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AI 시대를 산다면 - 2500년을 초월하는 논어 속 빛나는 가르침
김준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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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공자가 AI 시대를 산다면 (김준태,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논어를 다룬 책은 이번이 세 번째 읽는다. 저자와 출판사는 모두 다르지만. 그들 중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논어의 내용을 세세하게 분해하여 범주화 시켰다는 점이다. 각각의 구절을 하나씩 나열하여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비슷한 것들끼리 묶어 둔 것이다.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지만, 이런 식으로 그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주자의 주석서보다 이런 형태가 더 공부하기에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더 쉽게 다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더더욱 사람이 먼저다.

2, 사람다움을 지키는 기준.

3,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관계)

4,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5. 그리고, .(위 범주에는 들지 않지만 중요한 다양한 개념들)

 

 

저자가 정한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친근감이 생긴다. 논어가 어려운 철학 서적이 아니라 일종의 실용서 또는 자기계발서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됨을 강조하고, 어떻게 해야만 사람됨을 지킬 수 있는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 등은 결국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종의 지침서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각 나라의 지배층은 부와 이익, 영토라는 철기 사용의 결과물에만 매혹되었을 뿐, 문명의 전환을 아우르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 새 시대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국강병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사회는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5, 프롤로그)

 

 

저자는 지금 우리도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을 겪는 문명의 전환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500년의 시간을 건너 논어를 다시 지금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얼마 전 동아시아사 수업을 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조금 더 소개해주었다면 좋았겠다는. 사실 주자가 강조한 사서가 왜 오경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를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주자도 저자처럼 송 대 현실을 문명의 전환기라고 판단했던 것이고,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을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논어를 근본을 세우는 데 필요한 책이라고 평가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의 각 챕터는 딱 필사하기 좋은 분량이다. 각각의 내용이 우리 삶에 지침이 될 정도로 충분히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각 챕터 중에서, 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 필사하면서 되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읽는 중에 많은 것이 마음에 와 닿았지만, 그 중에서 나도 세 가지를 꼽아 적어보면서 내 삶을 되새겨보고 싶었다.

 

 

", 잘못했으면 감싸지 말고 일깨워 주라는 거죠. 설령 상대가 언짢아하고 노여워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고, 진정으로 그 사람에게 충성하는 방법입니다."(124, 3부 관계)

 

 

은 아랫 사람이 맹목적으로 윗 사람을 추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색다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으로 이것을 사랑으로 본 것이다.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렵겠지만 직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진심어린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개념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실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보면, 나는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편이다. 내가 직설적으로 상대에게 말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는 척 하지만, 사실 나는 적극적으로 상대를 위해 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흔히 '배움'하면 지식을 쌓는 것만 생각하지만 수양도 배움입니다. ... 화가 날 때는 내가 화를 냄으로써 생겨날 어려움을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 잘못해도 되고 실수해도 됩니다. 다만 그 원인을 분명히 인지하고 개선하여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겁니다."(225~6, 4부 배움)

 

 

지식을 쌓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수양이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한다면 배우지 못한 것과 같다. 특히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배움의 자세로 화가 날 때 실수하지 않는 것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은 항상 밑바닥에 도달할 때 그 근본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노로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실수로부터 배워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지, 잘못을 감추기 급급하거나 핑계를 대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자의 말씀처럼 나도 이 두 가지를 잘 염두에 두었다가 내 행동을 성찰하는 기준으로 활용해야 겠다.

