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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무꾼 >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을 간데없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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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홍준선생은 두가지 신묘한 마술을 펼친다 .하나는 고은 선생의 말씀처럼 그는 우리가 무심히 보고 지나치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많은 이들에게 그 넘치는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집필하는 책은 거의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이다. 아래 독자서평을 쓰신 분과 마찬가지로 나도 지독히 베스트셀러는 읽지 않는다 . 부득불 잘났다고 내가 읽고 싶은 책만을 고집해서 골라 읽고는 했는데 유연한 기회에 흘러간 베스트셀러(물론 그것은 아직도밀리언셀러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전 3권으로 구성된 남한 답사기를 읽는데는 채 일주일이 걸리질 않았다.그의 글을 읽으면서 무심히 지나쳤던 그 많은 여행길에서 놓치고 돌아온 역사의 흔적사 사람의 온기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고,아름다운 유적과 유물들은 더 이상 남겨진 흔적과 물건이 아닌 빛나는 문화유산임을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읽으면서 몇가지 아쉬운 것들은 글의 전개가내가 느끼기에는 너무 산만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또 하나는 필자가 심심치 않게 섞어 쓰는 일본식 한자의 표기였다.'산보'같은 경우는 그냥 넘길 수 있었으나 '한일합방'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때면 심히 불쾌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필자의 주장대로 20~21세기를 살고 있는 후손의 문화적 역량과 안목이 심히 천박하여 소중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몰라보고 혹은 섣부르게 손을 대어 외려 망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그 꾸짖음이 하도 혹독하여 오히려 자괴감이나 자기비하를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러한 소소한 나의 못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가 알지못했고 혹은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소중한 문화유산과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필자의 지적대로 전국토가 박물관이고 역사의 흔적을 안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은 후세에 대한 죄악일 것이다.이제라도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아름다운 우리 문화유산을 올곧게 지켜 나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이 세권의 책을 읽는 내내 느끼게 되었다. 북한문화유산답사기 이후로 이후 답사기에 대한 후속편들이 어서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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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온달 > 천년이 흐른 뒤에도 가까이 느껴지는 역사의 숨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지음 / 창비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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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바쁜 도시문명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첨단기기와 온갖 문명의 이기들속에서 우리는 현대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남다른 시간개념이 최선의 삶인양 살아나간다. 허지만, 우리가 지금 현재 여기 서 있게 된 나의 그림자는, 무수히 세월과 역사의 물줄기로 흐르다 지금 이 여울목에서 흐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초등학교시절 아련한 소풍지에서의 기억에서 부터 대학시절 국토의 여기저기를 흘러다니면서 느꼈던 잊혀졌던 역사의 숨결을 다시금 깨우치게 한 소중한 서적이다. 어느 일요일 구의동 집근처 아차산에 평소때처럼 운동삼아 올랐다가 아차산성 산자락 조그만 풀숲의 오두막에서 무심코 줍게 된 고구려 기와편에서 본 그 빛바랜 역사의 색깔들과 우물 정(井) 字가 뚜렷이 천년이 넘은 세월을 뛰어넘어 내 손바닥안에 펼쳐질 때의 그 역사의 숨결을 직접 느껴 본 나로선, 이 책을 대하는 순간 매 페이지마다에서 진한 시공간을 넘어선 역사의 숨결 그 자체였다.

누구라도 어릴 적 동네 인근의 학교 소풍지들 중에 한 곳은 역사의 유적지였고, 그 곳에 간직되어 있는 역사의 유물들 속에서 느꼈던 현재와의 생경함과 알 수 없는 과거에의 향기들이 피어나오는 그런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고향은 충남 당진, 예산 근처의 합덕이란 소읍이었다. 중학시절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소풍지로 내달아 간 곳은 조선조 최대의 명필이었던 추사 김정희의 고택지였다. 마구잡이로 친구들과 어울려 흥에만 겨웠던 소풍지에서 추사고택의 낡고 이끼 낀 기와 및 처마 기둥들에서 느껴졌던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의 냄새와 숨결은 지금도 어렴풋이 떠 오르고 있다.

