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 제13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김미수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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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김미수, 은행나무, 2025, 11, 490)_1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소설 속에 소설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 종태의 수기와 편지, 여자 주인공 해림의 증언을 바탕으로 또 다른 주인공 지유가 소설을 썼다.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 3부의 주인공은 지유다. 지유가 종태와 해림의 이야기로 쓴 소설이 2부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소설을 쓰는 이 독특한 구조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

 

가능하다면 저는 이 소설이 지금 MZ세대인 청춘과 일제 말기의 청춘이 만나는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심 어린 연대와 위로를 주고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488, 작가의 말)

 

MZ세대인 지유는 일제 말기의 청춘 종태, 이옥, 해림, 순이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삶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그녀가 쓴 소설만으로는 쉽지 않아 보였다. 종태는 수기와 편지만을 남기고 사라졌고, 이옥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버렸다. 해림은 위안부 피해를 직접 증언했지만, 그 속마음을 지유에게 모두 털어놓지 못했다. 게다가 장제 징용이나 전쟁, 위안부 생활 같은 끔찍한 삶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유는 소설을 쓴다. 종태 할아버지와 해림 할머니의 삶을 소설로 남긴다. 그건 해림 할머니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우릴 다시 살게 해달란 말이다.”(66, 1부 끝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

우리 피해자를 위해서 싸워줘야 해. 젊은이들이 나서줘야 해.”(443, 3부 빛이 있다면)

 

젊은이들이 나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해자를 다시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해자와 피해자-

 

이 소설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지 않고, 당시에도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전형적인 가해자 일본인에 빌붙는 조선인 유토 순사와 함께 일본인이면서도 조선인을 도와 목숨까지 버리는 쇼타를 보여준다. 친일파는 매우 익숙한 존재이지만, 조선인을 위해 양심적으로 행동한 일본인은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가해와 피해를 일률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인식은 소설 밖 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해림 할머니는 전형적인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고향 친구인 이옥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위안부 할머니를 돕는 조직과도 갈등한다. 그녀가 귀국 후 입양해 키운 자녀들에게도 큰 상처를 줄 수밖에 없었다. 가해와 피해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는 사죄해야 하고, 피해자는 용서할 수 있다는 인식에도 의문을 던진다. 조선인 유타 순사의 자손은 징용 피해자 종태의 손녀 지유에게 사죄해야 할까. 일본인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은 남양 군도로 향하는 도중 미군의 공격을 받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사죄해야 하는가. 남양 군도 전쟁터에서 만난 일본군과 미군, 조선인 군속은 서로에게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이런 부분은 정말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했다. 가해와 피해를 분명히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용서와 사죄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군과 일본 순사와 징용 피해자의 후손이 만나는 자리를 소설 속에 넣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옳은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에 적이었던 자의 자손을 대면하면 어떻게 하라고 말할까요? 용서할 수 없다와 용서해라 둘 중 어느 것일까요. 어쩌면 용서란 말을 꺼내는 것도 싫어할 수 있겠죠.(469, 에필로그)

 

 

-해림 할머니, 마중-

 

위안부 피해자 해림 할머니의 삶을 보면서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의 나문희 배우가 떠올랐다. 평생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상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이 영화를 통해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는 세상으로부터 무려 세 차례의 가해를 받게 되는데, 1차는 위안부 당시의 고통이고, 2차는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고통이었다. 특히 남성 중심 문화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회적 낙인이 대표적인 2차 가해였다. 이 얼마나 지질한 가해인가. 게다가 3차 가해는 위안부 피해자의 주변 지인과 가족한테서 나왔다. 해림 할머니도 아들과 관계를 끊어야만 했다. 이 엄청난 가해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세상에 목소리를 내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큰 결심을 해야만 했을까.

 

해림 할머니는 자신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어떤 암울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기에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그 의미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을 겪어도 저 나무는, 잘리지만 않으면 상수리나무야. 누가 무슨 짓을 해도, 저 나무는 상수리나무라는 걸 잊지 말아.”(423, 3부 빛이 있다면)

 

해림 할머니는 어머니의 말씀을 잊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꿋꿋하게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이들을 마중하러 간 것이다. 사라져버린 종태를, 숨어버린 이옥을, 그리고 기다림 끝에 세상을 떠난 순이를 마중 나갈 수 있었다.

