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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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표지가 모든 것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파란 파도의 이미지, 그리고 그 끝자락에 이어지는 빨간 심전도 이미지는 죽음과 삶을 명확하게 구분 짓는 동시에 서로 단절되지 않은 그 흐름엔 한 명의 죽음과 한 명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비극과 희극이, 끝과 시작이, 알 수 없는 세계의 우연성과 운명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죽음과 장기이식. 놀랍도록 단순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상황과 인물의 감정, 대화의 확실한 경계가 없고, 단 하루 동안의 시간 안에 벌어진다는 설정이지만 각 인물들의 각기 다른 감정과 상황, 과거의 회상과 현재의 사건을 다루고 있어 긴박함과 생생함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마치 모든 문장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으로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다. 

 그 날, 새벽의 교통사고는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시몽 랭브르에게 그 밤의 서핑이 마지막이었음을 선고한다. 파랗게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역동성과 젊은 청년의 빛나는 생명력이 한 순간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코마 상태로 대치되는 이 비극은 그의 가족 마리안, 숀, 루에게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의미하며 하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끔찍한 과정에 놓이게 한다. 
 아직 아들의 사고 소식을 모르는 남편 숀의 목소리를 듣는 마리안이 지금 그대로의 숀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기회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를 비극적 사건의 현재 속에 끌고 오는 순간과 그들이 직접 만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일련의 순간들은 한 편의 소설이자 극작품, 영화의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또한, 그런 그들에게 장기 기증의 선택을 묻고 답을 받아내는 토마의 상황, 삶과 죽음의 연속성이 뚜렷한 병원에서 생활하는 피에르 레볼, 코르델리아 오울 등의 각기 다른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일상과 비극의 거대한 간극과 밀접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아이러니다. 

 ‘심장’이 의미하는 삶. 전체를 대신하는 부분. 시몽 랭브르의 심장이 언제, 어떻게 뜨거워졌고 그의 여자친구 쥘리에트로 인해 어떻게 녹아내렸는지, 심장이, 시몽 랭브르가 불러일으킨 기억. 죽은 그의 살아 있는 심장은 이제 또 하나의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기 적출과 이식,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 죽음과 삶의 동시성을 보여주는 장기 적출의 과정에서 마리안과 숀의 부탁으로 시몽 랭브르의 귀에 약속했던 읊조림, 기도문을 속삭여주며 그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 파도 소리를 들려주는 순간은 온전한 시몽 랭브르의 모습으로, 살아생전 그가 했던 수많은 순간들과 앞으로 그가 했을 수많은 순간들을 하게 만든다. 

 … 그것들은 다른 육신들을 향해 질주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면 그녀의 아들의 단일성에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만의 특별한 기억과 이렇게 분산된 육체를 어떻게 결부시켜야 할까? 그의 존재, 이 세상에 비추어진 그의 모습, 그의 혼은 또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러한 질문들이 부글거리는 기포처럼 그녀 주위를 맴돈다. 그러다가 시몽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다. 말끔하고 온전하다. 그것은 나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그 아이다. 

 ‘죽음을 전장에 나와 죽음을 맞는 그리스 영웅과 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존했던 장례의식’에 비유되는 장기 적출-복원-이식의 과정은 숨 막히는 수술과정을 보여주며 멈추지 않는 심장 박동의 울림을 들려준다. 죽음의 순간,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식을 결정짓는 순간, 그것이 누군가의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순간에. 

 그 박동은 태아의 심장 박동을, 처음 초음파를 찍을 때 볼 수 있는 그 툭툭 튀는 움직임을 떠올리게 한다. 분명, 지금 들리는 소리는 최초의 박동, 첫 번째 박동, 여명을 알리는 박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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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정원 - 좌우를 넘어 새 시대를 여는 시민 교과서
에릭 리우.닉 하나우어 지음, 김문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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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개의 양극화된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분열과 소통의 부재로 내몰았다. 특히 한국 현대사의 눈부신 성장이라 불리는 발전의 이면엔 급격한 변화가 가져온 세대 간의 극심한 갈등과 도저히 합의될 수 없는 정반대된 선택지만이 놓이게 되었다. 정부의 역할, 시장의 운영방식, 부의 재분배 등 좌파와 우파의 선택지는 극렬하게 대치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에서 우리는 새로운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고, 일차원적인 좌파와 우파 간 선택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표인 이 책, «민주주의의 정원»이 그 새로운 이해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도한 집중이 언제나 전체를 위협한다고 단언한다. … 경제적인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부는 중산층에 의해, 중산층으로부터, 중산층을 위해 생성되어야 한다. 