이 책은 분명코 같은 사물에서 느낄 수 없는 자들에게도 공감된 향기를 가지게끔 하는 귀중한 개인의 역사탐구에 대한 일지이다. 책 속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던 소중한 역사에 대한 느낌과 단상 한편씩은 떠 올릴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이 책엔 분명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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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삼순이, 김만준, 차경아, 이오덕..
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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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며칠 전, <삼순이> 팬인 집사람이 최근회를 보고 나와서 혀를 끌끌 찬다. "또 베스트셀러 하나 나오겠구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방금 끝난 방송분에서 삼순이가 여자아이 (나야 그 드라마를 안 보니 스토리를 모른다. 하여간 여자아이.) 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모모>를 한 권 사주는 장면이 나왔더란다. "그러니 이제 또 다들 <모모> 사러 서점 가지 않겠어." 말이야 맞는 말이다. 지금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뻑하면 인터넷뉴스에서 그 등장인물이며, 스토리며, 배우들의 한 마디 한 마디까지 "뉴스"로 가공해 만들어내는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드라마에 나왔으니, 그야말로 베스트셀러가 될 것은 시간 문제인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이렇게 보니 대뜸 <모모>가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다더니, 삼순이가 이젠 모모를 살려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게 언제적 책이야? 그리하여 <모모>에 관한, 그러나 작품과는 직접 관련 없는 이런저런 잡생각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2.

김만준이란 가수가 있다. 이름도 몰라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겠지만, 이 사람이 부른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목이 <모모>이기 때문이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해를 쫓아가는 시계 바늘이다." 운운. 노래 제목도 <모모>이니, 사람들은 대개 여기서 책 제목 <모모>를 자연스레 떠올린다. 즉 이 노래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읽고 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모모"는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여자아이 "모모"가 아니라,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란 소설에 나오는 남자아이 "모모"이다. 왜냐하면 김만준의 노래에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이는 바로 <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를 키워주는 할머니가 늘 말하는 프랑스의 휴양지 "니스"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자기 앞의 생>과 노래 <모모>를 연관시키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엔데의 <모모>와 노래 <모모>를 연관시키는 사람이 더 많다. (사실 나도 <자기 앞의 생>을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까.) 에밀 아자르에겐 불행한 일이겠지만, 어쩌면 그만큼 <모모>라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지속적인 인기를, 그러니까 무슨 유행가에 나와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할 만큼 보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모모>라는 노래를 생각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 노래를 부른 김만준이다. 이 노래가 아마 TBC (지금은 당근 없어진) 방송에서 하는 무슨 대학가요제인가 하는 데서 상을 탄 것으로 알고 있다. 한참 뜸하더니 1980년대 중반에 <무명 가수의 하루>라는 상당히 풍자적인 노래로 다시 등장했다가,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다. 이상하게도 내겐 가끔 "오늘도 하루가 또 시작 됐어. 오늘은 드디어 무대에 서는 날이야"라는 이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무대에 설 기회도 거의 없는 가난한 무명 가수의 설움을 토로한 노래인데도,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진 않은 까닭인가보다. 김만준씨, 머지않아 정말 <가요무대>나 그런 데서나 만날 수 있을지?

3.