 

해림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나 마중간다였다고 한다.”(459, 3부 빛이 있다면)

 

 

--

 

이 소설 곳곳에는 이 등장한다. 빛이란 말을 보고는 광복을 떠올렸다. 다시 찾은 빛. 작가는 빛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 것일까.

 

“(종태가 쓴) 수기의 제목은 빛이 되어였고, 내용에도 이란 단어가 반복되더군요.”(26, 1부 끝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

 

나는 왜 일본의 패망 이후 찾아온 해방을 으로 표현했을지 매우 궁금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이 소설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삶이 매우 참혹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것처럼, 짙은 어둠은 빛에 더욱 강렬한 의미를 담아냈던 것이다.

 

과거의 참혹한 현장을 진술하다가도 불쑥 꺼내놓는, 추앙에 가까운 빛이란 단어에 번번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33, 1부 끝날 수 없는 것이 남아 있다.)

 

빛이 닿는 곳마다 따뜻해지고 환해지고 음지를 양지로 만들고 뭐든 변하게 만들지. 가슴 벅차고 대단한 일이지 않느냐?”(278, 2부 전쟁터로 간 사랑)

 

빛은 참혹함을 끝낼 수 있는 위대한 존재였다. 우리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박훈장은 종태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종태와 해림은 빛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종태의 꿈과 해림의 꿈은 서로 달랐지만, 고통과 아픔을 끝내고 용서와 사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점에서는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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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의 새 - 2025 박화성소설상 수상작
윤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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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의 새 (윤신우, 문학과 지성사, 2025, 320)

뭘 모르는지도 모른다는 것.”(78)

 

뭔가 거대한 바람을 맞고 있는 듯, 거센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듯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작가가 상상한 거대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2014)의 주인공 쿠퍼처럼 끝없이 이어진 도서관 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가가 창조해낸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이야기는 우주의 생성과 소멸부터 시작해 소행성의 충돌과 퉁구스카 대폭발을 지나 요정굴뚝새의 독특한 진화와 아날로그 시곗바늘에 이르기까지, 어지럽게 널려 있는 소재들을 이리저리 이어 나간다. 전혀 연관이 없는 것들이 우연히 나열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필연으로 엮여 있었다. 이 거대한 우주의 흐름을 창조해낸 작가는 큰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진율과 차수지-

 

주요 등장인물은 진율과 차수지, 두 여성이다. 진율은 천문 연구원이고, 차수지는 기자다. 진율은 우주의 근원을 연구하는 천문학자이기에 주인공으로 선택되었다고 생각했다. 우주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대상이니까. 그래서 이 소설 속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알 수 없는 사실들에 대한 충분한 개연성을 제공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날은 어떤 경계 같은 게 흐릿해지는 것 같아요.”(308)

 

한편, 차수지는 저자의 기자 경험이 녹아든 인물로, 선과 악을 가려낼 수 있는 경험을 가진 직업이기에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는 그 기준이 모호하다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거의 내내 큰 비가 내린다. 뿌옇게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비가 내리는 순간에는 앞뒤를 분간할 수 없으니까. 우주의 질서, 거대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인지 능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일 테니까. 연인 도준의 죽음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던 차수지는 이 경계의 모호함을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주인공 진율이 가진 불꽃, 열쇠를 일깨워주는 촉매자역할에 충실한다.

 

그런데 왜 주요 인물이 모두 여성일까 궁금했다. 남자인 도준은 차수지를 각성시키는 역할로 소멸하고, 다른 차원의 파수꾼이나 그림자는 모두 남자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신의 존재에 가장 가까운 새는 알을 낳고 품는 암컷이다. 그 새와 교감하는 진율도 여성이고, 알을 지키려는 차수지도 여성이다. 파수꾼이나 그림자는 두 여성에게서 미묘한 파동의 변화를 알아본다. 두 여성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직감한다. 아마도 여성이 남성보다 작은 틈에, 티끌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나는 두 인물, 진율과 차수지가 서로 만나기 위해 진동하는 밸런스 볼 같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크게 진동하지만, 결국은 시작점이면서 끝점이기도 한, 중간에서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두 진자같이 보였다. 그들의 만남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적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진자가 멈추게 될 것이니까. 이 소설이 진율과 차수지의 이야기를 번갈아 제시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꿈과 무의식-

 

진율은 어렸을 때 어떤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꿈을 잃는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무의식의 모호함을 불안해하고, 정확히 인식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에서 안정감을 찾는다. 철저히 의식적인 인간으로만 살아가려 한다.

