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샤워의 기적 - 기쿠치 선생님의
기쿠치 쇼조 & 세키하라 미와코 지음, 임정희 옮김 / 봄풀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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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 제목을 보면서 '말 샤워가 뭐야?'하고 우아해 하면서 펼쳐 들었다.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이쁜 말! '말 샤워'는 그야말로 샤워할 때 한 곳에서 여러갈래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하나의 말에서 여러가지의 다른 말들이 가지를 치면서 쏟아지게 하는 일종의 대화 표현방식이다. 읽는내내 부모들도 꼭 읽어야 하지만 일선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이 필독서로 읽어 보심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게임과 스마트폰을 빨리 접한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때 부터 말이 곱지 않은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아이는 집에선 안그러는데'하고 믿던 엄마들은 아이들끼리 놀 때 쓰는 말들을 들으면 깜짝 놀란다. 또래에서 쓰는 표현을 쓰지 않으면 그것도 몰라?라는 식으로 놀림을 주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아이가 올 해 8살로 학교를 들어가서인지 학교의 첫 문화를 잘 배우고 익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기쿠치 선생님도 에필로그에서 말하지만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습관이 앞으로의 학교 생활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읽을수록 빠져들고 선생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책이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기쿠치 선생님이 6학년을 맡아 한 해동안 '말 샤워'를 통해 변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책이다.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이 온화하고 아늑한 시스템은 아니다. 아이에 대한 학부모의 관심은 도가 지나치고 선생님들은 사건을 만들지 않기 위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방치되고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모든 학교가 이런건 아니지만 간간히 학교에 관련된 뉴스를 보면 여전히 교권 남용과 교실의 교권 추락, 학부모들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자유와 개방을 표방한 교실은 주체가 되는 어른도 없고 좌지우지되고 갈팡질팡하는 교육 시스템으로 인해 혼란스런 아이들만 방치되어 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얼마전에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어느 교인 천재 소녀의 하버드 대학교 거짓말 사건처럼 학력 위주로 몰아가다보니 인성은 온데간데 없고 남보다 뛰어나야 하고 남을 이기려는 심리가 팽배해 진건 아닐까.

여러가지 사회 현실을 제쳐두고 가장 어린 아이들의 학급에서도 대인과의 관계 형성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본 친구들은 티격태격 하다가 자신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서일까 다른 친구의 행동 양상이 조금 틀리면 처음엔 놀리는 듯 시작하다가 여러명이 모이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엄마들은 구태여 아이들이 학교를 들어가면 남자애들은 축구를 무조건 시키고 여자애들도 마찬가지로 뭔가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걸 시킨다. 반 아이들이 전체로 움직이는 시스템. 처음엔 적응도 안되고 깜짝 놀랐지만 밑바탕엔 엄마들의 이런 심리적 불안이 작용한건 아닐까. 어른들은 유별나고 그렇게 키운 것들이 별 거 없다고 하시지만 빠르게 진화하고 빠르게 발전하는 문명에 그대로노출된 아이들은 적당한 잣대로 교육을 받을 틈도 없이 게임을 하고 기계를 조작하며 친구들과 말장난을 시작한다. 그렇게 방치해 온 결과가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다행히 의식있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성을 키우기 위해 노력을 하는 바 여러 대안 학교들이 있으며 이런 류의 책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말 샤워의 장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어휘력의 증진, 친구간의 배려, 문장력 강화 등 이런 것을 토대로 최종의 목표는 토론이 가능하다는 점. 반대 의견을 제시하다보면 어린 학생들인 만큼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워 삐걱대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이면 여러 개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장점을 아이들은 터득한다. 일종의 유대교 교육법 하브루타와 닮아 있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찼다. 선생님의 꾸준하고 소신있는 교육법이 이렇게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구나. 조금만 노력하고 아이들을 독려하면 개인적 편차는 있을 수 있겠지만 대인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남을 배려하는 기본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겠구나. 선생님들도 나름 이론은 알고 있으나 실천 가능한 방법의 부재가 큰 문제가 이닐까 싶다.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만 하기 보다는 빠른 두뇌를 자랑하는 아이들의 실력과 인간 사이의 소통 방법을 나름 알고 있는 기성 세대가 힘을 합쳐 큰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닌가 싶다. 학교가 더 이상 공부만 가르치는 곳은 아닌지 오래되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던가. 희망이 보이는 지금이라도 어른으로서의 몫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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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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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는 시원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고집스러워 보이는 노년의 남자 모습이 그려져 있다. 꽉 다문 입과 치켜 뜬 눈은 오베라는 사람의 성격을 어느정도 가늠하게 해준다고나 할까. 지금 우리나라는 어처구니없는 예방 대책으로 인해 바이러스의 공포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믿을 수 있는 정부의 모습은 고사하고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만 되풀이한다. 답답하고 화가 치미는 이때 접하게 된 소설 < 오베라는 남자>는 잠시나마 곤두선 칼날을 내려놓고 그의 일상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 책이다. 