 가장 먼저, 경제에 있어 가장 심각한 문제인 중산층 몰락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부의 편중, 양극화 현상은 이 책에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언급하듯, 사람을 비롯한 모든 것을 감축해야 할 비용으로 취급하는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현실에서 성숙한 시민의식과 정부의 역할은 힘을 점점 잃어가고 경쟁과 결과에 집착하는 문화에서―모든 행동은, 특히나 친사회적 행동보다 반사회적 행동의 전염성이 매우 높다―소득의 불평등은 영원할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부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며 규제완화와 낮은 소득세 및 상속세를 주장했던 자들은 과거에도 그랬듯 지금도 존재하며 부의 편중을 불러왔다. 부의 편중은 언제나 빈곤의 편중을 부른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이익과 손해가 스스로 강화되면서 집중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 개인이나 집단은 경쟁보다는 협력을 통해 신뢰가 높은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고, 부의 재분배를 위한 정부의 노력은 교육, 건강, 사회적 자본, 재정적 자본에 대한 접근성 등에 있어 공정한 기회를 획득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 극단적인 부의 편중은 아무도 손대지 않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 정원을 망치듯 사회의 번영을 해친다는 저자의 말처럼 낙수효과보다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장악이 더 문제가 되는 이 시점에 정부는 중산층이 번영할 수 있는 미들아웃 경제학Middle-out economics 바텀업Bottom-up형식으로 경제를 키워야 한다. 

 목표는 야심하게, 방식은 창의적으로, 평가에는 가차 없어야 하며 성공의 축적과 실패의 축출에는 적극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정부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생겨날 것이다. 이 책에선 정부의 지나친 규제로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는다거나, ‘규제를 쳐부숴야 할 암덩어리’에 비유할 만큼 모든 규제를 완화해버린다거나 하는 극단적 선택지가 아닌 빅 왓, 스몰 하우 Big What, Small How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즉, ‘무엇What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큰Big 정부, 어떻게How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작은Small 정부’라는 유기적이고 유연한 정부의 역할을 기대한다.

 정원사는 생태계의 역할을 잘 이해하는 한편 자신이 자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란 걸 아는 겸손함을 갖췄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을 ‘가꾸는’ 건 자신의 적극적인 손길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이것이 야생으로부터 정원을 구분지어 주는 것이다.

 또한, 시장이나 국가 어느 한쪽도 사회를 위해 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되는 것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한 시민의식에 대한, 즉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에 대한 주목할 만한 이야기도 나온다. 단순한 투표나 착한 사마리아인의 문제를 넘어서 진정한 사익은 공동의 이익이라는 사실과 다 같이 잘살 때, 비로소 모두 잘살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또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와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책임 가운데에서 거짓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민의식.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라는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입장에서 꽃을 피우고 잡초를 제거하며 물을 준다면 우리의 정원은 정글과는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2016년 촛불혁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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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콤플렉스 - 나는 왜 부족한 엄마인가?
안토넬라 감보토 버크 지음, 신주영 옮김 / 그여자가웃는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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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들의 자궁이 제대로 수축되기도 전에 일터로 돌아가라고 협박하는 지금의 문화에서 어떻게 섬세한 모성애가 발달할 수 있겠는가?