 

삶의 양식이든 생활이든 나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든, 모든 걸 직접 제어할 수 있다는 건 내게 꽤 중요한 의미였다.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되는 예측 가능한 통제 말이다.”(82)

 

진율은 우연히 잠을 자던 도중 죽어버린 도준의 이야기를 듣고는 아예 잠을 잃어버린다. 잠을 잃어버린 그녀는 완전히 무의식으로부터 단절된 상태다. 육체는 피곤함으로 피폐해져 가지만 정신만은 더욱 또렷해지는 것을 느낀다. 진율의 특별함을 발견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은 그녀의 잠과 꿈과 무의식을 앗아가 버린다. 아마도 꿈이, 무의식이 우리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어서일 것이다.

 

육체가 삐그덕대는 게 느껴졌다. …… 이해가 안 가는 건 정신 쪽이었다. 날이 갈수록 가중되는 육체의 고통과 달리 혼탁하던 정신은 점점 한겨울 호수처럼 청명해지는 것이었다.”(36)

 

그런데 사실 육체와 정신이, 꿈과 현실이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의식과 무의식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삶의 모습을 온전히 의식적으로만 계획하고 결정하며 수행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 당도할 때가 있다. 평소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행위도 가끔씩 한다. 마치 차수지가 평생을 먹지 않던 옥수수를 무려 두 개나 구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거나, 자유의지가 마치 의식적 영역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판단일 것이다.

 

작가는 우리의 우주를 도서관에 빗댄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에 들어가, 긴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 중 하나를 펼쳐본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책에 적힌 글씨들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마치 모든 것이 글자(의식)로만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책은 대부분 여백(무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에 글자만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여백이 있기에 글자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여백이 있기에, 우연이 있기에, 낭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뻐꾸기 시계의 뻐꾸기-

 

진율은 새와 교감한다. 새는 꿈을 통해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의, 그 이전 주인의 기억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는 찾아와 전화벨 소리 같은 울음소리를 낸다. 그것도 정확히 열한 번. 처음에는 숫자 11이 무엇을 뜻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진율이 자기 안의 불꽃을 되찾자 새는 정확히 열두 번 울음소리를 낸다. 새는 시간을 알리는 존재였다. 마치 뻐꾸기 시계의 뻐꾸기처럼. 작가는 시간을 알리러 나오는 뻐꾸기를 소설 속 신과 같은 존재로 상상해낸다.

 

시곗바늘 두 개 모두 숫자 12를 가리킨다. 12시일까 0시일까. 작가는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지점에서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상상해낸다. 1211 다음으로의 진화를 의미하지만, 0은 모든 것이 소멸한 원점으로의 회귀다. 뻐꾸기는 울음소리를 열두 번 낼 것인가, 아니면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이 소설에서 가장 열등한 존재로 규정된 티끌, 바로 인간이었다.

 

한낱 인간한테, 그것도 나 같은 평범한 인간한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 이 거대 우주에 존재한 억겁의 시간 동안 내 완벽한 설계와 흐름을 꽤 자주,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버린 건 번번이 너희였거든. 고작 45억 년밖에 안 된 이 어린 세계, 무지하기 짝이 없는 너희, 바로 너희의 불꽃이 말이야.”(276)

 

인간은 뻐꾸기 시계의 뻐꾸기였다. 자신들이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무지한 존재. 단지 시간을 알리기만 하는 하찮은 티끌 같은 존재. 하지만 결국 우주의 시간이 12시인지, 0시인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었다.

 

완벽한 톱니에 걸린 티끌 하나가 우주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두고 봅시다.”(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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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럽 왕국사 -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들끓는 민족들의 땅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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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중앙유럽 왕국사 (마틴 래디, 까치, 2025, 초판 1)

 

중앙유럽(Central Europe)’은 낯선 용어다. 대체로 서유럽, 동유럽으로 구분된 서양사에서는 서유럽이 중심이고, 동유럽은 주변에 불과했다. 기존의 동유럽은 로마의 미개척지이고, 야만인의 무대이며, 서유럽 도시의 세련된 문화를 찾을 수 없는 낙후된 농촌이었다. 하지만 중앙유럽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저자는 중앙유럽(동유럽)새로운 역사(A New History of Central Eutope)’를 이 책에 담아냈다. 저자는 서유럽에 종속된 동유럽이 아닌, 서유럽과 다른중앙유럽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2,000년 간 역사를 풀어낸다.

