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즈마리 > 시간을 위해 싸우는 환상여행
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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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좋다, 좋다 얘기는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간, 이야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시간?!

시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시간은 어찌보면 한정되어 있고 절대적인 어떤 대상처럼 느껴진다. 객관화하여, 시계로 우리는 시간을 재는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일 터.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마다 각기 느낌에 따라 다른 주관성 역시 갖는다. 공부할 때는 시간이 안 가다가 놀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는 걸 느낄 것이다. (때에 따라 반대인 사람도 있겠지만. ^^:;) 시간이 이 두 성격,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의 두 성격을 잘 활용한 책이 바로 <모모>이다.

시간을 아껴야해!! 라고 말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시간을 은행에라도 맡겨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뭘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이런 의문이 다시금 들게 만드는 게 바로 이 소설의 미덕이다.

이 소설의 상상력은 한층 더 나아간다. 우리는 시간을 아낄 결심을 하고 미친듯이 일에 열중하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은행 사원들의 방문과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들이 사실은 인간들이 절약한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간은행 사원들은 시거를 태우고, 대머리에, 양철가방을 가지고 다니면서, 당신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쓸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경고를 하고 시간을 저축할 것을 종용한다. 사실은, 이들이 바로 사람들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유령같은 이들. 시거는 시간을 의미하고,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 것은 이들이 스스로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양철가방은 바쁜 회사원같은 차가운 느낌을 전해준다.

이들과 맞서싸우기 위해 우리의 귀여운 모모는 시간의 원천이랄 수 있는 호라(HORA; 시간이란 뜻) 박사와 느리지만 반시간 후의 미래를 예측하는 거북이 카시오페아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바로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정말 우리가 값있게 써야 할 시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반추해보게 된다.

사실 나는 지난 주까지 몹시 바뻐서 책을 읽을 여력이 없었다. 마침, <모모>라는 두꺼운 책이 내게 숙제처럼 주어졌고, 이 책의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도 '서둘러선 안된다. 맛있는 과자처럼 야금야금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이 책이 두꺼운 모양이다. 우리가 시간낭비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만남들, 행위들이 과연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

기기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모모. 모모 옆에만 있으면 기기는 모든 창의적인 이야기 놀라운 이야기들을 지어낼 수 있다. 아이들도 그렇다. 모모의 원형극장에만 오면 신기하고 신나는 놀이들을 창안해낼 수 있다. 원형극장이 큰 배가 되고 놀이터가 되고, 실험실이 된다.

우리에게 이야기와 상상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시간을 저축하기로 한 기기는 모모사 사라진 후, 부자가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게 되지만, 그에게 남는 것은 자기 자신 기기가 아니라, 시간의 노예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 상상의 세계나 창조적인 세계는 사라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학습능력 향상을 위해 카드놀이 등을 배우지만, 자신들의 창의력은 말살되고 고갈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세계는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오히려 느리게 감으로써 빨리 갈 수 있다는 그런 세계에서나 가능한 게 아닐까?

마치 시간에 얽매인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작가 미하엘 옌데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메세지 뿐 아니라 상상력을 인도받는다. 정말 우리가 필요로하는 멋진 세계는 여기가 아닌 어떤 상상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

사람?!

어떤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고, 시간을 잘 소비하는 사람일까? 이 책의 또 다른 주제는 여기에 있다. 타인의 말을 정말 '잘 들어 줄 수 있는' 모모같은 사람. 모모는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지만,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스스로의 해결책을 찾아내거나 화해를 하고 행복해질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모모가 무한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모모에게만 이런 무한한 시간이 있다는 건 분명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들어줄 준비를 한다면, 세상은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워 질 텐데...

도로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도 그런 멋진 사람 중 하나이다. 전체 도로를 다 쓸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이걸 언제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 번 쓸고 한 번 숨을 쉬고, 한 번 쓸고 한 번 숨쉬고 하면서 순간을 즐기다 보면 어느 새 도로가 다 깨끗하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베포.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지금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과연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내가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멋지게 살아갈 것인지. 미래를 위해 쓸 것인지, 현재를 위해 쓸 것인지. 현재를 보다 값있게 쓰고 있다면, 어쩌면 모모가 본 그 아름답고 멋진 꽃을 우리가 볼 수 있지나 않을까 한다.