<모모>라는 책을 떠올리면 또 하나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바로 1970년대 말에 이 책을 처음 번역, 소개한 번역가 차경아 씨다. (경기대 독문과 교수로 계신다고 알고 있음.) 어디선가 읽었는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 <모모>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까지의 과정도 매우 드라마틱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을 처음 펴낸 "청람"이란 출판사는 본래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였다. 지금도 간혹 헌책방에서 볼 수 있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의 책을 비롯해서 상당히 "딱딱한" 책만 펴내던 곳이었고, 전 국회의원이었던 손세일 씨가 편저한 <한국논쟁사>라는 다섯 권짜리 흥미로운 앤솔로지를 펴내기도 했던 곳이다. 당시 이곳 사장님이 해직기자 출신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사회과학 출판만 가지고는 영 살림이 어려워 전전긍긍하던 중에, 당시 독일 유학중이던 차경아씨의 추천으로 펴낸 <모모>가 그야말로 요즘 말마따나 "대박"을 치면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차경아씨는 <짐 크노프>, <뮈렌 왕자>, <끝없는 이야기> 등 엔데의 대표작들을 연달아 번역했고, 그 와중에서 저자 엔데와의 친분으로 매번 한국어판 서문과 출판 허가 등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차경아씨는 지금도 활발히 번역 활동을 하고 있고, 내겐 바하만의 <삼십세>와 <만하탄의 선신>, 그리고 <말리나>의 번역자로도 기억되고 있지만, 그래도 역시 엔데, 특히 <모모>와 <끝없는 이야기>의 번역자로도 반가운 이름이다. 청람출판사는 여전히 건재한 모양이고(이름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모모>의 차경아 번역본을 계속 펴내고 있다. 물론 독일 출판사와 정식 계약한 곳은 "비룡소" 쪽이지만 말이다. 국내 저작권법의 이중적인 규정으로 인해 이런 중복 출판이 가능한 것인데, 솔직히 별로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쩌면 둘 사이의 중재를 도왔을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역시 모르겠다.

4.

<삼순이>에서 <모모>가 등장하기 직전, 나로선 다시 한 번 이 책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 일이 있었다. 다름아닌 아동문학 평론가인 고 이오덕 선생의 저서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아리랑나라) 개정판 --- 이 책은 출판사의 고집 때문에 일반 판매는 하지 않고 인터넷과 일부 헌책방에서만 판다고 하니, 필요한 분은 이오덕학교 사이트(http://25duk.cyworld.com)에 가보시라 --- 을 읽다가 거기 이오덕 선생이 엔데의 <모모>(물론 70년대의 차경아 역본)에 대해 평론을 쓴 것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이오덕 선생은 이 책이 상당히 잘 쓴 작품이긴 하지만, 지나친 물질주의와 비인간화의 원인을 단순히 어떤 "비현실적인" 대상으로 국한시킨 점이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의 현실에는 분명 그런 인간 소외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어떤 "원인"이 있으니 (물론 그게 뭔지는 선생 자신도 딱 짚어주진 않았지만) 따라서 차라리 그 원인을 분명히 직시하고 개선해 나가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었다. 과연 그럴까? 그러면서 선생은 이 책이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가 된 까닭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의 철학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려는 성향도 한몫을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하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솔직히 이 대목을 읽을 때는 선생의 관점이 너무 편협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물론 동화가 항상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즐거운 내용만 담아서는 곤란하다는 선생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엔데가 부러 현실을 외면하라고 독자를 충동질하는 것은 아니므로, 동화는 어디까지나 동화로 읽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반발심이 생겼다. .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 번 선생의 글을 읽어보니, 그 당시 (1984년) 의 상황으로선 아주 이해 못할 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선생도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엔데의 지적이 예리하고 흥미롭다는 사실만큼은 분명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폐해의 원인이 된 사회의 모순 문제를 좀 더 직설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엔데건 이오덕이건, 어느 작가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무척이나 잘 쓴 "우화"로 본다. 그러니까 시간의 사용, 혹은 인생을 향한 태도에 대한 훌륭한 "은유"로 말이다. 여기서 회색인간, 혹은 시간절약주식회사의 악당들은 어떤 "사회모순"이거나 "물질주의"일수도 있고, 혹은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위협하는 그 어떤 해악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참된 인간성을,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이 우화의 "메시지"가 아닐까? 직설법도 때로는 유용하지만, 항상 먹혀드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은유법도 오래, 또 천천히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거의 30년 가까이 스테디셀러였던 까닭은 --- <삼순이>가 나오기 전부터, 아니 <삼순이> 극본작가조차도 읽었을 정도로 --- 단순한 유행의 차원보다는 좀 더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최소한 이 책을 읽는 데 들인 그 "시간"이야말로 결코 "낭비"되거나 "저축"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지금 이 순간 "즐기고" 열심히 "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5.

결국 나야 그 <삼순이>인지 하는 드라마를 보진 않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니, 거기서 주인공이 이 책을 고르는 장면이야말로 극의 전개에 있어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그리고 의미심장한 장면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엔데의 책을 "읽은" 독자 겸 시청자들에게만 국한된 또 하나의 "숨은 재미"였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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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즈마리 > 시간을 위해 싸우는 환상여행
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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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좋다, 좋다 얘기는 들었지만, 기대 이상이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간, 이야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을까.