 

또한, 저자는 중앙유럽을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닌 여러 민족이 뒤섞여 상호 작용한 복합적인 공간으로 본다. 그래서 저자가 그려내는 중앙유럽은 폴란드, 헝가리 등 몇몇 동유럽 국가를 넘어 스위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지리적으로 확대된다. 부제 그대로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지역을 모두 중앙유럽의 무대로 보고, 이곳에서 살았던, 또는 이곳으로 이주하거나 떠나간 사람들의 역동적인 관계를 들끓는모습으로 그려낸다. 서양사 수업에서 단편적으로 암기했던 중요한 사건들이 그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2022)󰡕에 이어 이번 󰡔중앙유럽 왕국사(2025)󰡕도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마틴 래디는 역시 믿고 읽을 수 있는 저자다.

 

 

-34개의 주요 장면으로 본 2,000년 중앙유럽-

 

저자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총 34개의 장으로 나눈다. 교과서처럼 주요 왕조나 사건, 시대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저자가 뽑은 ‘(역사적) 주요 장면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마치 34장의 아름다운 그림을 펼쳐놓고 그것의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재미난 이야기 같다. 34장의 그림을 상상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장이 순식간에 끝난다. 분량이 딱 지루하지 않고 좋다. 이런 식으로 34개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한다. 그렇게 저자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짤막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서론에서 유럽인의 상상 속 존재인 개 인간이 나온다. 삽화가 실려있지 않아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옛사람들은 개 인간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궁금해하던 중이었는데, 그들이 상상에서 튀어나와 현실에서 중앙유럽을 휩쓸었다. 역사 속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한 훈족, 몽골-타타르족 같은 외부 침입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이런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서유럽과 다른중앙유럽-

 

저자는 중앙유럽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서유럽과 비교’, ‘대조하는 방법을 쓴다. 중앙유럽이 서유럽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힐 때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서유럽의 모습을 근간으로 중앙유럽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중앙유럽의 역사적 경험은 서유럽과 다르다. 그 경험의 추세는 대체로 서유럽에서 벌어진 일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흉내 내는 듯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유럽의 경우보다 더 힘차게 고동치거나, 마치 뒤틀린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다른 특성을 띠고 있다.”(19, 서론)

 

중앙유럽을 서유럽에 빗대 설명하면서도 중앙유럽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서유럽에 의존하는 모습이 아닌, 중앙유럽이 독자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친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중앙유럽(19)’이라는 표현은 그런 저자의 생각을 잘 담고 있다.

 

 

-크고 작은 보석의 모음, 중앙유럽-

 

책 옆에 메모지를 붙인다. 저자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중요한 사건, 흥미로운 장면, 주요 등장인물, 예술 작품을 옮겨 적는다. 메모한 내용을 보며 하나씩 작은 구슬과 큰 구슬을 꿰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저자가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작은 구슬과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인 큰 구슬을 하나씩 번갈아 꿰어두면 뭔가 근사한 보석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중앙유럽의 지명, 인명이 모두 내게는 낯설다 보니 이것들을 차분하게 꿰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이 모이고 나면 결국엔 뭔가 더 선명한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책에 있는 지도와 역사 지도와 구글 현재 지도를 펼쳐두고 지명들을 하나씩 표기해본다.

