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h 러쉬! - 우리는 왜 도전과 경쟁을 즐기는가
토드 부크홀츠 지음, 장석훈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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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 표지가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시원한 연두색으로 되어 있어서 기대치를 높였고 꽤 두꺼운 책에다 지면을 가득 채운 글을 읽기가 참 오랜만인지라 즐거운 맘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경쟁과 도전!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에서 결코 떼어 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랄까? 요즘 시중에 나오는 책의 부류는 지나친 경쟁 사회의 폐해에서 벗어나자는 의미의 서적이 주를 이룬다면, 반대로 이 책은 경쟁과 도전속에서 행복을 찾아보고자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도전 정신과 경쟁의식이 어떤 식으로 행복과 공존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에 반대하는 주의자들에게 논리적으로 접근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저자는 일을 하는 경쟁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성취하는 가운데 자신의 자존감을 얻는다 했다. 저자도 평범한 삶을 살았다기 보다 높은 지식을 쌓고 보다 나은 환경에서 경쟁을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쳇바퀴 돌 듯하는 삶을 사는 것에 회의를 느껴 뭔가 다른 변화를 요하는 사람들과 평범한 가운데 나를 시험하는 도전이 아닌 그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 남아야만 내가 존재하는 이들과 어찌 같다 말하겠는가?

'경쟁'이라는 상황에서 쉬엄쉬엄이라는 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야기되는 문제들, 이기기 위해 편법을 쓰고 가정을 버려야 하고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는 것.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간과한 것은 아닌가? 물론 이런 것에 관련되는 이야기도 잠깐씩 이야기 하고 있다.

특히 불편했던 사실은 동양의 선이나 불교에 대해 '버림의 미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또한 그들은 에덴주의자들로 명하고 그들이 사회를 퇴보하게 만든다고 역설했다.

책의 구성도 1부 질주하는 삶, 2부 경쟁하는 삶, 3부 도전하는 삶 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세부적인 내용이 전체적 내용과 부합되는 연결고리가 약했고 진정 본질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부분은 3부에서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다.

읽는 독자인 내가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것인지 내용을 깊게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인지, 행복을 경쟁과 끼워 맞추는 연결이 억지스러웠다. 물론 노동의 가치와 그것을 통한 정당한 부. 거기에서 파생되는 경쟁과 도전의식! 누구나 모두 하라는 것에는 관심이 덜 가는 법이고 하지 않는 것이나 가지 말라는 길에 대한 도전 의식이 인류의 발전을 가져 왔고 그런 것은 앞으로도 발전하는 사회에 중요한 요인이다.

 

이렇게 경쟁 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나 혹은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경쟁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은 가까이 남편 밖에 없는지라 그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남자라면 누구나 도전의식과 경쟁에 노출되어 있고 또 몸의 호르몬들이 실제 여자들보다 그런 상황에서 더 활발히 표출된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실제 요근래 남편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일을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건지 주말, 휴일 반납한지 몇달 되고 밤샘은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더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물론 하는 일이 괴롭기만 한 건 아닌게 눈에 보인다. 성과가 있으면 성취감도 있으니 그렇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피곤을 견디는 것 같았다.

경쟁과 도전하는 삶이 행복인 사람들도 있다. 허나 그걸 강요하는 건 무리가 있지 않을까?

누구나 도전하고 경쟁하는 삶을 사는 건 아니다. 그런 삶에서만 희열이 있고 성취감이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물론 새로운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만족과 흥분의 호르몬 도파민이 분비된다면 일의 능률도 오를 것이다. 성공한 사람이 성공을 논하는 건 극히 평범한 사람에게 와 닿기란 쉽지 않다.

성공의 과정에서 겪은 실패와 좌절이 혹은 경쟁 속에서 자신이 느꼈던 행복을 논할 때 보통사람은 거기에 동한다. 논문을 짜집기하거나 일반적 논리의 나열로 자신의 논리에 맞장구 쳐달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이기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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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 다산과 추사가 사랑한 초의 선사의 우리茶 기행
박동춘 지음 / 동아시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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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차'라 하면 우리가 가깝게 접하는 녹차에서 부터 중국집에서 흔하게 나오는 쟈스민차, 우롱차, 보이차 등 저렴한 것부터 부르는게 값인 고가의 것들도 많다. 예전엔 '차'를 즐겨 먹는 편이었는데 커피 전문점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료인지라 싸지도 않지만 커피가 어느새 내 입맛을 장악해 버렸다.