 

 이런 겉모습의 인물은 일상에서 흔히 보인다. 언제나 불만이 가득한 듯 하고 부딪치기라도 하면 큰소리부터 치는. '오베'처럼 마음이 따뜻할 거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이 각박해져서인지 조그만 일에도 화를 내고 참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요즘은 넘쳐난다. '오베'씨는 툴툴거리기는 하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고 해결책까지 모색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어린 시절을 녹록지 않게 보내긴 했지만 부모님의 나름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그 가르침을 보면서 유년을 보냈기에 비록 가진 것 없고 배움도 길지 못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그 마음이 변치 않게 만든 데에는 아내 소냐의 몫도 컸다. 까칠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선 두 발 멋고 나서서 권력의 상징인 '흰색 셔츠를 입은' 사람들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젊은 시절 누누히 꿈 앞에서 좌절하게 만들었던 '흰 셔츠를 입은 이들!' 화이트 칼라가 권력의 중심이고 그걸 상징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맞설 용기를 준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꿈마저 좌절됐지만 원했던 원치 않았던 오베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만나 여생을 마무리해 나간다.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척 했을 뿐이지 발을 들여 놓기만 하면 불친절하고 복수심에 불타는 로봇과 같은 오베는 어느새 이웃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 이웃으로 곁에 와 있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이웃이 아내의 자리를 대신해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불친절했던 오베의 주위엔 어느새 그를 사랑하는 이웃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오베'라는 이웃이 간절해지는 건, 불친절해 보이긴 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길, 이웃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길. 하지만 그 바램은 물건너 가기 일쑤고 본모습 그대로 이웃에게 삿대질하고 화를 참지 못해서 누군가를 몰아세우는 이웃이고 그런 인물형들이 대다수다. 과거에 비해 분명 생활을 편해졌지만 기계에 의존한 삶이다보니 인간대 인간, 관계 맺음은 현저히 떨어지고 그 현상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이웃에 관심을 갖고 싶지 않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지다 보면 과연 내 주위엔 몇 명이나 남아 있을까? 법정스님이 '여수동좌'를 말씀하셨는데 내가 과연 누군가와 함께 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국가의 재난 제로 시스템으로 인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우리 세대는 전쟁같은 공포를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럴 때 '나만'을 생각하기 보다는 '나로 인해 누군가가'를 생각하면서 각별히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절실한 요즘이다. 오베같은 이웃이 그립고 나 또한 그렇게 되지 못함에 씁쓸하지만 소설로나마 유쾌하게 읽고 덮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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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안성재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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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대가의 사상을 엿본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허나 대화 형식을 빌어 사상과 철학을 문답식으로 풀어써서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읽어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지금 행태는 밑도 끝도 없는 소통없이 자기들 멋대로 나라를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만의 식대로 그들만의 방법대로 살아남고자 발버둥치다보니 성인의 모습은 고사하고 인간본성의 기본 자질마저도 의심하게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그 옛날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도리를 깊이 연구하고 책으로 만들어놓은 성인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고 접했다거늘 오늘을 사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왜 이런 책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눈을 닫고 살고 있는 것일까. 성인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이런 지도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위대한 사상가를 가진 나라들이 참 부러워지는 시간이었다.