H's essay

 

 (* 책에 초등학교 5학년 부터라고 적혀있더라구요. 아이들이 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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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설박사 > 좋은 풍경이고 싶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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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본다. 이는 동일한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는 물건을 찾는 사람이 등잔 밑에는 분명히 그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선입견이나 생각 없이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시각 정보만을 의지해서 사물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심 없이 세상을 보기란 쉽지 않다.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생각한 대로 사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 사십에 집을 팔아 해외 여행을 떠난 김형경의 여행기를 통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떠난 김형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이었고 그가 본 풍경도 사람이었다. 사람들이라면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고작 사람을 보고 왔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사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에펠탑과 융프라우를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여행기라면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위대한 인류 문명의 소산이 김형경의 눈을 채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안에 초라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그리고 그들을 통해 비춰본 김형경 스스로의 모습이 보였을 뿐이다.

아마 말과 글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이었기 때문에 김형경이 사람을 더 세밀히 볼 수 있었고, 내면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는 마음을 대변하기보다는 위장하는 데에 더 익숙하다. 그럴싸한 말로 스스로를 포장해버리면 인간의 마음은 더 깊은 수면 아래로 숨어버린다. 김형경의 모습을 보면 마치 엄마가 말 못하는 아이를 주의 깊게 보는 것처럼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눌 수 있는 말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상대방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타인과 자신의 본질에 좀 더 접근하려는 용기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사람의 행동과 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심리와 지나온 삶을 판단해 버리는 김형경의 명백한 판결에 좀 섬뜩하기도 했다. 마치 나도 그녀 앞에 선다면 부끄러운 과거가 모두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모자란 모습은 부족한 과거 때문이라는 정신 분석학자들의 주장에 나름대로 항변하고 싶기도 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벽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흠이 있고 완전치 못하다. 사랑과 질투, 평안과 우울, 인정과 시기심은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유아기 때 형성된 인간의 심리가 무의식의 영역에 숨어서 의식의 영역으로 넘어오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의식의 영역에서 삶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 자신이 아닐까. 나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형경의 정신 분석이 밉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연민 때문이었다. 개인의 행동과 말 이면의 인간 본성을 까발리기보다는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어둡고 아픈 순간들을 감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김형경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감과 연민은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상처를 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하여 화해의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게도 몇 번의 해외 여행 경험이 있다.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고 주로 선교를 목적으로 한 여행이었다. 한번은 태국 한 대학교 내에서 전도를 하다가 기독교 동아리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멀고도 더운 나라에 와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 중 한 학생이 웃으면서 내게 뭐라고 말했는데 내가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메모지에 이렇게 써 주었다. "Your life encourages us very much."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그 말을 기억 속에서 꺼낼 때마다 내면의 떨림이 있다. 마치 위대한 예언처럼 그 말이 내 인생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은 사람 풍경인 듯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람만이 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하늘의 영롱한 별이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절벽,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는 폭포, 황량한 사막과 신기하게 생긴 모든 생물들 역시 그것이 존재하기 전에 조물주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소산 역시 그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 내면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 보는 것은 어쩌면 그 모든 아름다운 것과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의 형성 이전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바로 사람 풍경이 흥미 있고 가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다른 이들에게 과연 나는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진다. 정말 마음으로 바라기는 좋은 풍경이고 싶다. 지쳤을 때 와서 쉴 수 있고, 방황할 때 길을 안내해주며, 낙담했을 때 격려해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풍경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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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0심2 > 생활속 사람풍경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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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람풍경   -윤영심-


 마치 내가 알몸이나 된듯 한 느낌을 얻었다고 한다면 처음 이 책을 받아 들였을 때 나의 상태에 대해 충분한 답이 될 것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지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을 얻은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였다.

하지만 이 감정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 감정은 마치 목욕탕을 간 나의 모습과 비슷했는데 , 목욕탕을 가게 되었을 때 항상 옷을 벗는 처음이 문제다. 주위를 힐끔 쳐다보게 된다든지, 주위에 누가 있는지 살피게 된다. 가령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게 되면 옷 벗기를 꺼려하거나 부끄러워 한 적은 다들 한번쯤 있는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가게 되면 그제야 옷을 벗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알몸으로 목욕탕에 들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방금 전 까지 느꼈던 부끄러움 같은 감정들은 사라지고 만다. 다 같이 알몸의 상태의 탕 안에서 나의 모습은 더욱 자유로워진다. 스트레칭을 한다든가 찬물에서는 물장구까지 치는 나의 모습에 가끔 나도 의아해 하기까지 한다. 점점 그들도 나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느끼고는 나의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는 것이다. 