티백의 차는 흥미가 없고 잎을 우려서 정성스럽게 먹고 싶은 사치(?)의 마음도 있고, 커피와는 다르게 조용한 곳에서 음미하고픈정화된 장소가 필요하기도 하다. 이같은 이유로 차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절에서 어쩌다 접하게 되는 차가 유일한 것이었고 또 그런 곳에서 마시는 것이 일상에서 늘 먹던 진한 커피의 맛을 잠시나마 떨칠 수 있었다.

이때 때마침 접하게 된 이 책은 구미를 자극하며 '차'의 역사와 더불어 만드는 방법과 종류 등 여러가지를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첫장을 보고 상상하거나 제목을 보고 '이런 것이려니' 하면 여지없이 내 생각과는 정 다른 방향의 내용이 숨어 있다는 거 ! 금석학의 대가에게 한학을 사사받은 분이기도 하고 차에 관한 자료와 '초의차' 의 제다법을 전수받은 분이시라 그런지 한문으로 된 원본과 더불어 설명하는 부분까지 한자어가 워낙 많이 섞여 있어서 소설 번역서나 수필을 주로 읽던 요즘, 내게 읽어 내기가 쉬운 책은 아니었다.

 

 저자가 '초의 선사'의 발자취를 밟아가며 초의 선사와 관계했던 인물들의 내용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 동년배로 오랜 지기였던 추사 김정희, 다산과 그의 자제들과의 인연, 신위와 그의 제자들. 이들의 주변 인물에게까지 '초의차'가 전해지면서 당대의 내놓으라는 사대부들이 마시면서 차 문화를 중흥시킨 배경이 되었다.

처음에 차는 약용으로 이용되다가 점차 정신음료로 발전해 나가기도 했는데 임진왜란을 전후로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피혜해진 땅에서 먹고 살기도 힘들었을 텐데 아무리 시와 흥을 즐기고 차문화를 즐기는 사대부라 할지라고 이 명맥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서민들이 즐기는 음료이자 약용이었다면 변형되어 오면서 우리 입맛에 맞는 진실한 차로 거듭났을 지도 모르고 구전되어 오면서 더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마지막 3부 '차'편에서 초의 선사가 차의 이론을 섭렵해 제다법(차를 만드는 공정), 탕법의 기준을 성립하는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차의 세계는 조건이 필요한데 우선은 좋은 찻잎이 있어야 하고 , 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물은 차의 체이며 바로 물에 의해 들어난 차의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바로 차의 세계란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한문으로 된 원서와 더불어 다량의 한자로 인해 읽기가 그리 쉬운 책은 아니었다. 초의 선사의 제다법을 좀 더 자세히 풀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차라 하면 자연과 더불어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음에 산사의 절과 스님을 연상케하고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마시고자 하는가 보다.

잠시 접어 두었던 다기를 꺼내 차 한잔 우려 먹는 것도 좋을 듯 싶다.

적멸의 뜻을 찾는데서 부터 시작한 이 책을 마지막으로 그 뜻을 적어봄으로 서평을 마무리 한다.

* 적멸 : 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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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사랑 이야기
마르탱 파주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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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주인공 비르질이 후레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에펠탑을 안고 등장하는 표지의 엉뚱한 포즈는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떤 사랑이야기인지 궁금증을 유발하기 된다. 아들 녀석이랑 얼마전에는 본 애니메이션 '라따 뚜이'에 나오는 프랑스 식당의 견습생 '링귀니'와도 많이 닮아 있다. 비르질은 기억에서 사라진 클라라의 이별통보로 인해 현재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자신과 과거의 행적을 되짚어보는 계기를 가진다. 나의 기억은 없으나 친구들도 알고있고 그녀도 이별을 고하는 상황!
정녕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떨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예전의 나로 돌아올 것인가?

