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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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의 [일기] 에세이를 읽었다. 아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지금도 매일 매일 일기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기록하는 과정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이들은 귀한 시간을 내어 그렇게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저자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보았는데, 첫 번째 에세이를 이렇게 솔직하게 심지어 [일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생각과 삶을 낱낱이 드러낼 수 있다는 용기에 감탄을 넘어 경외의 마음까지 든다. 일명 ‘소신’이라는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기가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다.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면 조금 수월할지 모른다고 성급하게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남들이 보아 잃을게 없어 보이는 사람도 그나마 갖고 있는 것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성향이나 정의로움에 대한 일관된 반응들은 사회생활이라는 명목하에 타협과 방관을 종용하곤 한다. 그리고 급기야 지금의 생각과 의견을 철회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조장하는 말을 듣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일탈과 같은 행동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오랜시간 지켜왔던 내면의 보물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껍데기만 남은 모습으로 여생을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비관적, 염세적 생각에 치우친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근래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철저한 규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숨으로 현실을 마주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이렇게 용기백배의 글을 잃을 때면 소시민처럼 자신을 억누르고 살기 위해 헌신짝처럼 버려두었던 내면의 보물을 되찾은 기분이 들게 된다. 보편적 행복과 소위 평범하게 사는 일상을 선택하지 않고 마비가 올 정도로 글쓰기에 몰입하며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번 에세이를 읽으며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정의로움에 대한 열정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비겁함이 떠올랐다. 비겁함은 참으로 쉽다. 마치 리모콘으로 TV를 켜고 수백개의 채널을 돌리며 시간을 때우듯이 나의 생각과 의식의 흐름을 잠재운다. 그리고 의미없는 시간을 소비하며 문제의 중심에서 나를 회피하게 내버려둔다. 그래서 이렇게 온 세상의 눈과 얼음을 녹일 정도로 뜨거운 글을 읽을 때면 가슴이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프다. 비겁하게 지내온 시간에 대한 변명을 한참이나 써 내라는 요구를 듣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세월호가 침몰한 장소가 진도 부근이니 모뉴먼트는 거기 설치하라고, 그것이 마치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공평한 의견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참사나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장소에 모뉴먼트를 세워 제대로 기억하고 재발을 경고하는 일에 늘 소홀했던 이 사회의 사정을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의견이다. 나는 그런 의견들에서 어찌되든 알 바냐, 사라져버리라고 말하는 악의마저 느낀다. 세월호 침몰은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고 끝난 사건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도와 안산에서 전국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사건이므로 나는 산보하는 길에, 산보하는 길에도, 그 기억들을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을 생각하고 다음을 생각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게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13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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