나의 감정은 이와 같았기에 처음 어색하던 감정은 하나하나 벗겨진 작가의 감정에서 동일시라는 감정을 찾아내게 된 것 이다. 작가가 로마의 노인들에게서 깨달았던 동일시라는 감정을 나는 잠시나마 그녀에게 느끼며 책을 읽는 내내 그녀와 동일시되었고 그녀의 감정이 나에게 투사됨을 느꼈다. 그래서 인지 작가의 단호한 말투나 행동에 대해 크게 부정하지 못했고, 반박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에서 그녀의 글에 반박하기를 바라는 몇몇의 의견을 들으면 내 속에선 그 의견에 대한 반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을 나를 발견한 기억이 있다. 그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의견과 같을 진 몰라도 이미 내 안에 그런 감정이 싹튼 것은 내게는 새삼스런 감정이었지만 그녀와 동일시 된것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나는 화를 잘 내지 않는다. 별다른 화날 일이 일어나지도 않으며 웬만해서는 웃고 넘기는 성격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성격이 밝고 쾌활하다고 약간은 낙천적이라는 말을 해왔고 또한 그렇게 종종 들어 왔으며 그런 말들은 나를 만족스럽게 한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나 자신을 잘 몰랐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모르는 나, 분노에 가득 찬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당황한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으며 억제할 수 없는 나의 감정 때문에 미묘한 기분과, 멜란꼴리한 상태에 빠져 허우적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가 난다는 것과 분노라는 것은 나에게 약간의 차이가 있는듯한데 화가 나면 그것을 즉시 표현하게 된다. 뒤끝이 없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분노라는 것은 다르다. 가슴 저 밑 아니 더 밑 알 수 없는 부분에서 올라와 내 머리 끝을 치고 내려온다. 그런 감정은 나 혼자서 컨트롤 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에 혼자 삭혀 버릴 때까지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항상 그런 식 이였다. 이런 분노의 감정이 찾아오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나도 나 자신을 모르겠다는 말이 여기에 적당한 말이 아닌가!

역시 목욕탕에서의 경험인데, 반신욕을 즐기는 나는 목욕탕을 자주 간다. 목욕을 하는 것은 심신의 피로를 풀어주어 자주 즐기는 편인데 얼마 전 한창 반신욕을 할 때였다. 누군가가 들어오면서 목욕탕의 문을 5/1가량 남겨두고 들어 온 것이다. 분명 그녀는 자신이 그런 실수는 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마 눈치 채고서 자기자리에 들어오는 그런 파렴치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며 소망이다.)  그때부터 나는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문과 그 여자를 몇 번을 반복해서 본지 모른다. 그녀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 바람은 허사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결국 알아채지 못했고 나의 분노는 이미 머리 끝 까지 차 버렸다.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욕을 퍼붓고 있었다.(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말이다!) 이기적 이라는 둥, 예의가 없다는 둥, 진짜 짜증난다는 둥, 별의 별 욕을 다 한 것 같았다. 그런 욕을 하면서도 내 자신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실수일 뿐인데 너그러워질 수가 없었다. 상황은 5분이 채 되지 않아 종료 됐다. 뒷사람이 들어오며 문을 닫은 것이다. 그때 나의 분노는 씻은 듯 사라졌다. 내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가 겨우 그 정도에 삭혀 들어간 것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기에 내 자신에게 말했다. “넌 참 이상한 인간이다.”