 

 

"나이가 마흔이 되었는데도 미움을 받으면 거기서 끝난 것이다."(260, 5부 그리고 삶)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다. 불혹, 마흔이 되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추게 되지만, 이미 형성된 습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고 하니, 마흔이 되기 전에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20, 30대에 수양을 통해 완성된 인격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스스로 성찰하고, 행동을 조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이 더 불편해하고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나이를 빌미로 젊은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보다, 그들의 의견을 더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이 마흔은 인격을 완성시켜야 하는 나이라기보다 인격을 계속해서 수양해가야할 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논어가 고전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늘 궁금했다. 저자에 따르면, 공자의 가르침은 거창하지 않다. 게다가 실천하기 어렵지도 않다. 한마디로 쉽고, 누구나 지키고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쉬워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는 곁에 두고 자주 읽을수록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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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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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호랑골동품점 (범유진,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산의 주인 호랑이가 인간에게 신령스러운 기운을 준다. 흰 눈썹으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저자가 범씨라서 범(호랑이)이 주인공일거라고 혼자 생각하곤 큭큭 웃기도 했다. 물론 이 책에 호랑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우, , 토끼까지 친근한 동물들이 나와서 그런지 우리 전래 동화를 읽은 느낌들 정도다. 익숙한 듯 낯선 물건으로 가득한 골동품점이 배경이 된 것은 물건에 깃든 인연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다.

 

물건에는 기억이 깃듭니다.”(261, 작가의 말)

 

물건에 기억이 깃든 경우는 많다. 완전히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어떤 물건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특히 그 기억이 다른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미 오래전 헤어진 인연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우연히 짐 정리 중에 발견된 물건에서 잊힌 옛 인연이 떠오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매일 애지중지 사용하던 물건이라면, 어떤 간절한 바람이나 원한이 담긴 물건이라면 어떨까. 그 물건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요정이 되어, 귀신이 되어 어떤 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매력적이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그 물건이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것도 그렇다. 게다가 이 책에는 외로움이 가득하다. 절친한 친구가, 소중한 가족이 내 곁에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은 너무나도 절절하다.

 

 

-물건이 곧 그 사람-

 

골동품점에 진열된 수많은 물건 중 소설의 소재는 여섯 가지다. 이 물건들은 곧 그 사람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물건과 인연이 닿은 사람은 모두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인물 대부분이 호랑골동품점에 우연히 방문하고, 또 강한 충동으로 그 물건들을 훔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물건이 마치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물건에 담긴 마음이, 원한이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다.

첫 번째 물건 성냥, 성냥은 노동자를 상징했다. 그 표현이 너무도 절절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미선은 타 죽었다. 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가 소진되어 죽었다.”(37)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는 19세기 성냥 공장이나 현실의 콜센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성냥 한 개비로 켜는 불은 금세 꺼질 수밖에 없지만, 수많은 성냥이 모인다면 그 불은 삽시간에 전체로 번져나갈 수 있었다. 19세기 성냥 공장의 소녀들처럼, 현재의 콜센터 직원들도 그런 불을 켤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세 번째 물건 공중전화를 다룬 이야기가 나는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공중전화는 외로움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고, 그 외로움을 가장 잘 달래주어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화는 일방적이다. 일방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폭력적이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전화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와 연결해주는 도구다. 그것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삶으로 극복해낼 수 있는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마도 나는 이 부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음이었다.”(134)

박서현의 극본을 무대에 올릴 것이다. 이야기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영원히 함께일 수 있다.”(142)

 

죽어버린 이야기를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는 것. 나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이 이야기만큼은 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느 매체에서 살아남아 더 생명력을 넓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미(虎眉), 호랑이 눈썹으로 이어진 인연-

 

호랑이 눈썹을 가진 청년은 인간계로 내려와 살아가다가 안개 속에서 헤매는 아이를 구해 후계자로 삼는다. 아이는 호미를 사부라 부르며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몇 대의 호미와 사부가 이 인간계를 거쳐 갔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호랑이 눈썹으로 이어지는 인연이다. 그 인연은 외로운 아이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는 동시에 그 인연을 반드시 빼앗아 간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유요의 사부와 같이 말이다. 이유요도 마찬가지로 안개 속에서 헤매는(가족을 모두 잃은) 소하연을 구해 골동품점으로 데려온다. 그녀를 후계자로 삼으면 이유요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다. 이유요는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난 사부를 기다리면서도 그를 원망한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 그래서 가혹한 것일지 모른다.

