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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창비교육, 2025, 가제본)
서평단을 신청해 가제본을 받았다.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만 읽을 수 있었는데, 가장 아쉬운 점은 역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소개를 듣고 단번에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정작 그 부분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읽었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쓴 글을 통해 캐나다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고, 정약용과 천주교 도웁 시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소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내면을 전지적으로 설명해주는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K-역사-
일단 ‘세계가 주목한 K-역사 미스트리 소설’이란 표현 덕분에 이 책의 ‘역사적 배경’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캐나다에 오래 살아온 사람은 당연히 한국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없었을 텐데, 상당히 고증에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와 여성의 지위, 포도청의 종사관과 다모의 옷차림과 활동까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장면마다 저자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많은 사람이 ‘K-역사 소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내가 직업적으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약간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첫 페이지에서 궁궐 밖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비단옷을 입은 선비와 목에 염주를 건 스님’이 길거리를 오간다는 묘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또한, 주인공 說(설, 이야기)이 글자를 모른다는 설정은 약간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1800년이고, 관청에 소속되어 다모로 활동하는 여성이 한글조차 알지 못했다면 당연히 수사에 참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이나 노비들도 전문직으로 근무하려면 언문 정도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운명-
가장 마음에 드는 설정은 주인공 설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고자 한 모습이다.
“운명, 진실처럼 굳건한 족쇄.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55쪽)
조선 시대 여성은 분명 포졸 견이 말하는 것처럼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아가는 게 현실이었을 것이다.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다는 상상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 설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한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황후’를 꿈꾼다. 하지만 좀 아이러니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설이라면 황후가 아니라 종사관, 포도대장과 같은 지위를 꿈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수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직. 황후는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이긴 하지만, 결국 황제에 의해 간택되어야만 가능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여성의 직업 목표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시기이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분명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었기에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천주교와 평등-
이 소설의 갈등은 ‘천주교’에서 나온다. 천주교도는 조선의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교도 집단으로 등장하고, 그로 인해 당연하게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들이 하인이나 노비조차도 ‘평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조선 사회에서 중시하는 신분과 명예를 더럽힌다고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이 약간 조선에 대한 오해에서 만들어진 설정이 아닐까 싶었다. 천주교가 평등의 교리를 내세운 것은 맞지만, 가장 처음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양반(남인 계열)이었다. 게다가 평민에게까지 교세를 확장하고자 노력한 이들도 대부분 양반이었다. 그리고 초창기 천주교를 살펴보면 남녀가 따로 예배하기도 했고, 신분을 부정하고자 했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가장 큰 갈등은 조상에 대한 제사와 신주의 문제였다. 당시 지배층은 유교 가치관과 천주교 교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우려했던 것이지, 당연히 양반과 평민은 ‘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등’을 천주교도가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그 증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이용해 타인을 겁박한다는 것 자체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천주교도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습과 크게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한 종사관과 다모 설-
외로운 산 같은 고산(孤山) 한 종사관, 호기심이 많아 남의 말을 엿듣는 다모 설(說)이. 둘은 어떤 관계일까.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가제본만으로는 둘의 관계를 결국 알아낼 수 없었으니. 너무도 아쉽다. 처음 한 종사관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설이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듯싶었으나, 설이가 한 종사관의 명령을 듣지 않자 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심지어 설이가 한 종사관을 의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다가 가제본은 끝난다. 가제본 만드신 분이 큰 그림을 그리신 게 분명하다. 마치 드라마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 갈등은 결론 없이 끝나기 마련이다. 독자의 궁금증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후 갑자기 마무리해버리는 이 잔혹한 결정! 매우 존경스럽다.
사실 나는 둘이 연인(戀人)보다는 잃어버린 친 오누이이길 바란다. 그토록 간절히 찾길 바라는 가족, 애틋한 마음만 품고 있는 가족,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서로를 믿어줄 수 있는 가족 말이다. 그 결론만이 증오에 가득 찬 한 종사관을 구할 수 있을 것이며, 어려움에 부닥친 다모 설이를 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곳곳에 그와 유사한 언급한 것으로 보아 내가 그럴듯한 결론을 유추한 게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흩어진 가족은 종사관 나리와 설이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