평소 사람관계에 있어서 그런 분노를 느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더 새삼스럽고 의아하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누군가 나에게 피해를 주면 나는 실수이려니 생각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그렇게 너그러운 척 살아오던 내가 겨우 목욕탕 문을 닫지 않는 여성에게는 그런 간사하고 폄하한 모습을 보인 것이 당황스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감정이 이해가는 듯했다. 나는 내 주변인들에게 대한 욕망이 있다. 내 주변사람들은 모두 좋은사람들이어야 하며 그들과 나는 융합되어야 한다는 욕망. 친구들을 보면 그 사람을 대강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그들에게 투사의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그들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주변인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도 차마 큰 분노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내 얼굴에 침 뱉기 인 샘이니깐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낮선 곳, 낮선 사람에게는 그토록 인색하며 분노의 감정을 표현 했던 것이 아닐까. 나를 괴롭히고 억압 했던 것은 바로 내 주변 이였지만 차마 그들에게 표현할 수 없었던 내 감정이 그녀에게 표출 된 것이다. 그깟 문하나 때문에 나의 모든 악한 감정과 욕을 얻어야 했던 그 여성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내 주변인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잘 분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얼굴에 침 뱉기와 상통하는 행위라고 내 무의식이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보다는 좀 더 가식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내 내면에 묻혀있다. 그것은 인정을 바라는 나의 모습이다.

어느 수녀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 긴장 이라는 것은 남에게 잘 보이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예요. 그런 마음 없이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긴장 이라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 여기서 긴장하는 이유도 남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 그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마음이 근원일 것이다. 나도 역시 평소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싶어 했고 그래서 그렇게 내 감정을 억눌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정받기 위해 나는 남을 더 인정해야 했다. 남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도 인정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길가다가 늙은 할머니를 만나게 되어 그분들을 도와 준적이 많다. 버스에서 자리 양보도 잘하는 편이다. 내가 그 할머니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그런 것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일 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인정이라는 감정을 배재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에 대한 떳떳함,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 내재 되어있다. 남이 아닌 내 자신에게 일단 인정을 받으려는 모습, 이것은 작가가 말하는 나르시시즘의 사람들의 생각과 비슷하다. 나 역시 ‘나는 다 잘 풀릴거라는 식의 생각과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니깐 말이다.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느님은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가 이것에 대해 언급 하였을 때 나는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선물 하는 것이나 칭찬하는 말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항시 선물을 할 때면 다음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서 충분한 보답이 따라 나오지 않으면 으레 씁쓸하고 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리고 칭찬을 할 때면 똑같은 칭찬을 바라지는 않아도(그건 정말 쑥쓰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고 상냥한 이미지로 남길 바란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 쑥쓰 럽지만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알길 바라며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말이 곱다는 속담을 나는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공포에 대한 나의 감정을 언급하며 마무리를 하고 싶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자취생활을 하면서 나에게도 공포감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래 친구들보다 키와 등치가 커서 어릴 적부터 나는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라 이러 공포감도 나에게는 익숙지 않다.

하지만 나도 언젠지 모르지만 어릴 적부터 남성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은 한다. 그것을 이제야 발견했지만 말이다. 오빠와 어릴 적 많이 다투면서 난폭했던 어린 시절 오빠에게 많은 힘 놀림을 당했었다. 그때 부터 남성에 대한 콤플렉스와 그와 동시에 공포라는 감정이 나에게 내재되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친구가 여성 자취생들은 조심해야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계단에서 강도들이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 심지어는 문을 따고 집에는 들어와 있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넘겼다. 하지만 저녁이 되어 3층에 있는 내 자취방에 들어갈 때는 상황이 달랐다. 계단하나하나를 올라가면서 위를 살피게 되고 문 앞에 서서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 않을까 들어 보기도 했다. 약 일주일간 이런 생활이 반복 ‰怜?짜증나기도 했지만 그런 나의 행동은 두려움에 휩싸여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생각을 해보니 역시 내 주변에 나쁜 남자는 없었다. 나를 위협하거나 나에게 나쁜 일을 한 남자는 없었다. 단 한명도 말이다.  나의 이 공포는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왕 된 생각이라고 간주해 버리니 마음이 편해졌고 나는 예전처럼 다시 두려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람풍경의 여러 일화들은 각각의 단락을 이루어 나누어 있지만 결코 그들이 각각의 별개의 이야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 하나하나가 공감이라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락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그 생각은 다른 단락에 확장되어 생각되고 또 그 생각은 확장되고 그러다 보면 책 한권의 생각들이 어느새 정리되어 버린다.