 

왜인가요. 왜 데려왔나요. …… 사라질 걸 알았을 텐데. 혼자 남겨질 것을 알았을 텐데.”(236)

 

하지만 나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이유요가 소하연을 구하면서 어느 정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사부의 흔적이 알지 못한 곳에 남아 있었다.”(257~8)

 

나는 이유요가 결국 외로움을 이겨냈을거라 믿는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부의 흔적이 곧 자신에게, 소하연에게, 주변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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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실력, 장자 - 내면의 두께를 갖춘 자유로운 생산자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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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삶의 실력, 장자 (최진석, 위즈덤하우스, 2025, 초판 1)

 

오래전 건명원에서 최진석 교수의 강의를 방송으로 본 적이 있었다. ‘. 이 사람의 강의는 참 매력적이다.’ 생각했었다. 이분의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은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매력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그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이분의 강의를 왜 좋아했는지,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고전의 내용은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자의 해석이다. 나는 이런 총체적 해석을 매우 좋아한다. (1장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아주 극소수의 기록만 남아 있는 상황. 저자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행동, 삶을 살았는지 생생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이 지금 우리네 삶과 매우 닮아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사례를 들어가면서 인과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장자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 삶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깨달음을 담고 있다. 이 지점이 바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장치다. 우리가 과거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서 학생들이 역사를 생생하게 배우길 희망한다. 하지만 나는 저자만큼의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안다. 잘못 따라 했다가는 약장수나 사기꾼이 될 수준에 불과하다.

 

 

-도가, 자기 함량, 두께를 키우는 공부-

 

저자는 철학자이면서 과학적 사유를 먼저 공부할 것을 권한다. 그것은 우리가 도가 사상에 대해 오해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위자연처럼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도가 최고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 그대로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결국 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연 그대로를 보는 결과적인 모습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이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황가람, 나는 반딧불)

 

우리는 정답을 배우면서 살아간다. 나보다 먼저 살아본 사람들, , 선생(先生)과 선배(先輩)의 길을 뒤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질문할 수 없게 되면서, ‘반성, 성찰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저 정답에만 매몰되어 살면서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 위 노랫말처럼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장자는 말한다.

 

장자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생각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것 모두가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철저한 공부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자기 함량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 보통 일들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빛낼 수 있다고 한다.

 

-작은 삶의 지침, ‘어른이 되는 법’-

 

사실 장자의 사상은 무엇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저자는 장자의 사상이 매우 높은 수준이고, 그 수준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야기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오히려 구체성, 명확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자도 그런 비판을 책의 끝에서 하고 있다.

 

“(장자가 명확히 하지 해명하거나 정의하지 않은 것)이렇게 되면 일상적인 생각과 철학적인 사유가 분명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 이런 태도 때문에 과학적 사유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그러다가 기술적 문명에서 과학적 문명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뒤처져, 결국 아편 전쟁으로 상징되는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었습니다.”(340, 13, 미끄러지는 빛으로 나아가며)

 

솔직히 나와 같은 수준에서는 장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뭔가 깨달음은 있지만, 그 깨달음을 설명하기 어려워 입안에서 무언가 맴도는 느낌만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여러 해설이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른이 되는 법이 최고였다.

 

장자는 어른이 어른으로 대접받으려면 젊은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젊은 사람들보다 공공질서를 더 잘 지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독서를 더 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신용을 지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예의를 지키는 것이지요. 행동거지에서 젊은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더 단정하고 더 의연해야 합니다. 왜냐면 더 많이 반성하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살았으니까요.”(111, 5, 관념에 갇히지 않은 사고)

 

나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공공질서를 잘 지키는지, 책을 더 읽는지, 예의를 지키는지 항상 스스로 반성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 행세를 하는 사람은 앞에선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에선 뒷담화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앞에서도, 뒤에서도 어른으로 대접을 받고 싶다. 아니 스스로 어른이고 싶다. 장자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런 작은 목표들이 제시되어 있기에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다. 특히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사람,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부모 등 우리 사회 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지침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과 궁극적 질문-

 

