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년
이희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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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주 작가의 [성소년]을 읽었다. 제목과 표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은 뭔가 예기치 않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해준다. 스토킹의 비극적 집착의 끝을 보여준 ‘미저리’라는 영화 덕분에 최애를 자기만의 것으로 만드려는 욕구가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선택인지 이미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보여준 요셉이라는 아이돌에 대한 안나, 미희, 나미의 광적인 집착은 이미 그들에게 결핍되어 오래 축적된 내적 공허함이 구체적 사랑으로 드러날 때의 광기를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영화와는 또 다른 묘미와 긴장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요셉에 대한 광기로 인해 어이없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을 두 명이나 죽이게 되었음에도 과연 그들을 파괴적으로 만들어간 과거의 상처와 결핍들이 무엇인지 산장에서의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사랑에는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특히나 요즘처럼 트로트가 대세인 시대에는 예전처럼 누구누구의 팬이 된다는 것은 단지 유년기 시절의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중년의 누군가도, 노년의 누군가도 열성적인 팬이 되어 조공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최애에게 열과 성의를 다해 집중한다. 최애를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광팬이 된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뭐하러 그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굿즈를 사고 비싼 콘서트를 몇 번씩이나 가느냐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왜 그렇게 최애를 좋아하고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아끼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대답을 한다. ‘최애가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기 때문이라고’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있는 사람들도 비슷한 대답을 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최애를 통해서 얻게 되는 만족감과 기쁨은 가족이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얻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행복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공리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그런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애에 대한 욕구가 선을 넘게 되면 이 소설과 같은 사태가 생겨날 수 있다. 안나는 이미 남편과의 유학 생활 중에 무료한 나날을 위로받기 위해 몸을 파는 미소년과 관계를 맺게 된다. 자신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젊은 육체에 대한 탐닉은 돌아와서도 멈추지 않는다. TV를 통해서 본 요셉의 춤추는 모습은 유럽에서 만났던 미소년과 오버랩되어 요셉의 공연장을 맴돌게 만든다. 그곳에서 미희와 나미를 만나게 되고 그들은 요셉을 자기들만의 최애로 만들기 위해 납치 계획을 세운다. 아주 오래전에는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었다. 그렇지 않는 사람도 첩이라는 이름으로 아내를 둘 이상 두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대한 윤리적 기준이 높아져 첩을 두는 사람은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갑자기 신의의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폴리아모리라는 원래 폴리가미(일부다처제)에서 파생된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연애 형태가 조금씩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결혼에 대한 거부감은 비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고 비혼이라고 해서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며, 이성간의 사랑 뿐만 아니라 동성 간의 사랑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젠더 의식이 확대되어 폴리아모리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속성 중에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랑하는 대상을 독점하고 싶은 욕구와 그 대상의 내밀함을 차지하고 싶은 욕구가 상당히 강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람피는 사람을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나와의 친밀함으로 만들어진 속내를 또 다른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질투와 시기를 유발시킨다. 그런데 폴리아모리에서는 그런 질투와 시기를 용인할 수 있다는 쿨함을 보여준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런 내밀함의 욕구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종종 발생되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가 다른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고 이유없이 짜증이 나기도 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요셉을 함께 납치하여 산장에서 한달 동안 먹이고 씻기고 돌보며 최애를 독점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지만 결국 그 산장을 찾은 주인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우발적인 살인과 그 손자를 찾기 위해 온 친구들이 차를 훔쳐 돌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차주를 찾으러 온 경찰을 또 다시 죽이게 되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온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더욱 충격적인 결말은 이미 요셉이 기획사의 시나리오로 살인 연극이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된 후 요셉의 시신을 발견한 세 명의 여자가 요셉의 시신을 돌보며 환각 상태에 머물러 있었음이 밝혀진다. 최애의 부재에 이르러 미희와 나미가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려는 모습은 결국 요셉이 없이는 그들이 살 이유가 없다는 안타까운 결말을 보여준다. 이들의 집착과 광기는 정말로 사랑이었을까?


“괜찮은 인생이란, 광고에서처럼 매일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행복이 늘어서는 거였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의 행복은 메마른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아서, 눈알이 아프도록 혀를 내밀고 지켜본 끝에야 간신히 한 방울을 맛볼 수 있었다. 엄마는 그 갑갑한 기다림을 참지 못했다. 그렇다고 순리가 이끄는대로 천천히 말라죽어가는 것도 견디지 못해서, 차라리 화끈하게 혀에 불을 지르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런 인간형은 미희와 길거리를 전전한 여자애들 중에도 있었다. 물론 정말 오갈 데 없는 애들도 있었지만 사정이 괜찮은 애들도 많았다. 멀쩡한 애들이 단 몇 초 지나가는 요셉을 보기 위해 길바닥에 쪼그리고 있었다. 맨바닥에서 자고, 수풀에 들어가 오줌을 누고, 서로 맞고 때리면서 요셉의 주위를 얼쩡거렸다. 그들은 열 길 물속보다 여러운 한 길 사람 속을 알고 싶어했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지루해 미칠 것 같던 순간에 요셉이 눈앞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쏟아붓는 것만큼 괜찮은 자극도 없었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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