 싱글인 한 남자의 고독한 연애담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동시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라는 문화와 그 속에 속하는 젊은 청춘의 모습을 엿보는 것은 동양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점들이 눈길을 끈다. 와인의 주산지답게 즐겨마시는 와인의 이름이나 음식, 그가 사랑하는 빠리거리의 모습. 허나 현실을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젊은 청춘의 흔들리는 모습은 우리와 별반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약간의 이질감이 든 것은, 광고회사에서 승진을 하고 연봉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구지 마다하고 억지를 부리며 승진을 하지 않겠다고 회사와 갈등을 빚는 부분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명확한 이유제시도 부족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 어떤 장점으로 작용하는지도 이렇다 할 설명이 부족했다.

20~30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상의 모든 젊은이들은 경제적 능력을 추구하는데 비상이 걸렸다. 부를 과다하게 축적하는 대기업들은 새로운 곳에 인재를 등용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해야 할 의무를 상실했고 그로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일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아르바이트인생에 급급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돈을 벌어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에 원하지 않는 직업을 구해야 하거나 그러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돌아서 가야만 하는 경우가 그랬고 좀 비약이긴 하지만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일이 그렇다.

결국 비르짙은 클라라와 재회를 앞두고 그녀를 만나기를 포기한다.
2주동안 그녀의 그림자를 쫓으며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살피게 된 것에 만족하고 된다. 그가 마지막에 던지는 한마디는 이 소설의 제목과 일맥상통하기도 하고 그 기억되지 않는 것들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고 지친일상을 피해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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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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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 지음
  • 학고재

 

'김훈'다운 소설이라 실망은 덜 했다. 언제나처럼 매정하리만치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들. 나같이 그 작가다움을 원하는 사람들은 기대치에 부흥해서 좋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때때로 기분이 변하는 뜨내기 독자인 면도 갖고 있기에 이런 사실적 묘사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매마른 문장들을 접할때면 씁쓸하고 마음이 스산해진다.

 

 '정약용'의 형제들이 천주에 눈을 뜸과 동시에 천주교 박해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정가 형제들 중 '흑산'으로유배되어 갔던 '정약전'의 시선이 주를 이루며 그와 동시에 천주를 믿음으로 인해 박해받는 이들의 숨가쁜 상황을 번갈아가며 제시하고 있다. 소제목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 인물들의 등장은 결국 하나의 사건과 연결되거나 혹은 사람과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이런 구조의 소설은 뒤에 언떤 연결식일지 빤히 보이는 듯 해 사실 싱겁긴 하지만 작가 그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와 스토리 전개방식이 지루함을 조금은 덜어준다.

 

 조정에서 천주교의 핵심인 '황사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고 그를 숨기기 위해 애쓰는 천인 신분의 '육손이'나 '김개동'을 보면 글을 알지 못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유교사상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늘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인간의 근본적 자질을 들여다 보는데 종교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신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으므로 천민이나 서민층들이 천주에 더 심취했을 것이다. 작가도 얘기하듯이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살을 붙이고 실존지 않는 인물을 더해서 온전한 실제인물들이 아니고 허구속 인물들이라 밝힌다.

이른바 천주교 최고의 신봉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능지처참'이니 '군문효수'니 하는 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카사위인 황사영을 닮은 아이를 흑산에서 만난 정약전은 갈 수 없는 바다끝 어딘가를 그리워하기를 멈추고 고기의 생김새를 보고 특이점을 살피며 글을 쓰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자산어보>이다.

 

 조선 말 정치적으로 위태롭고 새로운 사상으로 새 세상을 열려던 지식인부터 많은 천주의 신봉자들은 그렇게 죽음과 맞서며 바다 밑에 혹은 강 바닥에,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채로 사라져 갔다. 서양사에 등장하는 피의 전쟁 대부분은 종교에 의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길 바라는 신을 앞세워 전쟁을 한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뿌리깊게 내린 종교사를 보면 맞서기 보다는 이해와 설득을 요했던 것 같다.