 출산을 포기하고 심지어 결혼도 하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서 일 때문에 임신을 꺼리고, 출산 후 발 빠른 직장으로의 복귀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경제적인 이유든 자신만의 가치판단을 통한 우선순위의 문제든 그 어떤 이유든 간에, 엄마와 아기의 단절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커리어우먼의 이미지가 세련됨과 강인한 여성으로 비춰지는 동시에 집안에서 육아를 하는 여성들의 이미지는 구시대적이고 자신의 인생은 희미해질 것임을 받아들인 나약한 여성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임신-출산-육아의 과정에 있으면서도 일을 하는 여성은 가엾은 이미지로, 그 모든 과정에서 오직 아이에게만 눈을 맞출 수 있는 여성은 여유롭고 부러운 이미지로도 비춰진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축복과 행복이 가득해야 할 출산이라는 경험의 가치가 경제적인 이유로 과소평가되고 있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엔 동의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오직 “잘 나가던 직장에서 잘릴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지 않니?”라는 물음에 대한 답만이 아닌 “아이에게 최고의 것을 해줘야 하지 않겠어?”라는 가슴 아프고 잔인한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불행한 과정에서 여성적인 가치로 평가되던 것들은 모든 곳에서 폄하되었고, 여성들의 성공에 걸림돌이라고 여겨졌다. 잘못된 믿음의 저변엔 미디어―텔레비전―의 영향과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 역시 기계적이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계산적이 되어버린 지금의 결과물이 존재한다. 이렇듯 무자비한 속도의 파도에서 가장 먼저 희생될 수밖에 없는 건 로맨스―사랑은 결과가 아닌 과정 그 자체이므로―이며 협력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문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희생, 세심한 반응, 느리고 깊은 경험 등은 상실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지 못했고 더 많은 돈과 더 좋은 의학의 힘을 빌리면서도 과거보다 형편없는 출산과 양육과 사랑을 하게 되었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출산 연령이 높아지면서 앞으로 25년 뒤에는 3명 중 1명이 체외수정으로 태어날 전망이라는 사실, 늘어나는 제왕절개와 줄어드는 모유수유로 인한 옥시토신의 부재, 언론들이 여자아이들을 성적 상품으로 취급하는 현실, 결혼과 이혼 등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인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들을 언급한다.
 지금의 문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이 형성한 이 비극의 가장 거대한 비극은 바로 그 심각성을 모르는 데에 있다. 과장된 공포나 허영심으로 인해 늘어난 제왕절개와 모유수유 거부―가슴모양이 망가질까봐 모유수유를 거부하는 여성들, 출산 직후, 심지어 임신 중에도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들이 놀랍도록 많다는 사실―,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함께 교감하는 것, 올바른 양육방식에 대한 이해, 마주앉아 식사를 하며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 안정된 애착관계로 인한 적절한 사회적 인간관계는 물질적인 것, 텔레비전, 얄팍한 인간관계로 대체되었지만 아무도 그것들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은 언제나 이혼을 염두에 둔 하나의 상태이며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감각은 대단히 어렵고, 결혼에 필수적이라 일컬어지는 헌신, 인내, 투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의 이런 비관적인 관점엔 그것을 심각하게 지켜보며, 상처받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길 바라는 간절함이 있다. 직장에서의 성공과 높은 연봉에만, 혹은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게만 눈을 돌린 지금―그것을 비난하고 싶은 게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물질적인 것을 최우선의 가치에 두었다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그것이 개인적 이유라거나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의 이유라거나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의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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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5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나는 뚱뚱하게 살기로 했다 - 예쁜과 날씬한을 뺀, 진짜 몸을 만나는 마음 다이어트
제스 베이커 지음, 박다솜 옮김 / 웨일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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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건, 이 책이―뚱뚱한 여자가 뚱뚱하게 살기로 했다고 당당히 쓰인―뚱뚱한 사람들을 위한 변명 혹은 자기위로의 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은 아름다움을 보는 관점을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의 제공이자, 자기혐오에 빠져―그 이유가 반드시 뚱뚱한 몸매일 필요는 없다―포기했던 삶의 수많은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그로 인해 덫에서 나올 수 있는 깨달음이다. 또한 스스로를 사랑함으로써 삶을 더욱 풍요롭게 바꿀 수 있는, 나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전환의 계기이다. 다시 말해, 뚱뚱해야만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책이 아닌, 저자인 제스 베이커의 몸매를 가진 사람이건 지젤 번천의 몸매를 가진 사람이건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다.
 또 한 가지, ‘있는 그대로의 몸을 사랑하라!’는 제스 베이커의 주장에 대해서 말해둘 것이 있다. 그녀의 주장을 얼핏 보면 뚱뚱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몸을 사랑함으로써 그 몸매를 그대로 유지해야 하고―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없고―, 모델 같은 몸매를 꿈꾸며 혹독한 식단관리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한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그 자체인 듯 보인다. 
 하지만 제스 베이커의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뚱뚱한 사람들이―‘뚱뚱함’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예쁨의 기준에서 벗어난 모든 몸매의 사람들, 성적소수자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등 모두를 언급한다―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면 더 이상 공간을 차지하는 것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결점을 가리기에 급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크롭톱을 입고 외출해도 된다’고. 하지만 그녀의 주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이 원한다면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몸매를 가져도 좋다’는 말을 덧붙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의 계기가 다른 사람의 시각을 위해서 혹은 상업적 미디어가 주입한 이미지의 비현실성에 현혹된 것의 결과물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좋다’는 말과 함께. 

 제스 베이커는 이렇게 말한다. 
• ‘예쁨은 돈에 굶주린 개새끼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말이다.’ 
• ‘한때 다이어트를 해야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삶을 나는 지금 113kg의 몸으로 누리고 있다. 핵심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한 건 다이어트가 아니었다는 거다.
그건 오로지 나 자신이었다.’
• ‘잠깐, 오해하진 말라. 깨끗한 식단과 근력운동과 주스 자체엔 잘못이 없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이를 숭배하며 이상적이고 가치 있는 몸매를 갖고자 하는 것 ‒ 그리고 실패하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당근을 먹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고 파이를 먹는다고 해서 인생을 망치는 것도 아니다.’