  노자와 공자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얼핏 다른 듯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하나의 의미로 귀결되는 걸 볼 수 있다. 우선 노자는 '대동사회로의 복귀'를 꿈꾸며 '삼황(복희씨,여와씨,신농씨)오제(헌원,고양,고신,방훈,중화)'의 인물들을 추앙하며 그 시대로 돌아가는 노력만이 진정으로 백성들이 원하는 사회라 여겼다. 이 시대의 특징은 세습이 아닌 지도자의 인격과 행정 능력만으로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노자가 밝힌 통치 이념은 엄격한 법과 제도를 통제하지 않는'무위자연'이었다. 엄격한 규율이 없어도 큰 존재가 너그러이 감싸니 그 큰 틀 안에서 백성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대동사회의 성인들은 말이나 명령을 함부로 하지 않고 지도자가 말과 명령을 삼가니 백성들은 그저 지도자의 존재만 알고 있을 뿐, 그의 뛰어난 지도력에 대해서는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오. 지도자가 삼가 노력하여 일을 완성하여도, 백성들은 그저 스스로 그런한 것이라고 여겪지 지도자의 공로로 여기지는 않은 것이라오. (p. 99)

 공자는 암흑기인 춘추전국시대 전인 '소강 사회로의 복귀'를 역설했다. 이 시기의 지도자들은 규율을 앞세워 스스로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성들을 통제한 시대다. 노자의 지도자가 성인에 비유된다면 소강사회를 이끌었던 지도자(하나라의 우임금,상나라의 탕임금,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성왕,주공)들은 '군자'의 인간상에 가깝다. 군자란, 옛 성인의 도를 부단히 익히도록 노력함으로써 실천하는 지도자를 말한다. 군자가 이끄는 소강 사회의 큰 틀은 내용과 형식으로 나뉘는데 내용의 요소로는 인과 의, 형식을 이루는 요소로는 예와 악이 있다. '인의예악'으로 통치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인(仁) : 짐심으로 섬기고 따름

의(義) : 목숨을 걸고 계급상의 의무를 다함

예(禮) : 조화로움을 위한 절제와 통제

악(樂) : 조화를 위한 온유함

  노자와 공자는 각자가 추구하는 사회와 그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상은 다르게 생각했지만 그 기본 바탕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조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염원은 같은 맥락이었다. 역사속에 존재하는 지도자는 우리가 염원하고 바라는 인물들이 간혹 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이 나라 최고 통치자는 누구하나 부정,부패와 결탁되지 않은 이가 없고 과거 추한 자신의 조상이 들추어질까 아이들이 배우는 역사를 교과목에서 빼려는 이도 있다.

상생과 복지를 입바른 소리처럼 해대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밥을 서스럼없이 빼앗아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자들이 이나라 기득권층이다. 노자가 말씀하시는 나랏일을 맡은 관료들에게 들려주시는 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지도자의 나랏일을 맡은 관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소. 나랏일을 맡은 관료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상관 즉 지도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금금해하고 또 총애를 얻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실망하는 거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오.

이렇듯 나라를 이끄는 일에 종사하는 자가 자기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자리에 너무 집착하면, 결국에는 큰 불행을 당하오.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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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드 파리 청소년 모던 클래식 1
빅토르 위고 지음, 박아르마.이찬규 엮음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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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르 위고'의 대작은 얼마 전 영화로 선풍을 일으킨 <레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이 먼저 떠오른다. 영화도 영화지만 뮤지컬로 본 기억이 뇌리에 박혀 그 장엄하고 숭고했던 마지막 노래와 '장발장'이 부르는 솔로곡은 잊지 못할 명장면을 연출했다.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노트르담의 곱추'하면 만화로도 본 기억이 있고 여러 영화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그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 <노트르담 드 파리>라면 실질적 묘사를 좀 더 자세히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등장 인물만 알았지 그 속 내용도 사실 정확히 기억하는 바가 없어 적쟎이 부끄럽고 실망스럽던 차, 역자도 밝히듯이 이 책이 워낙 방대하고 문장의 난이도도 높아서 정작 프랑스인들도 읽은 이가 많지 않다고 하니. 이렇게 압축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 싶다.

지금의 인쇄술이야 과학의 도움으로 수정과 인쇄가 일사천리로 움직이지만 그 옛날 이런 방대한 책들은 어떻게 보급되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예전에 비하면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늘 불만이고 더 빠른 세상에 살고자 발버둥치는 요즘의 삶이 과연 행복하긴 한가 싶기도 하다.

