난 머리가 좋아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중책을 맡고 병사한 오빠의 이름과 신분으로 당 유학을 갔다 온갖 고생 후에 돌아왔다. 본인이 원해 선택한 길이 아니었던만큼 돌아와서도 적당한 벼슬을 얻어 자기 앞가림하며 누구에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길 원한다.

자은을 남장여자로 살기 한 장본인인 자은의 오빠 설호은은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인물이다.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여동생을 남자로 살게 한 것만 봐도 범상치 않다. 거기에 결혼할 여자들에게도 현대인 시각에서 봐도 정신 나간 소리를 해 대차게 차인다. 자은의 여동생 도은은 산학과 길쌈에 탁월하고, 가문의 안주인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는 당차고 활발한 아가씨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신선한 설정이었던 인물은 목인곤. 백제 유민이자 장인이다. 흔히 망국의 사람이라면 보통 나라 잃은 설움이나 울분에 차 있을 것 같은데, 목인곤은 딱히 그렇지 않다. 나라가 망하고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가? 다만 장인으로서 백제의 장식기술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 그는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과 씩씩함으로 설씨 가문의 식객으로 들어와 자은과 함께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인공인 설자은이 작품 내에서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설자은의 오빠인 호은이나 동생 도은, 목인곤의 캐릭터성이 더 돋보이고, 사건 해결에 있어서도 설자은보다는 목인곤의 역할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지막에 가서야 설자은이 사건 해결에 주도적으로 나서는 정도?

하지만 시리즈물의 첫 작품은 보통 주인공의 배경이나 설정을 설명하며 복선을 까는 역할이 더 크니까, 앞으로의 작품에서 설자은의 역할이 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왕의 흰 매가 된 설자은이 앞으로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지, 그 과정에서 목인곤은 무슨 역할을 할지 기대된다. 마지막에 등장한 악역이자, 자은과 같은 집사부 소속이 된 진오룡과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지 궁금하다. 당시 6두품과 진골간의 차별과 갈등이 어떻게 그려질까? 호은과 도은 남매의 앞날에도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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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의 죽음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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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막장드라마 같은 리넷과 재키, 사이먼의 삼각관계가 그들의 고국이 아니라 머나먼 이국에서 펼쳐진다. 그것도 부부의 신혼여행지에서. 사실 그 곳은 배신당한 여자가 자신의 약혼자와 신혼여행으로 오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 약혼자가 이곳으로 신혼여행을 온다니, 어쩌면 여자는 두 번 짓밟힌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작품은 리넷과 재키, 사이먼의 관계를 조망하는데서 시작해 나일강 크루즈를 탑승하는 승객들의 면면을 하나 하나 살펴본다. 생각보다 등장인물이 많은 편인데, 이들이 가진 각자의 비밀이 또 이 작품의 묘미이다. 휴식이 아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여행 아닌 여행에 나선 이들도 있고, 개인적인 사연을 가진 승객들도 있다. 오리엔탈 특급살인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오리엔탈 특급살인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승객들이 숨기고 있는 이야기가 다양해서 하나하나 추측해 보는 재미가 있다.


 리넷-사이먼-재키의 삼각관계로 인해 긴장감이 흐르던 중, 이 작품의 메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리넷 도일 살인사건이 일어나는데 정작 가장 의심스러운 재키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난관에 봉착한다. 여기에 리넷의 값비싼 진주목걸이가 도난되면서 이 범죄가 금전적 동기라는 추정이 나오고, 꽤나 냉정한 사업가였던 것 같은 리넷 도일의 아버지로 인해 집안이 망한 사람이 승객 중에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면서 원한범죄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여기에 레이스 대령이 등장해 승객 중에 위험한 반동분자를 찾으러 왔다고 한다!


 이 작품은 마치 종합선물세트 같은 추리소설이다.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사건, 알리바이가 확실한 제1용의자, 그 외에도 진주 목걸이 도난 사건이나 승객 중에 정체를 숨기고 있는 위험인물, 여기에 승객들 개개인이 숨기고 있는 사실들이 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평화로울 것만 같았던 나일강 크루즈가 졸지에 살인범과 함께 하는 여행이 되는데 승객들이 생각보다 크게 동요하지 않는 점이 신기하다. 푸아로에 대한 신뢰가 크기 때문일까?


