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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럽 왕국사 -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들끓는 민족들의 땅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5년 10월
평점 :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중앙유럽 왕국사 (마틴 래디, 까치, 2025, 초판 1쇄)
‘중앙유럽(Central Europe)’은 낯선 용어다. 대체로 서유럽, 동유럽으로 구분된 서양사에서는 서유럽이 중심이고, 동유럽은 주변에 불과했다. 기존의 동유럽은 로마의 미개척지이고, 야만인의 무대이며, 서유럽 도시의 세련된 문화를 찾을 수 없는 낙후된 농촌이었다. 하지만 중앙유럽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저자는 중앙유럽(동유럽)의 ‘새로운 역사(A New History of Central Eutope)’를 이 책에 담아냈다. 저자는 서유럽에 종속된 동유럽이 아닌, 서유럽과 ‘다른’ 중앙유럽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2,000년 간 역사를 풀어낸다.
또한, 저자는 중앙유럽을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닌 여러 민족이 뒤섞여 상호 작용한 복합적인 공간으로 본다. 그래서 저자가 그려내는 중앙유럽은 폴란드, 헝가리 등 몇몇 동유럽 국가를 넘어 스위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지리적으로 확대된다. 부제 그대로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지역을 모두 중앙유럽의 무대로 보고, 이곳에서 살았던, 또는 이곳으로 이주하거나 떠나간 사람들의 역동적인 관계를 ‘들끓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서양사 수업에서 단편적으로 암기했던 중요한 사건들이 그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2022)에 이어 이번 중앙유럽 왕국사(2025)도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마틴 래디는 역시 믿고 읽을 수 있는 저자다.
-34개의 주요 장면으로 본 2,000년 중앙유럽-
저자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총 34개의 장으로 나눈다. 교과서처럼 주요 왕조나 사건, 시대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저자가 뽑은 ‘(역사적) 주요 장면’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마치 34장의 아름다운 그림을 펼쳐놓고 그것의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재미난 이야기 같다. 34장의 그림을 상상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장이 순식간에 끝난다. 분량이 딱 지루하지 않고 좋다. 이런 식으로 34개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한다. 그렇게 저자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짤막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서론에서 유럽인의 상상 속 존재인 ‘개 인간’이 나온다. 삽화가 실려있지 않아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옛사람들은 개 인간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궁금해하던 중이었는데, 그들이 상상에서 튀어나와 현실에서 중앙유럽을 휩쓸었다. 역사 속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한 훈족, 몽골-타타르족 같은 외부 침입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이런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서유럽과 ‘다른’ 중앙유럽-
저자는 중앙유럽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서유럽과 ‘비교’, ‘대조’하는 방법을 쓴다. 중앙유럽이 서유럽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힐 때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서유럽의 모습을 근간으로 중앙유럽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중앙유럽의 역사적 경험은 서유럽과 다르다. 그 경험의 추세는 대체로 서유럽에서 벌어진 일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흉내 내는 듯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유럽의 경우보다 더 힘차게 고동치거나, 마치 뒤틀린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다른 특성을 띠고 있다.”(19쪽, 서론)
중앙유럽을 서유럽에 빗대 설명하면서도 중앙유럽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서유럽에 의존하는 모습이 아닌, 중앙유럽이 독자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친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중앙유럽(19쪽)’이라는 표현은 그런 저자의 생각을 잘 담고 있다.
-크고 작은 보석의 모음, 중앙유럽-
책 옆에 메모지를 붙인다. 저자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중요한 사건, 흥미로운 장면, 주요 등장인물, 예술 작품을 옮겨 적는다. 메모한 내용을 보며 하나씩 작은 구슬과 큰 구슬을 꿰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저자가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작은 구슬’과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인 ‘큰 구슬’을 하나씩 번갈아 꿰어두면 뭔가 근사한 보석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중앙유럽의 지명, 인명이 모두 내게는 낯설다 보니 이것들을 차분하게 꿰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이 모이고 나면 결국엔 뭔가 더 선명한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책에 있는 지도와 역사 지도와 구글 현재 지도를 펼쳐두고 지명들을 하나씩 표기해본다.
모자이크처럼 색색의 조각으로 구성된 중앙유럽의 모습을 지도나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그것을 내가 정리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지 상상해본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한 민족의 후예로 살아온 내게는 이토록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역사를 읽어본 경험이 없어서다. 한국사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강조하고, 동아시아사에서 중원 왕조의 중국 통일을 가르치기만 했기에, 중앙유럽의 혼란스러움이 오히려 나를 매료시켰다. 선명한 답이 없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서졌기에 중앙유럽은 오히려 서유럽과 다른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세계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중앙유럽의 역사는 낯설었지만,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의외로 익숙했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을 제외하더라도 중앙유럽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물들은 웹툰이나 소설, 게임에서 자주 등장했다. 내가 가끔 하는 게임에 최근 새로운 캐릭터들이 많이 추가되었는데, 그들이 대부분 중앙유럽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소재가 중앙유럽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인종, 민족, 종교와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중앙유럽은 천재적 이야기꾼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중앙유럽의 역사는 우리 삶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