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을 읽었다. 1980년대 후반에 ‘주간 아사히’라는 잡지에 1년 동안 연재했던 글의 모음집이다. 소설과는 확실히 구분되는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고 있노라면 그야말로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막나가는 방종의 느낌은 아니고 하루키 스스로가 자유로움을 영위하는 세계 안에서의 질서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이야기에 나오는 소재들은 뭔가 상당히 아날로그이지만 일본 문화가 우리나라보다 조금 앞섰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80년대의 일본과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영원한 승자는 없는듯 이제는 우리나라의 문화가 오히려 일본 대중문화를 선도할 정도라고 하니 시대의 변화는 알 수 없는 것 같다. 

에세이에 나온 소재들은 연속성이 없어 매번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다소 황당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사고체계가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에는 국적와 인종을 떠난 인간 본성에 대한 공통적인 사고가 통용되었는데, 에세이에는 그의 사생활이 어느 정도 관계되기 때문인지 가끔은 뜬금없이 느껴지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키만큼이나 그의 이야기에 가끔 등장하는 ‘마누라’라고 표현되어 있는 부인 또한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내공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아마도 일본의 지명과 역사 그리고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을 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을텐데, 그런 내용을 전혀 모르니 조금 아쉬웠다. 마지막에 첨부된 번외편 ‘무라카미 아사히도’는 안자이 미즈마루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여인과의 삼자회담인데, 자기들끼리는 무척 즐겁고 재미있어 보이지 않느냐고 대놓고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별 생각없이 휴가를 떠나 때론 카페에서 잠깐 한 편씩 보면 피식 웃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라는 것은 턱하니 의자에 앉아 머리를 텅 비워놓으면 알아서 쑥쑥 앞으로 나아가주니 무척 편하다. 연극이나 콘서트 같으면 ‘오늘은 좀 흥이 덜하지 않나’라든지, ‘어디 불협화음이 나는 것 같은데’라든지, ‘박수는 이 정도면 될까’라든지,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니까 머리를 완전히 비우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기분이 착 가라앉았을 때는 아무 해가 없는 할리우드 영화를 멍하니 보고 있는 게 제일이다. 자극을 받거나 하면 오히려 불쾌해지기도 한다.(30-31)”

“작가가 비평을 비평하거나 그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 변명하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쁜 비평이란 말똥이 듬뿍 들어찬 거대한 오두막과 흡사하다. 만약 우리가 길을 걷다가 그런 오두막과 맞닥뜨린다면 서둘러 지나처버리는 게 상책이다. ‘왜 이렇게 냄새가 나지’라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 말똥이란 원래 냄새가 나는 것이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가는 더욱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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