질문하는 사람이 대답하는 사람보다 함량(자기 그릇, 도량, )이 크죠.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논쟁하는 사람보다 함량이 큽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시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이 함량이 더 큽니다. 시를 읊는 사람보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이 함량이 더 큽니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보다 몸을 다루어서 춤을 추는 사람이 더 함량이 큽니다.”(123~4, 6, 우물 안 개구리임을 깨닫는 함량)

 

질문하는 사람이 정답을 찾는 사람보다 더 높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약간 놀라웠다. 이야기, , 소리(노래), 춤으로 점차 더 함량이 높아진다는 설명은 약간 의외였다. 사실 나는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높은 수준의 덕이 있다고 느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설명을 보면서 얼마 전 다시 보았던 영화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2009)’이 떠올랐다. 오의 주유와 제갈량이 금(악기)을 켜면서 음색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서로 연주만 하고 헤어졌을 뿐인데, 그 뒤 제갈량은 주유의 심중을 이해했고, 주유의 아내도 그것을 알아챘다. 사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중국식 허풍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것이 가능할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언급한 것이 아닐까.

 

 

내가 나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의 삶을 사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209, 8, 근원을 살피고 다음으로 건너가는 주체)

 

나는 위와 같은 질문을 깊이 생각해본 경험이 없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저 주변 환경에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연습하느라 시간을 모두 보냈던 것 같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질문에 답해보려고 애쓰지 않았고,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었는가 보다.

근원을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모래 위에 큰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해볼 시간도 없이 살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명 명문대, 좋은 직장, 많은 돈, 집 구매와 같은 것들이다. 남이 원하는 것을 내 삶의 목표로 삼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나 자신이 없는 채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에서 을 언급했는지 모른다. 장자의 사상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최고 덕을 갖춘 경지에 도달하는 것보다도, 지금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힘을 기르는 것. 나는 그것이 장자가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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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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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박현수,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한국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 등장한 새로운 음식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경성 맛집 산책󰡕, 󰡔식민지의 식탁󰡕 등을 썼다. 이번 책은 근대 문학에 묘사된 8가지 디저트를 담았다. 그래서 저자는 일종의 음식 문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디저트 문학자라고 해야 할까.

100년 전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 문화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특히 저자가 선택한 8가지 디저트(커피, 만주, 멜론, 호떡, 라무네, 초콜릿, 군고구마, 빙수)는 근대 문명의 가면을 쓴 음식으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모습과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이 땅에 들어온다. 저자는 일본을 통해 이식된 근대가 우리의 전통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가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 새롭게등장한 음식을 다루면서도 그 원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음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를 찾는 데 주목한다. 그래서 그의 논문이 재미있지 않다는 평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 소개에 이런 표현이 있다. ‘얘기나 강의를 하면 재밌는데, 논문은 안 그렇다는 말에 울컥해,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는 글을 쓰려 노력 중이다.’) 아무래도 대중은 음식의 원조에 더 관심과 흥미를 보이지 않겠는가. 농이다.

 

 

-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

 

“100년 전 디저트를 다룬 이 책은 누가 더 많이 먹는지를 겨루거나 맛집 찾기에 몰두하는 데서 벗어나 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를 더듬어보려는 작업의 하나다.”(6, 들어가며)

 

저자는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를 찾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넘나든다. 특히 이 책에서 선정된 8가지 디저트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밝히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그 과정이 짤막하면서도 매우 깊이 있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가 먹는 디저트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서 놀라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물론 이 모든 디저트의 역사를 알게 된다고 당장 그것을 많이 먹는다거나 아예 먹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100년 전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커피를 마셨을지. 커피를 마시면서 무엇을 떠올렸을지. 커피는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100년 전과 지금-

 

지금은 곳곳에 카페가 널려 있다. 간단히 시간을 보내거나, 공부하거나, 차를 마시기 위해 주로 찾는 공간이다. 일터로 가기 전에 잠시 들러 사서 가기도 한다. 한국인의 카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카페보다 다방이 더 식민지 조선에서 주류였다는 점은 매우 놀라웠다.