'이차돈의 순교'도 그랬고 많은 사람의 희생을 보고 자수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그랬다. 씁쓸한 여운과 더불어 많은 이의 희생이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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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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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이 떠나신지 2년이 다 되어간다. 둘째를 낳기 위해 친정에 있을 당시 그때도 '마지막 마무리'를 읽고 있던 참이었는데 둘째 낳기 딱 십일전 3월 11일에 입적하셨다. 우둔한 독자인지라 '마지막 마무리' 를 볼 때야 스님이 편찮으시단 걸 알았고 아이 낳으면 꼭 찾아가기라 다짐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스님의 입적 소식에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모른다. 주위에선 부모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그리 슬피 우냐 했지만, 뵙고 싶어도 더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과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 스님의 글을 볼 수 없음에 가슴이 푹 꺼지는 느낌을 받았드랬다.

종교를 떠나 스님은 내게 또 다른 스승이자 삶의 안식처요, 바른 길의 선구자셨다.

 

 사람마다 각자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틀리다. 내가 바라봤던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 부분이 있는 반면에 전혀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각자의 생각과 느낌을 모아 한데 묶으면 오롯한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게 실제 본인과 과연 얼마나 많이 일치할까?

스님과의 연이 닿은 분들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한결 같으신 분이 있을까 싶어 놀랍기도하고 우리 곁에 진짜 부처가 왔다가신 것 같아 찌릿한 소름이 돋기도 한다. 작년에야 찾아갔던 '길상사'! 향냄새 그윽하고 목탁소리 요란한 일반 절과는 달리 뜨내기 손님들의 쉼터 같은 느낌이요, 과장하자면 관광지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그게 또한 '길상사'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기도 했고 짧게나마 스님의 뜻도 모든 이의 쉼터같은 도량을 생각하신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유래가 있는 절이라서 그런지 나무 하나하나, 조각 하나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고 눈안에 가득 담고 싶었다. 법당 앞에 서 있는 범상치 않은 '관세음보살'상!

이 책에 등장하는 교수이자 조각가이신 최종태님이 스님의 부탁을 받고 3일만에 조각한 조각상이란다. 천주교의 성모와도 닮아 있는 듯하지만 눈빛의 너그러움은 관세음보살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무슨 종교가 됐건 간에 그 가르침엔 다름이 없다고 늘 말씀하신 스님.

그 길상사에도 스님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겨두시지 않고 스님의 짧은 글귀만이 나무와 어우러져 군데군데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생전에 강직하고 꼿꼿하셨던 스님은 속세를 등지고 산속에 운둔만 하고 계셨던 분은 아니었다. 말이 아닌 글을 다룰 줄 아셨던 분이기에 의식있는 정치와 사회로 나아갈 것을 요구했고 또 아닌 일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셨다. 살림이 어려운 절이나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운영비나 장학금을 지원해 주시기도 하셨다. 소리없이 실천 하신 이 모든 일들이 그분의 도움을 받았거나 또는 그 뜻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인으로서의 스님의 모습은 언제 강직하고 꼿꼿하셨기에 사가와의 인연은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촌동생 박성직님이 스님의 노모를 20년 가까이 모셨다고 한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세인이라 스님의 입장보다는 사가의 어머님 마음이 먼저 헤아려진다. 일찍 여읜 남편과 출가한 아들! 종교에 귀의했다고는 하나 그 강직함 뒤로 어찌 부모자식간의 끈끈한 정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나 사촌동생이 당신의 노모를 모셔야하는 미안함과 끊을 수 없는 속세의 인연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마지막 스님을 찾은 병실에서 스님이 손을 꼭 잡아주셨다는 부분에서는 눈물을 아니 흘릴수가 없었다.

 

 스님은 가셨지만 그분의 글과 그분의 행동과 업적은 영원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무소유'의 진짜 의미는 '가지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이들이 기억하는 스님의 모습은 남들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글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서 무소유를 실천 하신 분이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를 알아야 한다. 스님은 가시고 없지만 그분의 글은 대대손손 남을 것이며 언제나 그 누군가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

 

산너머로 넘어가는 불그스름한 해를 보고 하신 말씀이란다.

"스님! 정말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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