 물론, 푸아로는 이 모든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한다. 푸아로의 사건 설명을 읽다 보면 허를 찔린 느낌이다. '돌고 돌아 처음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 결국 치정범죄였다. 다만, 리넷-사이먼-재키의 삼각관계가 독자들이 생각하던 관계가 아니었을 뿐...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는 말 그대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결국 패배를 순순히 인정한 범인은 법의 심판대를 피해 다른 세상으로 도망친다. 결국 행복할 줄 알았던 신혼여행은 모두에게 비극으로 끝난 셈이다. 애초에 리넷이 사랑보다 우정을 앞세웠다면  세 사람은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었을까? 사이먼의 성격상 언젠가는 파국을 맞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재키는 사이먼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막지 않았을 것이다. 이 커플은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끝이 있으면 시작도 있는 법. 이 모든 소동에 불구하고, 승객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사랑이 움튼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적인 결말로 남았던 이 여행은 다른 이들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나일강은 수 천년 전의 문명을 품고서 고고히 흘러간다. 

한 사람은 사랑에 빠져 있고, 또 한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하도록 방치하고 있군.

"괜찮아, 사이먼. 어리석은 게임이었고 우리는 졌어. 그 뿐이야."

"사랑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것일 수도 있군요."
"대부분의 위대한 러브 스토리가 비극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죠."
... "하지만 고맙게도 이 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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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의 언어, 판결의 속살 - 판사란 무엇이며, 판결이란 무엇인가
손호영 지음 / 동아시아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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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신문에 판결에 대한 기사가 실리면 대개 2가지 중 하나다. 국민 감정과 배치되는 판결이 나와 공분을 사거나, 반대로 차갑기만 할 것 같은 판결문에 판사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화제가 되거나. 보통은 전자가 더 많은 것 같은데, 가끔씩 들려오는 미담이 그래서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가끔 접하는 판결문들은 하나같이 감정이라고는 메마르고, 사실관계와 명확한 논리 전개로 가득 찬 냉정한 글이었다. 법이란 사회의 기틀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글은 쓰는 사람도 재미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판결을 하나의 이야기이자 콘텐츠로 본다. 판사가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고민한 과정과 결론이 판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로서의 판결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판결문을 쓸 때 판사가 고려하는 원칙들, 판사가 판결문을 쓰는데 활용하는 기술적인 요소들, 판결문에서 드러나는 판사의 생각들. 모두 실제 판결문의 문장을 기반으로 저자의 사유가 펼쳐진다. 판사라서 왠지 판결문처럼 글을 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판결문과 달리 글에서 법과 사람에 대한 애정과 따스함이 느껴진다.


 1부는 우리 사회에서 법이 맡고 있는 역할을 상기시켰다. 사실 법의 존재가 일상생활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법이 이미 사람들에게 충분히 체화되어서 굳이 인식하지 않고도 법을 준수하며 사는 사회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법의 의미를 잊기 쉬운데, 1부에서는 판결에 드러난 법의 원칙들에 대해 다룬다. 법이란 곧 그 사회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의 한계를 규정짓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서 안정성이란 덕목을 얻을 수 있지만, 반면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데, 판사들도 항상 이 지점에서 고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는 판결문에 등장하는 수사적인 기법들을 주로 다룬다. 판례를 참고하기도 하고, 통계를 언급하기도 하고, 전문가 자문을 받기도 하고... 마치 대학생 때 배운 논리적 글쓰기의 한 사례를 보는 기분이었다. 결국 판사는 판결문으로 소통하는 사람이니, 재판 당사자와 국민들이 판사의 주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판결문을 쓰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새삼 알 수 있었다.


 마지막 3부는 판결문답지 않은 판결문들이 많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문장이나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다소 격양된 듯한 문장들을 보며 '아, 판사들도 사람이구나' 싶었다. 세상 무미건조한 글인 줄 알았던 판결문 속에 이렇게나 이질적인 문장들이라니. 본인들이 쓰는 문장이 기존 판결문의 문법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쓸 수 밖에 없었던 판사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법이 사람들에게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며 이런 문장들을 쓰지 않았을까?


 판사들이라고 하면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아마 언론에 보도된 몇몇 사건들 때문에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판결문으로 바라본 판사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맡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이었고, 한편으로는 재판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직업에 대해 이렇게 깊이 들어가본 적은 거의 처음인데, 내 직업에 대해서도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만약 내가 내 직업으로 글을 쓴다면, 나는 무엇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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