 

술과 함께 여급들의 에로틱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되면서 가족 손님이 더 이상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51, 커피)

 

놀랍게도 100년 전 카페와 다방은 지금과 완전 정반대였다. 어쩌다 지금은 그 의미가 바뀌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분위기가 달라진 계기가 있을 것이다. 커피라는 낯선 음료가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음료의 맛보다는 그 음료를 파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탄산음료와 물의 관계도 위와 유사했다. 일제 강점기 너무나도 익숙했던 자연의 물이 탄산음료의 출현으로 비위생적이고 전근대적인 표상을 얻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가 공장에서 생산한 음료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다시 물이 그 순수함과 깨끗함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물론 100년 전과 다른 의미의 표상이지만 말이다. 100년 전에는 자연에서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었다면, 지금은 물조차도 공장에서 생산한 것을 사서 먹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 8가지 디저트는 이름만 닮았지, 그 실체는 100년 만에 많이 달라졌다. 그 의미조차 이제는 대부분 희미해졌다. 대부분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유입된 디저트는 신기하게도 모두 단맛을 낸다. 커피는 하얗게 정제된 설탕을 듬뿍 녹였고, 만주는 달콤한 팥 소를 품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 단맛을 좋아해 이들을 찾는다. 그렇다면 이 단맛은 어쩌다 우리 곁으로 오게 된 것일까.

 

-일본과 조선, 서구 문물-

 

일본은 우리보다 빠른 속도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 음식과 디저트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이 책에 등장한 대부분 디저트는 모두 일본이 먼저 받아들여 크게 유행을 시켰고, 그것이 식민 지배와 함께 조선 땅으로 유입되었다. 물론 호떡만은 예외였지만, 그 호떡마저도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이주한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온 디저트였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일본이 서양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화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중국 만두를 일본 만주로, 단팥빵으로 만들어 내거나, 서양의 멜론을 도입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참외 품종을 개량하려고 시도했다는 점 등이다.

반면에 식민지 조선은 말 그대로 대부분 디저트가 이식되었다. 일본에 비하자면 매우 수동적인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 조선이 주체적으로 문물을 수용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일본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근대를 식민지 조선은 너무도 쉽게 동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근대에 열광했던 이효석이 조선의 자연미를 발견하는 장면과 이상이 죽기 전 초고가의멜론을 먹고 싶어 했다는 장면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근대 문명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생생해 보여준다. 내게는 그것이 매우 충격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역사적 사실-

 

한반도에 중국인이 대거 유입된 시기는 언제일까. 나는 그 시기를 임오군란(1882)이 발생한 이후라고 알고 있었다. 대규모 청군이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상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했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오히려 많은 중국인이 본토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1920년대가 되면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 건축, 토목 공사가 시작되면서 값싼 쿨리(苦力)가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 유입된 중국인은 청일전쟁 이전과 달리 하층 노동계급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호떡과 같은 값싼 음식을 파는 상인이 함께 등장했다고 한다. 한반도의 화교 역사에 대해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898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삽화(열강이 중국 영토를 분할해 빼앗으려는 모습)가 중국을 피자가 아닌 호떡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새롭게 알았다. 삽화의 원래 제목이 중국 호떡 나눠 먹기라고 한다. 이렇게 잘 알려진 삽화조차도 내가 모르는 점이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사실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디저트의 명칭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연원을 밝힌다. 동시에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유행하게 된 상황까지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를 살핀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일본이 가져온 근대에 열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전통을 잃어버렸다. 일본이 내세운 선전과 세계관에 동원되고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인을 타자화하고 멸시했다. 지금 우리는 100년 전 새롭게 도입된 디저트를 먹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정제된 설탕과 초콜릿, 탄산음료가 건강에 좋고, 약으로도 사용된다는 근대 문명의 근거 없는 오만함은 이제 사라졌지만, 오히려 건강에 좋은 잃어버린 우리 전통 먹거리를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근대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강제된 잘못된 세계관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는지도 살필 필요가 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도입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갈 역량이 충분히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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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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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창비교육, 2025, 가제본)

 