이런 미묘한 관계들이 사람풍경이 아닐까? 우리 사람들의 삶은 각각별개로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다. 서로 보이지 않게 소통하고 나누고 배우고 있는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의 상황과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것 같아  같아 한결 마음이 편해 졌으며 한결 좋아진 나를 발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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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누아 > 불편하게 읽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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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입문]을 읽고서 심한 충격에 휩싸여 그날부터 얼마간 친구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방어기제의 하나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딱딱 들어맞는가...그러다 말았다.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사람은 안 보이고 방어기제만 보였던 것이다.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택한 정신분석이나 여행은 저자에게 유익했을 것이고, 권할 만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사람에 대한 태도는 내가 처음 프로이드를 만났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기대려고 하는 의존적인 인간에게 내가 좀 차갑게 해도 괜찮다. 왜냐하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고 그가 성인인데도 의존성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니까. 저 사람은 친절하구나, 심리적으로 무엇을 보상받으려고 저러는 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태도.

저자가 인용한 게슈탈트의 말처럼 "우리가 남에게 보이는 관심이란 대체로 방어의식이거나 시기심이거나 의존성이거나 투사의 감정 중 하나이기 십상"(p.141)이지만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감정의 동요 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것이란 과연 어떤 상태인가? 이런 상태를 용기라고 표현하지만 그렇게 단순할까? 저자가 인용한 "혼자 있기"를 보자.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된 극단적인 방어의식 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분리와 개별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상태 둘 중의 하나만일 수 있을까? 태어나서 3년 안에 완벽한 보살핌과 완벽한 조건에서 자란 사람이 없을진대 어떻게...? 아마 저자처럼 정신분석을 받고 나면 좀 덜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걸 안 받아봤으니...

저자는 이 심리여행을 통해서 남의 말이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타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은 전적으로 그들 내면에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인간은 타인의 언행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존엄성을 타고난 존재라 믿게 되었다(p.294)"고 한다. 남의 말이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이 타인만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태도는 이 책의 일관된 태도로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는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존엄성이란 자기 존재에 대한 사랑 때문에 훼손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모를 때, 타인이 자신의 삶에 너무 간섭한다고 느낄 때, 부질없는 일에 분노하고 있을 때 , 혼자서는 도저히 아무 것도 못할 때 자신을 한번 분석해 보는 데는 유익하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남을 분석하지는 말기를. 행여 아파하는 사람이 안 보이고 아파하는 이유만 보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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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열린사회의적 >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하면, 당신안에 머무르지 마세요.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형경이 상을 받았다는 신문광고 기사를 예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몇 권의 책을 내었다는 것을 간간히 접했지만 이렇게 깊이 있게 만나기는 오늘이 처음인 듯 합니다. 하지만 낯설은 만난인지 쉽게 그에게 다가 가지가 않네요. 그는 나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내 머리는 자꾸만 고개를 젖습니다. 내 손은 가슴에 가 있지가 않고, 메모장을 꺼내어 계속 메모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상당히 어려운 만남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누구를 위한 글쓰기인가?

"아기는 99퍼센트 엄마가 만든다(25쪽)"

이상적인 논의라 하더라고 감정, 심리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즉 엄마에 대한 사람만이 절대적 사랑으로 받아들여지니, 다른이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누구의 사랑이 크고 작다의 문제가 아니라, 지은이가 말했듯이 '엄마의 손을 떠나 할머니, 이모, 고모의 손에서 자란 사람들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모든 아이의 불행은 결손가정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이를 할머니가 품고 있는 사랑과 지혜를 깡그리 무시하게 되며, 현대사회에 대한 강한 부정도 드러낸다. 나는 무엇보다 어머니 없이 힘들게, 굳굳하게 살려는 이에게, '네 문제는 엄마가 없어서이다'라고 무 자르듯이 삭뚝 잘라버리는 그 악마적 글쓰기가 두렵다. 아는 것이 병이고 모르는 것이 약이라면, 분명 이는 살짝 덮고 치유의 방법부터 찾아야 할 터인데 상처난 부분을 찬바람에 들추어 내고 있다. 또한 한 사람의 책을 '절대 진리'인냥 받아들임도 두렵다. 최소한 인긴적인 존재만이 아닌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면도 찾아보아, 어떠한 결론을 내렸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데스몬드 모르스의 저서 『접촉』 등을 권해 본다.

글쓰기 관한 문제.

