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설박사 > 좋은 풍경이고 싶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본다. 이는 동일한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등잔 밑이 어두운 이유는 물건을 찾는 사람이 등잔 밑에는 분명히 그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런 선입견이나 생각 없이 사물을 볼 수 있다면 시각 정보만을 의지해서 사물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심 없이 세상을 보기란 쉽지 않다.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바로 생각한 대로 사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이 사십에 집을 팔아 해외 여행을 떠난 김형경의 여행기를 통해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떠난 김형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이었고 그가 본 풍경도 사람이었다. 사람들이라면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고작 사람을 보고 왔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사실 이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에펠탑과 융프라우를 호들갑스럽게 떠드는 여행기라면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위대한 인류 문명의 소산이 김형경의 눈을 채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안에 초라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 안에서 흘러나오는 인간의 여러 가지 감정, 그리고 그들을 통해 비춰본 김형경 스스로의 모습이 보였을 뿐이다.

아마 말과 글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이었기 때문에 김형경이 사람을 더 세밀히 볼 수 있었고, 내면의 이야기에 좀 더 귀 기울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언어는 마음을 대변하기보다는 위장하는 데에 더 익숙하다. 그럴싸한 말로 스스로를 포장해버리면 인간의 마음은 더 깊은 수면 아래로 숨어버린다. 김형경의 모습을 보면 마치 엄마가 말 못하는 아이를 주의 깊게 보는 것처럼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눌 수 있는 말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상대방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에 반응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까지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타인과 자신의 본질에 좀 더 접근하려는 용기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사람의 행동과 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심리와 지나온 삶을 판단해 버리는 김형경의 명백한 판결에 좀 섬뜩하기도 했다. 마치 나도 그녀 앞에 선다면 부끄러운 과거가 모두 발각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모자란 모습은 부족한 과거 때문이라는 정신 분석학자들의 주장에 나름대로 항변하고 싶기도 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완벽한 환경에서 완전한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흠이 있고 완전치 못하다. 사랑과 질투, 평안과 우울, 인정과 시기심은 수시로 그 경계를 넘나든다. 유아기 때 형성된 인간의 심리가 무의식의 영역에 숨어서 의식의 영역으로 넘어오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의식의 영역에서 삶을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그 자신이 아닐까. 나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형경의 정신 분석이 밉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연민 때문이었다. 개인의 행동과 말 이면의 인간 본성을 까발리기보다는 숨겨져 있을지 모르는 어둡고 아픈 순간들을 감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김형경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감과 연민은 스스로를 치유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상처를 준 세상과 사람들을 향하여 화해의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게도 몇 번의 해외 여행 경험이 있다. 단순한 여행은 아니었고 주로 선교를 목적으로 한 여행이었다. 한번은 태국 한 대학교 내에서 전도를 하다가 기독교 동아리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멀고도 더운 나라에 와서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 중 한 학생이 웃으면서 내게 뭐라고 말했는데 내가 잘 못 알아들었다. 그러자, 그 학생이 메모지에 이렇게 써 주었다. "Your life encourages us very much."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나는 그 말을 기억 속에서 꺼낼 때마다 내면의 떨림이 있다. 마치 위대한 예언처럼 그 말이 내 인생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가장 기억에 남는 풍경은 사람 풍경인 듯하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람만이 남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하늘의 영롱한 별이나 기이하게 생긴 바위와 절벽,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는 폭포, 황량한 사막과 신기하게 생긴 모든 생물들 역시 그것이 존재하기 전에 조물주의 마음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인류 문명의 소산 역시 그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했을 것이다. 인간 내면의 마음을 직접 들여다 보는 것은 어쩌면 그 모든 아름다운 것과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의 형성 이전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바로 사람 풍경이 흥미 있고 가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끝으로, 다른 이들에게 과연 나는 어떤 풍경일까 궁금해진다. 정말 마음으로 바라기는 좋은 풍경이고 싶다. 지쳤을 때 와서 쉴 수 있고, 방황할 때 길을 안내해주며, 낙담했을 때 격려해 줄 수 있는 그런 좋은 풍경으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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