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지의 두 여자
강영숙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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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숙 작가의 [분지의 두 여자]를 읽었다. 십여년 전 쯤 생명윤리 강의를 준비하면서 ‘체외발생’이라는 낯선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인공수정이라는 포괄적 개념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좀 더 세분하게 구분되는 수정 방법과 왜 다른 방법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어떤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야 당연히 인공수정을 고려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외발생은 정말 낯설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체외인공수정을 위해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체취하고 수정란을 만들어 아기의 모태가 되는 자궁에 착상을 시켜야 하지만 체외발생에서는 인공자궁과 고도로 발달된 인큐베어터로 아예 여성이 몸이 아닌 인공적인 기구로 아기를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SF 장르소설에나 나올 법하 얘기인가 싶은데, 전문적인 학술서적에 버젓이 향후 인큐베이터 기술이 더 발전한다면 언젠가는 체외발생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물론 당연히 윤리적인 문제와 결부된 법적인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체외발생에 대한 설명을 읽는 순간 더 오래전에 보았던 ‘아일랜드’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생명 연장을 위해서 장기를 이식받고자 하는 소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비밀리에 인간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던 공장과도 같은 거대한 실험실에 체외발생의 이론을 현실화시킨듯한 수많은 인큐베이터에서 아기들이 탄생되고 양육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인공수정으로 인해 발생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 중에서 일반적으로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다양한 경우의 수가 발생된다. 임신이 불가능한 불임부부들의 위한 획기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가장 먼저 정자와 난자를 인위적으로 체취함으로서 여성의 몸에 위해를 가하게 된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대체 언제부터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인기에 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는 순간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모든 인공수정은 불법을 넘어 살인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세계의 인공수정기술이 가능한 나라에서도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상태를 인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법률을 적용시키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러한 첨예한 논쟁은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킬 과학적 방법이 생겨나기 전에는 논의할 필요조차 없던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윤리적인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될 것이다. 


저자의 소설에서 체외인공수정으로 발생될 문제 중에 대리모와 관련된 일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체외인공수정은 배우자 간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변수와 문제들이 발생되지만, 배우자가 아닌 비배우자의 정자와 난자를 이용하거나 그 가운데 대리모를 이용해 출산을 하게 될 경우에는 상당히 복잡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불임의 원인이 남자이냐, 여자이냐에 따라서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익명의 누군가의 정자와 난자를 증여받아 체외인공수정을 하게 될 경우에 태어날 아기에게는 생물학적 아버지와 사회적 아버지 혹은 생물학적 어머니와 사회적 어머니 이렇게 다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발생된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두 가지 수에 불과하지만, 어머니의 경우에는 소설에 나온 것처럼 희우가 익명의 난자를 공여받아 남편의 정자와 수정하고 진영의 몸을 통해 출산을 하려고 계획했기에, 그렇게 태어난 아기에게는 생물학적 어머니인 익명의 누군가, 출산을 한 어머니 진영, 그리고 사회적 어머니인 희우까지 세 명의 어머니가 생겨나게 된다. 나중에 아기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기원을 알고자 했을 때 생겨나는 혼란을 대체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려주지 못한다.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샤우와 진영은 서로 다른 계기로 대리모가 되기로 결심을 했지만 결국 둘 다 아이를 낳는데에 실패하게 되고, 코디네이터를 통해 철저한 계약에 합의한 이들은 의뢰자가 원하는 충분한 조건을 이루지 못하다고 생각했을 때는 태어날 아기를 차갑게 외면하게 되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렇게 아기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차라리 몰랐더라면, 과학의 발달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언젠가는 아니 어쩌면 벌써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될 소지가 충분한 대리모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리모라는 선택을 하게 된 샤오와 진영의 기구한 사연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그러한 삶의 사연이 남의 이야기 일때와 나의 이야기 일때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 주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선 애끓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온전히 그 아픔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벌처럼 남아있기 마련인데, 나의 삶 만큼은 무탈하게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일까. 아마도 오민준이 쓰레기 수거를 하다가 발견한 바구니에 담긴 갓난아기를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집으로 데려간 것은 그렇게 아기를 버려도 되는 것처럼 여겨온 누군가의 오만함을 대신 속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쓰레기산이 생겨 오물과 악취의 한 가운데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존재함에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이유는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 터무니없는 비율로 아주 소수의 누군가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이라고 시편 저자가 노래했는데 나는 그 중에 몇 시간이나 고통의 짐을 나눠지었을까 생각해본다. 


“진영은 죽은 딸 때문에 대리모가 되는 사람이다. 아침에 집을 나간 아이가 저녁이 되어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는 것과는 다르다. 살면서 도저히 겪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40)”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이규도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억울함도 애틋함도 결국은 시간이 다 잔인하게 뭉개버린다는 것을. 윤재는 돌아올 수 없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자는 동안만큼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납처럼 무거운 눈을 뜨는 순간부터 기억은 작동하기 시작한다.(147)”


“민준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어디서 왔든 어디로 가든,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우리가 태어난 이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우리는 늘 우리가 태어난 자리의 상식과 인식의 틀 안에 존재할 뿐이다.(222)”


#강영숙 #분지의두여자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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