시간?!

시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시간은 어찌보면 한정되어 있고 절대적인 어떤 대상처럼 느껴진다. 객관화하여, 시계로 우리는 시간을 재는 것도 아마 그런 까닭일 터. 그런데, 한편으로는 사람마다 각기 느낌에 따라 다른 주관성 역시 갖는다. 공부할 때는 시간이 안 가다가 놀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는 걸 느낄 것이다. (때에 따라 반대인 사람도 있겠지만. ^^:;) 시간이 이 두 성격,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며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의 두 성격을 잘 활용한 책이 바로 <모모>이다.

시간을 아껴야해!! 라고 말한다는 것. 이것은 마치 시간을 은행에라도 맡겨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한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 말이 의미하는 건 뭘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이런 의문이 다시금 들게 만드는 게 바로 이 소설의 미덕이다.

이 소설의 상상력은 한층 더 나아간다. 우리는 시간을 아낄 결심을 하고 미친듯이 일에 열중하는데, 그것이 바로 시간은행 사원들의 방문과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들이 사실은 인간들이 절약한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시간은행 사원들은 시거를 태우고, 대머리에, 양철가방을 가지고 다니면서, 당신은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쓸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고 경고를 하고 시간을 저축할 것을 종용한다. 사실은, 이들이 바로 사람들의 시간으로 살아가는 유령같은 이들. 시거는 시간을 의미하고,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 것은 이들이 스스로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 양철가방은 바쁜 회사원같은 차가운 느낌을 전해준다.

이들과 맞서싸우기 위해 우리의 귀여운 모모는 시간의 원천이랄 수 있는 호라(HORA; 시간이란 뜻) 박사와 느리지만 반시간 후의 미래를 예측하는 거북이 카시오페아의 도움을 받는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바로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정말 우리가 값있게 써야 할 시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반추해보게 된다.

사실 나는 지난 주까지 몹시 바뻐서 책을 읽을 여력이 없었다. 마침, <모모>라는 두꺼운 책이 내게 숙제처럼 주어졌고, 이 책의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도 '서둘러선 안된다. 맛있는 과자처럼 야금야금 천천히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것을 위해 이 책이 두꺼운 모양이다. 우리가 시간낭비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만남들, 행위들이 과연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해볼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

기기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모모. 모모 옆에만 있으면 기기는 모든 창의적인 이야기 놀라운 이야기들을 지어낼 수 있다. 아이들도 그렇다. 모모의 원형극장에만 오면 신기하고 신나는 놀이들을 창안해낼 수 있다. 원형극장이 큰 배가 되고 놀이터가 되고, 실험실이 된다.

우리에게 이야기와 상상의 세계란 어떤 것일까? 시간을 저축하기로 한 기기는 모모사 사라진 후, 부자가 되고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게 되지만, 그에게 남는 것은 자기 자신 기기가 아니라, 시간의 노예이다. 바쁜 생활 속에서 상상의 세계나 창조적인 세계는 사라진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이들은 학습능력 향상을 위해 카드놀이 등을 배우지만, 자신들의 창의력은 말살되고 고갈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세계는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오히려 느리게 감으로써 빨리 갈 수 있다는 그런 세계에서나 가능한 게 아닐까?

마치 시간에 얽매인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작가 미하엘 옌데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이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메세지 뿐 아니라 상상력을 인도받는다. 정말 우리가 필요로하는 멋진 세계는 여기가 아닌 어떤 상상의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

사람?!

어떤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고, 시간을 잘 소비하는 사람일까? 이 책의 또 다른 주제는 여기에 있다. 타인의 말을 정말 '잘 들어 줄 수 있는' 모모같은 사람. 모모는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지만,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스스로의 해결책을 찾아내거나 화해를 하고 행복해질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모모가 무한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모모에게만 이런 무한한 시간이 있다는 건 분명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타인의 말을 들어줄 준비를 한다면, 세상은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워 질 텐데...