 

모자이크처럼 색색의 조각으로 구성된 중앙유럽의 모습을 지도나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그것을 내가 정리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지 상상해본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한 민족의 후예로 살아온 내게는 이토록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역사를 읽어본 경험이 없어서다. 한국사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강조하고, 동아시아사에서 중원 왕조의 중국 통일을 가르치기만 했기에, 중앙유럽의 혼란스러움이 오히려 나를 매료시켰다. 선명한 답이 없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서졌기에 중앙유럽은 오히려 서유럽과 다른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세계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중앙유럽의 역사는 낯설었지만,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의외로 익숙했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을 제외하더라도 중앙유럽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물들은 웹툰이나 소설, 게임에서 자주 등장했다. 내가 가끔 하는 게임에 최근 새로운 캐릭터들이 많이 추가되었는데, 그들이 대부분 중앙유럽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소재가 중앙유럽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인종, 민족, 종교와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중앙유럽은 천재적 이야기꾼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중앙유럽의 역사는 우리 삶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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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인류
이상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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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사소한 인류 (이상희, 김영사, 2025, 11)

 

제목‘OO한 인류에서 ‘OO’에 어떤 말을 넣어야 어울릴까.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제목 맞추기 이벤트였다. 한국인 최초 고인류학을 전공한 저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을지 상상해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상희 교수가 사소라는 말을 넣은 이유가 무엇일지 대강 상상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사소(些少_작디 작다.)’ 또는, 사소(辭疏_말로 소통하다)’의 뜻을 담고자 한 것으로 생각했다. 화석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고인류의 모습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저자가 미국에서 연구자로 살아가면서 말로 소통했던 결과물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저자의 사사로운 이야기(6, 프롤로그). 저자는 현재 인류의 모습을 통해 고인류의 삶을 비판적으로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 사소함이 우리의 편견과 지적 한계를 극복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사소(些少)한 고인류-

 

화석으로 남은 우리의 옛 조상은 그들의 작은 파편 중의 파편 중의 파편이다. 누구의 성에도 안 차는 이 극소량의 파편이 말해주지 않는 나머지는 상상과 복원으로 메꿔진다.”(56, 선사시대의 사내들)

 

저자는 본인이 수십 년을 연구한 고인류학을 성장 중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고인류학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저자의 마음이 참 좋았다. 자신의 평생 연구를 절대적 진리라 내세워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학자이면서 자신의 성과를 겸손하게 평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그런 겸손함이 오히려 손해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유교 문화권에 사는 나로서는 그 마음이 저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소(些少)’한 제목이 더욱 마음에 크게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극소량의 파편으로 만들어낸 기존의 고인류학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온갖 상상과 추측과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특히 루시화석에 대해 우리가 가진 여성 편견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고, ‘몽골이라는 인류학 용어가 우리에게 어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베이징인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선전이 고인류에게 투영될 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사냥이라는 말에 현대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되면서 고인류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1부 배우는 인류에서는 우리가 지금껏 상식처럼 통용되던 고인류학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은 올바르게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잘 정리된 부분이었다. 기초 과학 소양이나 탐구 방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저자가 고인류학을 전공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을 우리에게 쉽고 편하게 정리해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가장 압축적으로 강의할 수 있는 탁월한 교수법(한국에서 주로 통용되는, 저자처럼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사소(辭疏)한 저자-

 

엄마가 된 뒤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의 성격을 가늠해 보곤 했는데, 반려견도 다르지 않은 듯 하다.”(172, 어르신이 되는 길)

 

2부 살아있는 인류에서는 정말 저자의 생생한 삶이 펼쳐진다. 결혼과 유산, 부모님의 죽음, 반려견 기르기까지 그녀가 실제 살아있는 인류로서 경험한 생각들이 나열되어 있다.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이라면, 부모님의 죽음을 경험한 중년이라면,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저자의 일상에도 고인류학적 깨달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후각이 깊은 기억을 관장한다는 점(104), 후각이 시간이 흐르면 무감해져서 우리가 막강한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119)이 재미있다. 그녀는 단순히 살아있는 인류의 특징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바꿔나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후각의 막강한 적응력을 확인한 저자는 그 적응력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해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자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반려견의 행동 교정 과정에서 칭찬하는 교수법(224)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강의실에서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요즘은 거리낌 없이 생리대를 들고 다니고 생리 휴가나 생리통으로 인한 결석 통보도 일상적이다. 완경(폐경)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244, 완경과 할머니 가설)

 

3부 여자라는 인류에는 특히 저자가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얻게 된 성찰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소수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공론화)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안일 전쟁(191)’이다. 저자와 남편은 집안일 분담 문제로 다퉜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 다툼 이후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두 사람이 통계학을 전공해서 일지 모르지만, 집안일을 수치화해서 분담률을 확인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부싸움마저도 학자처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 그것을 부부가 공론화해서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 그 결과를 수긍하고 최종적인 합의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총천연색의 다양성-