 거침없는 말투와 솔직함으로 무장한 제스 베이커의 글을 읽다가 문득 그녀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으로 그녀의 이름을 검색했고, 그녀는 예쁘다고 할 순 없지만 당당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울퉁불퉁한 몸에 새겨진 타투와 과감한 패션은 베스 디토를 연상시켰고, 그녀의 글을―애버크롬비 앤 피치와의 전쟁,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몸매에 대해 쏟아지는 미디어, 사람들의 비난의 글―읽는 동안엔 아델과 레이디가가의 일화가―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팝스타 아델의 외모에 대해 ‘뚱뚱하다’는 불필요한 언급을 했다가 사과했고, 올해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 완벽에 가까운 무대를 보여준 레이디가가는 공연 후 자신에게 쏟아진 몸매 지적에 대해 ‘나는 내 몸이 자랑스럽고 당신도 그래야 한다.’, ‘당신이 굳이 다른 사람의 취향에 맞춰줄 필요가 없는 100만 개의 이유를 댈 수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떠올랐다.



 하지만 이런 멋진 여성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언급된 ‘세계적으로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수는 4퍼센트라고 한다’는 말이나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빅브러더»에서 언급된 ‘고장률이 98퍼센트임에도 수익이 나는 장사는 전 세계에서 다이어트 산업뿐이다’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못하며 계속되는 희망과 좌절을 반복하는지를 보여준다. 누구나 외모에 관한 고민을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결점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지만,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연예인 같은 외모를 꿈꾸며 성형수술을 하거나 건강을 잃어가며 다이어트를 하는 현상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무너진 자존감을 잘못된 방법으로 지키려하거나 사람들의 자존감을 자꾸만 무너뜨리는 상업적 미디어에 대한 비판. 몸을 사랑함으로써 일어날 변화들. 장애에 대한 훌륭한 그녀의 생각.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 나는 제스 베이커의 모든 주장을 설득력 있게 받아들이진 않았지만―예컨대, 뚱뚱한 사람들이 의료적 음모의 피해자라도 된다는 양, 크로넛을 사랑하는 뚱보 여자가 몸과 마음의 건강은 미신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비웃고 한 귀로 흘려버릴 거라는 그녀의 말에서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사이에 속할 거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그녀의 많은 주장은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가볍고 쿨한 문체가―훌륭한 번역!―좋았다는 메시지에 대한 그녀의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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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앓이 - 우리 마음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살고 있다
이선이 지음 / 보아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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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 사이에서 맺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마음을 아무 손상 없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다면,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얽히는 관계를 피하십시오. 마음을 당신의 이기심이라는 작은 상자에만 넣어 안전하게 잠가 두십시오. 그러나 그 작은 상자 안에서도 그것은 변하고 말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손상되지 않은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없다면,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불가능함이 아닌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처를 잘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물론, 쉽지 않다는 걸 안다. 상처는 언제나 아프고, 치유는 언제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키니까. 그래서 때로는 상처를 꺼내어 치유하려 들기보다는 그저 묻어두려 한다. 하지만 치유되지 못한 채 파란 멍으로 남은 상처는 끊임없이 마음을 두드리며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려 들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같을 거라 생각한다.

 «마음앓이»는 정신과 의사인 저자를 찾아왔던 많은 내담자들과의 경험을 들려주고 다양한 형태의 상처―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앓이―와 원인 및 치유의 과정을 어렵지 않게 설명한다. 그녀가 분류한 거절감, 분노감, 사랑, 외로움, 집착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살면서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불안,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개성화(individuation)란 그 사람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자신의 목소리(욕구)를 듣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수많은 책에서 강조되었던 양육자(엄마)와의 관계―부모의 적절한 훈육과 통제, 공감과 보상―, 왕따라는 집단폭력, 낮은 자존감―유아 시절부터 미디어의 노출되어 비교의 삶이 시작된 우리는 각자의 개성이 아닌 비교와 경쟁에만 몰두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성숙한 사랑, 외로움―중독(addiction)과 공감(empathy)―,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의미를 통해 깨닫는 삶의 의미 등의 많은 정신과적 문제와 해석,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문제를 겪게 된 상황과 회복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같은 문제를 겪었기에 깊이 공감되는 마음, 나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마음. 세 모녀 사건이나 왕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사례를 보며, 모두가 최소한의 건강―신체적, 정신적―을 지키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나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 책이, 혹은 직접 찾아가는 정신건강 상담이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방법을 제시해주길, 동시에 우리 모두가 치유의 방법을 알고 힘들 때마다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많은 연예인들을 통해 정신과의 문턱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가 두려운 사람들 혹은 과거의 암울한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해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위해―나를 포함한―마지막으로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가해자의 부모 수 클리볼드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 언급한 내용을 옮긴다. 

 “무릎을 다치면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될 때까지 병원을 찾지 않고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신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진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아무도 다친 무릎을 의지와 용기로 낫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낙인을 피하려고 스스로 벗어난 방법을 찾으려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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