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8
이장욱 지음 / 민음사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장욱 작가의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8번째 작품이다. 2005년에 나온 작품으로 20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스크린 도어가 없는 지하철 승강장이 몹시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당시에는 아직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기 전이었고, 소설의 소재가 된 것처럼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저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가 간간히 전해지곤 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끔찍한데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던 이들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소설에는 7월말 더위가 한창일 때 일주일 동안 동일한 지하철 여게서 일어난 세 번의 투신 사망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미 마지막 죽음 이후에 그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일지 의문을 제기하며 한 여성의 비롯되었다는 조금은 의아한 추리가 시작된다. 


통상적인 추리소설로서 지하철 승강장에서의 죽음을 소재로 선택했다면, 응당 자살이라면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경위를 쫓아가게 될 터이고,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었다면 범인을 색출하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탐문조사부터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러한 통상적인 추리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동일한 지하철 승강장에서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몸을 던진 이들은 객관적인 연결점을 갖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교차점으로 등장하는 로또 복권이 없는 복권방을 운영하는 왼팔이 없는 할아버지는 결국 그렇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세 명의 죽음을 자신이 어이없게 넘어지는 행동을 통해 연결시킨다. 가장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한 여성이 자폐아 판정을 받은 아이를 좀 더 일찍 병원에 데리고 갔더라면 이명과 두통을 일으키지 않고 들어오지 않은 열차에 몸을 싣는 허망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텐데. 그렇게 다리를 헛딛고 달려오는 열차의 유리에 부딪힌 여성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환상을 보는 기관사는 며칠 쉬라는 동료들의 말에도 괘념치 않고 바로 출근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곡선 주로를 달릴때 행여나 사람들이 달려나올까봐 경적을 울리는 심성을 가지고서는 기관사 일이 어울리지 않는 동료들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텐데. 아내를 허망하게 떠나보내고 아이와 더불어 애정을 갖고 키우던 치와와를 남자가 들어서 창밖으로 내던지던 순간 복권방을 운영하던 할아버지가 그것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기관사의 대학 동기와 기관사의 예전 애인이었던 선배가 기관사 도천의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재회하여 하루밤을 보낸 후 추억을 떠올리지 않고 그냥 택시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갔더라면 할아버지는 선배와 부딪히지 않았을텐데. 그렇다면 흔들리던 할아버지가 백수였던 청년이 안고 있던 비글의 눈을 보고 무너지지 않았을텐데. 


죽음을 맞이한 세 명의 사람과 지하철 승강장에서 살아남은 세 명의 생존자들은 그 죽음의 사건과 직접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보이지만 그들 삶에 들이닥친 우연성은 일주일 동안 벌어진 자살 사건으로 추정되는 세 번의 죽음에 얽혀버리고 만다. 나이가 들수록 후회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때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런 만남을 갖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으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지금과는 다른 말과 행동과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또 다른 삶의 우연성이 개입하여 또 다른 후회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순간 냉철한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신봉하지만, 막상 지금까지 내가 살아낸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도저히 나의 이성만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만연해 있다.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겪어왔던 삶의 시간들처럼 말이다. 


“인생의 모든 것이 기이한 타이밍에 이루어진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치여 있다가 갑자기 자기 죽음 같은 것을 맞닥뜨리면,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그제야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생 동안 돈을 벌기 위해 보낸 시간들, 다른 이의 허점과 약점과 단점에 대해 떠들면서 보낸 시간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며칠이 지난 후에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 사건들. 그런 것들이 문득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것을 허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만, 그런 것이 삶이라면 허무야말로 인생 자체이자 인간의 역사 전체가 아닌가.(82)”


“식장은 이틀 내내 한산했다. 한 인간이 지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남자는 약간의 비감에 젖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 죽음인데,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무수하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 죽음인데,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남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빈 객실이 거의 없었다. 안내 전광판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었다. 방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어떤 방에는 초저녁부터 고스톱 판을 벌인 사람들이 한 켠에 모여 있었다. 쓰리고에 피박을 외치는 중년 사내들의 고함 소리가 간헐적으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웃음소리가 뒤따라 몰려나왔다. 누가 죽든, 생전에 알던 사람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 잠시 병원에 들러 조문을 한다. 조문을 마친 뒤 육개장을 먹고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 판을 벌인다. 조문객들은 이윽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귀가하고, 잠이 들고, 깨어나고, 다시 생을 계속할 것이다. 죽은 이가 바라보던 거리와 죽은 이가 왕래하던 건물들과 죽은 이가 잠자던 방 역시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어떤 시간도 어떤 공간도 전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자의 비감은 깊어졌다. 갑자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제 지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린 여자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