1. 여행 풍경
2. 정의 (책 인용)
3. 가정 (~있을 것이다)
4. 보기
5. 결론


지은이는 여행을 하면서 잠시 느낌 감정을 풀어낸다. 이 풍경은 어느 학자의 정의로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리고 정의는 지은이의 사념과 결합한다. 정의는 과학적이고 사실적인 반면에 지은이의 가정은 상당히 사념적이다. 즉 '~있을 것이다'는 책을 넘기는 순간에 정의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할 보기를 줄 세운다. 이 보기는 이미 그의 머리속에 줄 세워진 입에 맞는 맞춤식이다. 이렇게 이어지는 글쓰기는 개인적 사념이 정의로 둔갑하는 것이다. 즉 그가 끌고온 정의는, 그의 사념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 정의'에 불과한 것이다.

다양한 사고관으로 좀 더 넓게 보아야 하는데, 그는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몇 몇 만난 사람들을 쉽게 단정짓어버리고, 이를 합리화할 근거를 책 속에 끌어온다. 다시말하면 앞서 모든 인용문은 그의 '사념적 정의'를 합리화 하기 위한 '도구적 정의'가 되는 것이다.

사견인 작가론

어릴적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를 현실에 내어놓지 안는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뒤에 서서 나름대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서기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의 편지가 전부 옳다고는 할 수없다. 수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사람과 부딪히여 스스로를 보이지 않았기에 그는 착각 속에서 세상을 재단하고 있다. 진정 그가, 세상과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세상에 나와야 할 것이다. 내면에 꽁꽁 숨어 세상을 보는 것은 비겁하다. 더욱이 이를 사실인냥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솔직히 이 지은에 대해 모른다. 이 모습은 내게 보여지는 모습을 적은 글이다. 옳다그르다는 분명 자신만이 알 것이다. 내가 글을 적고, '그는 이렇다', '몇 권의 책을 읽어보니'라고 단정 짓는 것도 옳지 못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세상과 부딪히고, 그와 이야기를 주고 받기 앞서 까지는 그를 본 것은 빙산의 조그마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글을 적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그에 대한 '사적인 견해'를 정리하고 싶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내게 소리치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관리인 사내가 쐐기박듯, 무슨 말인가를 남긴 채 단호히 몸을 돌려 계단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깨달았다.(47쪽)

박물관을 나와서도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만약 어린 시절에 그 모든 과학 원리들을 이했더라면 모호한 상상력을 키우는 대신 논리적인 사고력을 키웠을 것이고, 소설가가 되는 대신 고하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53쪽)

파리에서 우울증의 위력을 경험한 후 뒤늦게 또 한 가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삶이 어딘가에 막혀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는 느낌. 불투명한 막이 한 겹 의식을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바로 우우증의 증상이었다. 20대의 그 막막하고 암울한 느낌. 30대의 그 무력하고 적막한 상태가 죄다 우울증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없다고 느꼈지만 어‰F게 살아야 할 지 알 수 없는 상태(58쪽)

서양 남성들이 혼자 여행하는 동양 여성에게 친절한 것은 다만 그 여성이 새롭게 보는성적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247쪽)/ 로마에서 전차를 타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더 유심한 시선이 얼굴에 와닿는 것을 느끼며 무심히 그쪽으로 고개 돌렸을 때 나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시선과 맞닥뜨렸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쳤어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채 얼굴이며 몸 전체를 삼킬 듯한 시선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아마도 상상 속에서 내 옷을 거의 벗긴 겉 같았다.(248쪽)


오만한 글쓰기

내개 지은이의 글쓰리를 두려워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그의 글쓰기는 유아기적 놀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 들면 너는 내편,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쁜 편이라는 일방적인 금긋기가 행해지고 있다. 박물관 관리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는데, 혼자서 상상을 한다.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고 자기를 알몸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녕 가까이 다가가서 애기를 듣어보았는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사람에게 가서는 마음을 놓는다. 즉 쉽게 사람에게 다가가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신'인냥 재단하는 글의 글쓰기는 오만하고, 상대방에게 상당히 무례하다.

책읽기가 이런 오만과 무례 때문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긴 향해를 하지 못한 점을 밝힙니다. 물론 나와는 다르게 좋은 시선으로 본 사람을 틀렸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내가 본 지은이의 시선'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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