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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천사들의 엄격함 (윌리엄 에긴턴, 까치, 2025, 초판 1쇄)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나는 이 세 사람 모두가 낯설다. 그나마 칸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많아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철학책일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에 철학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약간은 자신이 있었다. 분명 나는 이 책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특히 보르헤스는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발견한 물리학자였으며, 철학자 칸트와 함께 모두 그리스 철학과 중세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책은 하나의 좁은 영역을 깊고 정확하게 파헤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세상의 전체인 “실재(實在)”를 들여다보려고 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기초 소양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무슨 말인지, 저자가 사용하는 관용 표현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뭔가 읽는 동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결국 돌아서고 나면 무슨 의미인지를 한참 고민해야 하는 그런 정답이 없는 모호한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위 세 인물의 삶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적 순서대로 인생의 주요 사건을 나열하는 식이 아니라, 저자가 하고 싶은 주제와 의도에 맞는 인물의 삶을 특히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알아내야 할 그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인간은 길어야 백 년을 살 수 있는 존재다. 내가 가르치는 역사도 그래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채 백 년을 살 수 없는 존재가, 살면서 깨달은 지식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었던 것. 그래서 인간의 삶이 조금은 더 윤택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는 가장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건과 사건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배경’을 원인으로 하여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어떤 ‘결과’ 또는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다. 결국, 그 인과 관계가 시험 문제가 된다. 학생들이 그래서 역사를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는, 우주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가진 존재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시간적 변화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없다. 시작은 곧 끝이요, 끝과 시작이 결국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른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왜곡 현상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설명을 약간은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우주)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는 너무도 버겁고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국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인간이 가진 환상이나 편견이 실재(實在)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자는 그래서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세 사람을 이 책에 모두 모아 두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 깨달음을 얻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 깨달음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재밌는 점은, 그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지만, 유한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깨달은 존재들이지만, 결국 그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죽었다.
-과학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
오늘날 과학은 모든 학문을 제치고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문이과 구분이 폐지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이과 우위 현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이 인류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과학은 반드시 철학이 필요하다. 이 책에 따르면 신학과 종교도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러한 이성을 과도하게 투사할 때, 우리는 세계에 관한 일관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그 도구(이성)로부터 우상을 만들고 그 개념으로부터 유령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영원하고 형언할 수 없는 진리를 가정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가 자주 그러한 가정을 변질시켜 만들어내는 유령과 우상은 과학의 성공을 방해하기만 하는 형이상학적 편견으로 반드시 전락한다.”(79쪽, 제2장 바로 이 순간의 짧은 역사)
고학력자이면서 상류층인 사람들이 종교적 우상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이성적인 사회에서는 절대로 통할 수 없는 논리를 내세우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우매하기 때문도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다. 칸트의 말처럼 그들은 ‘형이상학적 편견’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도한 이성을 내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지대(90쪽)’개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세상을 재단하여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나눈다거나,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문제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는 행위는 반드시 극단적인 결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도보여행을 떠난 것처럼, 칸트가 지인들과 만찬을 즐겼던 것처럼, 우리는 과학으로 절대적 진리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성이 너무 과도한 것은 아닌지, 편견과 실수가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도 필요하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리스 역사를 대충 훑어보면서, 나는 소피스트들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가르침으로 당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일부 주장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리스 철학에 대해, 소피스트들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제논의 역설처럼 이 책에서 다뤄진 철학적 난제들이 실제 우리 삶으로부터 출발했고, 그것에 대한 오랜 논쟁과 탐구의 결과가 현재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철학과 과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플로티노스의 책(178쪽),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219쪽),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291쪽), 단테의 신곡까지 위 세 사람의 깨달음에 영향을 준 중요한 책과 그 흐름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책을 찾아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겪었던 그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조금은 극복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신비에 대한 답을 찾기를 원하지만, 또한 확정적으로 매듭짓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또한 말이 되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알고 싶어한다.”(263쪽, 제9장 측정하기 좋게 만들어진 우주)
이 책이 내게 어려운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는 책이지만, 내가 그 지식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다.
“만일 나무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몰랐다면, 쓰러지는 소리가 난 것인가?”(114쪽, 제3장 시각화하라!)
이 문장도 얼마 전 보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2024)”에서 본 대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없는 숲속 펜션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단순한 묘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게 철학적 난제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 관련된 철학적 난제는 매우 많을 것이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