  전문을 번역해 놓은 책을 읽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우선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데 알기 쉽게 적어 놓은 책인 듯 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곱추'의 이름은 '콰지모도', 사건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집트 집시여인 '에스메랄다', 신부이지만 자신의 본분을 넘어선 사랑을 하려하는 '프롤로' 부주교.

갈등의 중심엔 이들이 있고 공주이야기에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왕자님같은 인물 페뷔스, 박쥐(?)스러운 인물'그랭그와르'.

1800년대의 소설이지만 21세기에도 먹히는 이야기이며 고전으로 후세에 남겨지는 걸 보면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읽는내내 나 또한 잠시 시대를 망막하고 읽었드랬다.

'에스메랄다'와 같은 여인은 그냥 어여쁜 여자로 보기보단 상징성이 있어 보인다. 극한 상황에 처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면 도움을 받는 이에게는 신보다 더한 존재이며 구원자의 겉모습이 누추한 자신에 비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까? 사실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향한 숭고한 사랑은 충분히 짐작이 가나 아름다움에 맹목적으로 현혹된 프롤로 부주교의 집착적인 사랑과 그의 외모에 극도로 분노를 표출하는 에스메랄다는 사실 이 책만으론 감정을 이해하기가 쉽진 않다. 이 이야기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흥미롭게 읽어내느라 뭔가를 빠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현소설에서도 등장하고 현실에서도 늘 있음직한 인물 '페뷔스'. 자신의 당당함과 젊음, 늠름함을 무기로 온갖 무례를 범하는 바람둥이같은 인물. 아무리 내면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에스메랄다일지라도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무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어찌보면 현실감있고 정감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반전이라면 아마도 긴 시간 죄책감과 자괴감에 기도로 연명하던 미친 수녀가 되어가는 여인. 그녀와 에스메랄다의 관계가 반전이라면 반전. 고전 소설에서도 여러 장치가 있어 지루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쉽게 읽히고 책이 끝나갈수록 원본에 가까운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떨칠 수가 없었다. 끝이 보이면서 서운하고 아쉬운 이 느낌.

 대작을 한 눈에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뮤지컬이 아닐까 싶다. 고전이라고 하면 왠지 어렵고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만 스토리에 음악이 가미되면 대중에게 보다 깊이 파고들 수 있고 그 대작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나 또한 런던에서 처음 본 뮤지컬<올리버 트위스트>나 <미스 사이공>등을 잊을 수 없다. 보도록 만들어진 책이라면 물론 책을 통해 보는 것이 전달력도 좋고 방대한 줄거리를 생략없이 볼 수 있어 좋기는 하다. 허나 고전같은 경우 실로 양이 어마어마하고 어려운 어휘 사용이 대다수라면 아무리 좋은 작픔이라도 일반인들에게 다가가긴 쉽지가 않다. 그래서 고전을 바탕으로 한 뮤지컬을 좋아한다. 한 편으론 이렇게 자국의 문학을 알리는 나라들이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좋은 작품이 많이 있겠지만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나 알까 사장되가는 것들이 너무 많을 듯 싶다. 역량있는 사람들이 좋은 고전작품을 발굴해 뮤지컬과 접목시키는 것도 우리 작품을 알리고 우리나라를 알리는데 중요한 역활을 하지 않을까 싶다.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을 기억하면서 아쉬운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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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율도국 - 광해와 허균, 홍길동과 대마도
신용우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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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나라를 책임지는 이도 없고 잘못을 잘못했다 꼬집고 비판하는 이도 없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어도 제 목줄 달아날까 염려하는 탓에 눈치만 보다가 그 자리 보존하고 나오면 연금 받으며 조용히 산다. 자신이 언제 나쁜 일을 했냐는 듯이. 정치판의 공약은 믿을 수 없게 된 지 오래고 어떤 이는 그 공략 실천한답시고 외국인들한테 생돈 대주며 금수강산 다 파헤쳐 놓고도 아무말 없이 쥐죽은 듯이 잘 살고 있다.

