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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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시간의 경과이며, 슬픔의 색채였다.

 

슬픔이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단지 엷어지는 듯한 인상을 주어 그것으로 위로 삼을 뿐이다.

저들의 슬픔에 비하면 나의 슬픔이란 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가.

근거도 없고. 저들처럼 부조리함에 뿌리를 둔 것도 아니다.

그저 멍하게 지나간다.

다만 어느 쪽이 대단하게 깊다 할 수는 없다.

모두 공평하게 이 광장에 있다.

나는 상상했다.

 

-불륜과 남미 - 요시모토 바나나

-2005. 10. 01. SAT. PM12:27

 

점점 일본소설에 빠져든다.

마음을 착 가라앉게하는 묘한 느낌.

아끼고 아끼고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오랫동안 이 기분을 즐기고

싶었는데 분량도 얼마 많지 않아서 결국 끝을 보고 말았다.

요시모토 바나나 작품중에 단연 최고다.

중간중간에 툭 튀어나오는 강렬한 느낌의 삽화도 마음에 든다.

아르헨티나의 절경을 찍은 사진들은 또 어떻고...

비가 추적추적오는 깜깜한 밤에 읽기 딱 좋은 책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정열의 남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면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이란다.

다양한 유적과 살아 숨쉬는 자연과 울고 웃고 얘기하는 사람들.

열정에 넘치는 탱고 쇼와 화려한 기타의 선율.

내가 그녀를 따라 아르헨티나에 갔다 온 기분이었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아르헨티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여행한

나처럼 아르헨티나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어쩌다 같은 장소에 들렀을 때.

'아, 그 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이쯤에 있으려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날

내가 먼저. 가령 오늘 죽었다면 그는 둘이서 살며 정든 그 방에서

계속 살아가리라. 그는 나의 기척이 구석구석 스며 있는 그 거실에

서. 매일 아침 커피를 끓이리라. 둘이 몫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몫.

그 커다란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남편은 늘 냉장고에서 꺼낸 병에서

커피 가루를 덜어 필터에 담는다. 그 모습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상상했다. 내가 맛있다고 해서. 남편이 항상 커피를 끓여준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칭찬해 주는 이 하나 없는데도, 그 방에서 그 빛

속에서 음악을 쾅쾅 틀어놓고 말없이 맛있는 커피를 끓이리라.

그 광경에. 가슴이 메었다.

그리고 올해 오늘 이 밤. 어렸을 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런

일로 가슴이 멜 수 있는, 이런 순간이 내 인생에 찾아왔다는 것이 그

저 한없이 기뻤다.

 

 

 



 

 

-플라타너스

남편에게 주려고 계란빵을 사고. 누나에게도 선물용을 사 싸드렸다.

중요한 것은 식욕이 아니라, 신경을 써주는 마음이다.

생활에서 그런 것이 사라지면 사람은 점점 탐욕스러워진다.

사람이 마음속의 어둠을 드러낸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눈을 돌려버리기는 쉽지만

더욱 깊은 곳에는 갓난아기처럼 사랑스러운 것이 숨어 있다.

 

 

 




 

-창밖

그와 공유한 몇 안 되는 내 기억 속에서.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늘 저런 자세로 창밖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이 광경에 약하다.

그를 좋아하게 된 것도.

저런 포즈를 곧잘 취하는 사람이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등을 구부리고. 무릎을 껴안고.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밀듯 앉아 있는 저 자세.

 

왜 잊고 있었을까.

왜 소중한 것들은 다들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일까.

 

 

 




 

-하치 하니

세계 어디를 가든 같다.

엄마의 냄새.

조금은 비릿하고, 무겁고, 달콤하고, 한없이 깊다.

역시 엄마는 어느 나라에서나 엄마고,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나는 엄마가 되는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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