도로 청소부 베포 할아버지도 그런 멋진 사람 중 하나이다. 전체 도로를 다 쓸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이걸 언제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 번 쓸고 한 번 숨을 쉬고, 한 번 쓸고 한 번 숨쉬고 하면서 순간을 즐기다 보면 어느 새 도로가 다 깨끗하게 되어있다고 말하는 베포.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지금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과연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내가 바라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멋지게 살아갈 것인지. 미래를 위해 쓸 것인지, 현재를 위해 쓸 것인지. 현재를 보다 값있게 쓰고 있다면, 어쩌면 모모가 본 그 아름답고 멋진 꽃을 우리가 볼 수 있지나 않을까 한다.

H's essay

 

 (* 책에 초등학교 5학년 부터라고 적혀있더라구요. 아이들이 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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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설박사 > 좋은 풍경이고 싶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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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본다. 이는 동일한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는 물건을 찾는 사람이 등잔 밑에는 분명히 그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선입견이나 생각 없이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시각 정보만을 의지해서 사물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심 없이 세상을 보기란 쉽지 않다.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생각한 대로 사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 사십에 집을 팔아 해외 여행을 떠난 김형경의 여행기를 통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떠난 김형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이었고 그가 본 풍경도 사람이었다. 사람들이라면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고작 사람을 보고 왔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사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에펠탑과 융프라우를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여행기라면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위대한 인류 문명의 소산이 김형경의 눈을 채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안에 초라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그리고 그들을 통해 비춰본 김형경 스스로의 모습이 보였을 뿐이다.

아마 말과 글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이었기 때문에 김형경이 사람을 더 세밀히 볼 수 있었고, 내면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는 마음을 대변하기보다는 위장하는 데에 더 익숙하다. 그럴싸한 말로 스스로를 포장해버리면 인간의 마음은 더 깊은 수면 아래로 숨어버린다. 김형경의 모습을 보면 마치 엄마가 말 못하는 아이를 주의 깊게 보는 것처럼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눌 수 있는 말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상대방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타인과 자신의 본질에 좀 더 접근하려는 용기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사람의 행동과 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심리와 지나온 삶을 판단해 버리는 김형경의 명백한 판결에 좀 섬뜩하기도 했다. 마치 나도 그녀 앞에 선다면 부끄러운 과거가 모두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모자란 모습은 부족한 과거 때문이라는 정신 분석학자들의 주장에 나름대로 항변하고 싶기도 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벽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흠이 있고 완전치 못하다. 사랑과 질투, 평안과 우울, 인정과 시기심은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유아기 때 형성된 인간의 심리가 무의식의 영역에 숨어서 의식의 영역으로 넘어오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의식의 영역에서 삶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 자신이 아닐까. 나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형경의 정신 분석이 밉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연민 때문이었다. 개인의 행동과 말 이면의 인간 본성을 까발리기보다는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어둡고 아픈 순간들을 감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김형경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감과 연민은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상처를 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하여 화해의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게도 몇 번의 해외 여행 경험이 있다.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고 주로 선교를 목적으로 한 여행이었다. 한번은 태국 한 대학교 내에서 전도를 하다가 기독교 동아리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멀고도 더운 나라에 와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 중 한 학생이 웃으면서 내게 뭐라고 말했는데 내가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메모지에 이렇게 써 주었다. "Your life encourages us very much."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그 말을 기억 속에서 꺼낼 때마다 내면의 떨림이 있다. 마치 위대한 예언처럼 그 말이 내 인생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은 사람 풍경인 듯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람만이 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하늘의 영롱한 별이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절벽,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는 폭포, 황량한 사막과 신기하게 생긴 모든 생물들 역시 그것이 존재하기 전에 조물주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소산 역시 그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 내면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 보는 것은 어쩌면 그 모든 아름다운 것과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의 형성 이전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바로 사람 풍경이 흥미 있고 가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다른 이들에게 과연 나는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진다. 정말 마음으로 바라기는 좋은 풍경이고 싶다. 지쳤을 때 와서 쉴 수 있고, 방황할 때 길을 안내해주며, 낙담했을 때 격려해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풍경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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