 

저자는 고인류학이, 현대 우리 삶이 많은 편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배들의 노력이 자신의 기반이 되었듯, 자신의 노력이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전략적이고 복잡한 본능의 총천연색 다양성을 지우고 흑백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61, 본능이 부르는 소리)

 

여자다움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중 가부장제가 원하는 몇 얼굴만 여자다움으로 포장되어 왔을 뿐이다.”(183, 여자답다는 말)

 

목욕탕에서 마주한 몸들은 천차만별이었다. 피부색도 생김새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속옷 광고에서나 보던 몸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팔다리의 길이에서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까지 서로 비슷한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246, 목욕탕의 비너스)

 

 

저자는 현대 인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고인류학도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녀가 만난 세라 넬슨의 사례를 통해 젠더 관점도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이 누구일지를 추론하는 과정에서도 더 크고 화려한 무덤의 주인이 꼭 남자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도 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매년 가졌던 의문 중 하나였다. 여성은 왜 교과서에서 주목받지 못할까. 여성은 왜 학력평가나 수능에서 출제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왜 여학생이 아닌 나만(나는 남자 교사다)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저자의 연구 활동을 통해 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인류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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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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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유전자와 유전력, 돌연변이에 대한 잘못된 일반 상식을 바로 잡는 책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펼친다.

 

유전학에 관한 도킨스의 책을 읽다보면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운명을 결정할 것처럼 느껴지고, 행동 심리학과 교육학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환경이 얼마든지 인간의 본성(유전)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주요 생각은 그 중간 즈음에 자리한다.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선천적인 영역도 있지만, 환경에 영향을 받아 변화할 수 있는 뇌 가소성의 영역도 분명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두 입장의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거나 두 입장을 모두 옹호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유전 정보가 단백질로, 세포로 발현되는 과정에서 우연한 선택이 작용하고, 그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서 유전 정보에 저장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세포 분열 과정이 유전 정보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그 돌연변이는 생명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한 인체 내에 축적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유전적 변이와 발달 변이가 매우 무작위적으로,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우리의 '선천적'인 성격 특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어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지라도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 환경적 측면보다는 선천적인 발달 과정이 인간의 성향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다. 특히 그는 뇌의 가소성을 가지고 이를 설명하는데, 뇌 시냅스가 인간의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발달하거나 퇴화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인간의 주관적 성향이라 주장한다. , 환경의 영향보다는 선천적으로 형성된, 고정적인 성향이 뇌 가소성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유전자냐 환경이냐'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유전학의 발달이 가져올 미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저자는 특정 유전 정보가 인간의 형질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고차원적인 뇌 작용(심리적, 정신적 작용)1:1 대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 특정 유전자를 추가하거나 제거한다고 해서 인간의 지능이 더 높아진다거나, 유전 질환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의 유전 형질을 선택하는 문제나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미래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유전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유전자 편집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데 저자의 주장은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저자는 우리의 뇌가 고차원적인 수준의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 만큼, 발달 과정이나 복제 과정에서 오류(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돌연변이를 줄이거나 방지하는 안전 장치가 생물학적으로 큰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설명한다. , 인간의 일정 비율에서 돌연변이에 의한 자폐, 뇌전증, ADHD가 발생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정밀한 기계일수록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그러니 인간의 사고가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돌연변이의 축적에 의한 질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돌연변이에 의한 사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유전적 질환을 치료와 예방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할 것이다.

 

나는 제9장 그와 그녀에서 정자와 난자에 대한 설명을 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물론 X, Y 염색체로 생식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생명과학에서 이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하지만 다음 설명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만 같다.(이 부분은 저자의 주장이 가장 잘 응축된 부분이기도 하다.) 난자는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돌연변이가 적지만, 정자는 남자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롭게 분열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자 나이 45세 이상이 되면 돌연변이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지금껏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건강, 나이가 더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분명 이는 전통적인 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하지만 유전학에 대한 기본 상식이 늘어날수록, 저자의 책을 읽었으므로 나는 남자의 건강, 나이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유전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분자유전학, 신경유전학 전공자라 관련 영역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기초와 사례들을 제시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내가 유전학에 대한 문외한이다 보니 저자가 사용한 개념어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유전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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