혁명! 프랑스의 시민 운동이 생각나고 체 게바라의 그것이 떠오른다. 시대는 틀리고 얻고자 했던 혁명의 결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누구도 인간의 위에 존재하는 이 없으며 모두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음에는 이의가 없다. 현 시대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접하다보면 문득문득 '율도국'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때가 있다.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영화나 소설에서만 가능한 게 아닌가? 어린 나이에 접했던 '홍길동전'은 전래동화 쯤으로 생각했고 최초의 한글 소설로만 알고 있었다. 당대의 지식인이었던 '허균'이라는 사람이 왜 이런 책을 쓰게 되었는지 한글은 아녀자들의 글로만 치부되었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보전되어 살아남았을까. 역사에 대한 궁금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했던가? 간과하고 그냥 넘겼던 일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것들이 역사를 바로보는 시발점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작가님도 한 권의 역사책을 보면서 의문점을 발견하고 연구했던 것이 아닐까.

 왜 역사책을 편찬하는 연구진들은 일발의 의구심도 없이 '광해'를 폭군으로만 묘사했을까?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역사는 책에 근거한 소설같은 이야기였을 뿐 공감가고 의문점이 드는 일이 그다지 없었다. 공부 자체가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고 되짚어 보는게 아니라 암기하는 과목의 하나였으니까. 이렇게 알고 있던, 내가 배웠던 공부가 허구 또는 날조 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땐 속에서 불이 인다. 가슴이 답답하고 조상을 섬기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나라가 한 짓이 역사를 왜곡하는 그 더러운 어떤 나라와 다를게 뭐가 있을까?

저자가 서문에서도 얘기하듯이 조선 중기에 쓰인 <인조반정사>라는 책을 접하면서 이 책이 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혀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제목과는 다르게 인조 반정에 관한 사건은 없고 백성을 위해 고뇌하고 번민했던 광해 임금과 허균에 관해 더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 책이라 한다.

역사를 다시 보는 눈을 가지면서 학교 공부에서 흔히 말하는 '양반'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양반이라는 허울좋은 기득권층이 백성을, 왕을 어떤 식으로 농락했는지. 무늬만 양반이라도 버리기를 꺼리며 그들의 세상에서 굶어죽어도 버리지 못했던 그득권층의 또 다른 이름! 지금도 명칭만 바뀌었을 뿐이지 자신의 안위와 출세에 눈 먼 양반들이 즐비하다.

세상은 더 넓은 미지의 우주를 향해 가는데 그 옛날 꿈꾸던 이상적 도시 '율도국'을 우리는 애타게 바라고 있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누군가의 힘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주류를 이루는 국민들이 깨어 있어야 의식을 받아들이고 생각할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미국같은 나라는 대강국이지만 문맹율이 세계 1위다. 일부러 깨우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알지 못하게 하고 불편하지 않게, 자유를 준다는 명목하에 무위도식하는 걸인들을 그대로 방치한다. 모든 이가 기본적인 지식을 터득하도록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임적 자유를 취한다. 더 이상 생각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 생활에 안주하도록 한다는 미국에 대한 실랄한 비판을 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인간의 습성상 일이 잘 되면 돈에 목숨 걸고 그 욕심이 채워지면 권력에 도전한다. 다 쥐고나면 놓지 않으려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밟고 그 위에 견고히 다진다. 자신의 다음 세대를 위해서.. 시장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최악으로 치닫게 하는 실패한 구조다. 우리의 혁명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광해임금과 허균의 새 세상은 빛을 보지도 못하고 후대에 기록도 날조되어 전해왔다.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그들은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임금과 정치인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세상은 전체로 보면 비극이지만 개인으로 보면 따뜻하고 정겨운 집, 희망찬 집, 내일을 밝게 비추는 일을 하는 집 등 수많은 희극적 요소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 희망적 요소들이 빛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나라일을 하는 사람이요 백성을 보살피는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율도국이 되도록, 그런 이상향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믿고 발등을 무수히 찍히고 있지만 그들 무리속에서도 우리를 돌아봐주고 걱정해주는 홍길동 같은 인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 옛날 <인조반정사>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효종이나 정조처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볼 줄 아는 그런 위인이 나타나기를 작은 힘이나마 진실한 백성의 마음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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