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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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 작가의 [수면 아래]를 읽었다. 얼마전 종영한 ‘나의 해방일지’에서 질리도록 말이 없던 구씨와 3남매의 아버지 염제호가 나오는 장면을 글로 쓴다면 이런 느낌일까. 해인, 우경, 성규, 장미, 유진 그리고 환희라는 꼬마 아이까지 등장인물은 그렇게 많지 않고 때로는 따분함이 느껴질 정도로 격동치는 사건조차 하나 없다. 너무나도 잔잔하고 희미해서 졸음이 올 정도이다. 하지만 평화로워 보이는 수면 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잔잔한 모습의 수면에 이르기까지 어떤 격랑을 겪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만 아는 슬픔의 시간, 오롯이 스스로 견뎌내야만 하는 지독한 고독의 시간을 수면 아래에 감춘 채 해인과 우경의 서사가 조금씩 펼쳐진다. 이야기 속에서는 해인과 우경이 예전에 결혼한 부부 사이였음을 알려주지만 그들이 왜 헤어졌으며 지금은 어째서 친구처럼 지내는지, 우경은 하노이에 가서도 왜 해인에게 지속적인 사랑의 고백을 하는 것인지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고뇌속에 술 한 잔을 들이키는 근심이 가득한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며 막연히 염려하는 것처럼, 독자에게도 해인과 우경의 사연을 시시콜콜 알려고 하지 말고 그저 방관자처럼 지켜봐 줄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해인이 일하는 곳은 중고물품을 다시 깨끗이 닦아서 파는 해동중고라는 곳이다. 해인과 사장과의 대화는 사뭇 노사관계의 전형적인 틀을 벗어난 것처럼 그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한 장소를 함께 공유한 것처럼 비춰진다. 그들에게 일할 곳을 공유한다는 것은 마치 중고물품을 깨끗이 닦는 것처럼 함께 일하는 데 방해가 되는 불필요한 감정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새로운 주인을 만나는 것과 같다. 사장이고 직원이지만 그저 이곳을 스쳐지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외딴 곳에 있어서 그런지 한적해 보이는 해동중고의 주차장에는 마을 아이들이 종종 놀러온다. 그리고 그 무리 중에 유난히 해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아이는 환희이다. 다른 아이들은 그냥 환희와 등장한 주변 인물에 불과하지만 환희는 혼자서도 공터에 놀러와 해인이 팔기 위해 준비한 물품들에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해인에게는 동네 친구라 할 수 있는 장미씨가 있고, 우경과 함께 오래된 친구인 성규까지 종종 해인의 적적함을 달래준다. 그들은 특별할 것도 없는 우동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치킨집에서 닭에 소맥을 마시며 회포를 풀고 갑자기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해인은 마치 감정의 파고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해인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이들 또한 해인의 감정을 도발시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애써 단어 하나 하나를 심혈을 기울여 골라낸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상대가 대답을 빨리 하지 않아도 보채지 않고 묵묵히 먼산을 쳐다봐도 기다려준다. 말하고 싶지 않는 질문에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딴 얘기로 돌려도 처음 하려고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는다. 해인의 주변 인물들은 마치 운명 공동체처럼 엄청난 태풍과도 같은 큰 재난을 이겨낸 것처럼 우리가 평소에 예민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해인과 우경의 수면 아래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비슷한 일을 겪고 나서야 어떤 특정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해도 그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누군가는 극심한 트라우마로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훌훌 털고 일어나는 사람도 있다. 반대로 누군가는 아주 작은 일에도 행복하고 만족해하지만, 반면에 소확행 따위는 관심도 없는 사람도 있다. 이런 다름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면 언제나 누군가를 평가하게 된다. 한 사람이 살아온 인생의 수면 아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한 개인의 역사에는 어떠한 절대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해인과 만난 사람들 특히 하노이에서 전해오는 우경의 메일이 더 애잔하게 느껴진다. 


“아침부터 김치를 담그느냐 마느냐 상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대로변 마트에 나가 총각무를 사가지고 들어와 다듬고 씻고 절이고 양념을 만들어 버무린 것치고는 소박한 양의 김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김치 한 통을 만들기 위한 일들. 이렇게 하여 밥을 먹고 김치를 먹고 사는 것. 하루가 다 간 느낌이었는데 엄마가 먼저 하루가 다 갔다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느꼈지만 괜히 아직 여섯시밖에 안 되었는데? 라고 말해보았고 엄마는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다 간거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도 거의 다 간 거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지나지 않았으나 다 지나가버린 거라고 생각하는 하루하루를 살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인가 생각하며 초록색 둥근 컵에 믹스커피 봉지를 뜯어 쏟았다.(42)”


“우리는 언젠가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요즘 나는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야만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냥, 난 우리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각자의 자리에서, 많은 순간에, 정말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지금 내게 남은 마음은 그것뿐이라고, 구도심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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