서평단을 신청해 가제본을 받았다.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만 읽을 수 있었는데, 가장 아쉬운 점은 역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소개를 듣고 단번에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정작 그 부분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읽었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쓴 글을 통해 캐나다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고, 정약용과 천주교 도웁 시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소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내면을 전지적으로 설명해주는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K-역사-

 

일단 세계가 주목한 K-역사 미스트리 소설이란 표현 덕분에 이 책의 역사적 배경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캐나다에 오래 살아온 사람은 당연히 한국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없었을 텐데, 상당히 고증에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와 여성의 지위, 포도청의 종사관과 다모의 옷차림과 활동까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장면마다 저자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많은 사람이 ‘K-역사 소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내가 직업적으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약간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첫 페이지에서 궁궐 밖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비단옷을 입은 선비와 목에 염주를 건 스님이 길거리를 오간다는 묘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또한, 주인공 (, 이야기)이 글자를 모른다는 설정은 약간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1800년이고, 관청에 소속되어 다모로 활동하는 여성이 한글조차 알지 못했다면 당연히 수사에 참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이나 노비들도 전문직으로 근무하려면 언문 정도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운명-

 

가장 마음에 드는 설정은 주인공 설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고자 한 모습이다.

 

운명, 진실처럼 굳건한 족쇄.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55)

 

조선 시대 여성은 분명 포졸 견이 말하는 것처럼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아가는 게 현실이었을 것이다.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다는 상상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 설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한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황후를 꿈꾼다. 하지만 좀 아이러니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설이라면 황후가 아니라 종사관, 포도대장과 같은 지위를 꿈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수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직. 황후는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이긴 하지만, 결국 황제에 의해 간택되어야만 가능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여성의 직업 목표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시기이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분명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었기에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천주교와 평등-

 

이 소설의 갈등은 천주교에서 나온다. 천주교도는 조선의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교도 집단으로 등장하고, 그로 인해 당연하게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들이 하인이나 노비조차도 평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조선 사회에서 중시하는 신분과 명예를 더럽힌다고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이 약간 조선에 대한 오해에서 만들어진 설정이 아닐까 싶었다. 천주교가 평등의 교리를 내세운 것은 맞지만, 가장 처음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양반(남인 계열)이었다. 게다가 평민에게까지 교세를 확장하고자 노력한 이들도 대부분 양반이었다. 그리고 초창기 천주교를 살펴보면 남녀가 따로 예배하기도 했고, 신분을 부정하고자 했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가장 큰 갈등은 조상에 대한 제사와 신주의 문제였다. 당시 지배층은 유교 가치관과 천주교 교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우려했던 것이지, 당연히 양반과 평민은 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등을 천주교도가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그 증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이용해 타인을 겁박한다는 것 자체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천주교도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습과 크게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한 종사관과 다모 설-

 

외로운 산 같은 고산(孤山) 한 종사관, 호기심이 많아 남의 말을 엿듣는 다모 설(). 둘은 어떤 관계일까.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가제본만으로는 둘의 관계를 결국 알아낼 수 없었으니. 너무도 아쉽다. 처음 한 종사관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설이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듯싶었으나, 설이가 한 종사관의 명령을 듣지 않자 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심지어 설이가 한 종사관을 의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다가 가제본은 끝난다. 가제본 만드신 분이 큰 그림을 그리신 게 분명하다. 마치 드라마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 갈등은 결론 없이 끝나기 마련이다. 독자의 궁금증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후 갑자기 마무리해버리는 이 잔혹한 결정! 매우 존경스럽다.

사실 나는 둘이 연인(戀人)보다는 잃어버린 친 오누이이길 바란다. 그토록 간절히 찾길 바라는 가족, 애틋한 마음만 품고 있는 가족,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서로를 믿어줄 수 있는 가족 말이다. 그 결론만이 증오에 가득 찬 한 종사관을 구할 수 있을 것이며, 어려움에 부닥친 다모 설이를 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곳곳에 그와 유사한 언급한 것으로 보아 내가 그럴듯한 결론을 유추한 게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흩어진 가족은 종사관 나리와 설이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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