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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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창비교육, 2025, 가제본)

 

서평단을 신청해 가제본을 받았다.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만 읽을 수 있었는데, 가장 아쉬운 점은 역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소개를 듣고 단번에 읽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정작 그 부분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읽었으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쓴 글을 통해 캐나다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고, 정약용과 천주교 도웁 시기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가족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도 소설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공의 내면을 전지적으로 설명해주는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K-역사-

 

일단 세계가 주목한 K-역사 미스트리 소설이란 표현 덕분에 이 책의 역사적 배경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다. 캐나다에 오래 살아온 사람은 당연히 한국 역사를 쉽게 접할 수 없었을 텐데, 상당히 고증에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와 여성의 지위, 포도청의 종사관과 다모의 옷차림과 활동까지 소설을 구성하는 주요 장면마다 저자가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많은 사람이 ‘K-역사 소설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내가 직업적으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약간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첫 페이지에서 궁궐 밖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비단옷을 입은 선비와 목에 염주를 건 스님이 길거리를 오간다는 묘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또한, 주인공 (, 이야기)이 글자를 모른다는 설정은 약간 과도하다고 생각했다. 1800년이고, 관청에 소속되어 다모로 활동하는 여성이 한글조차 알지 못했다면 당연히 수사에 참여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이나 노비들도 전문직으로 근무하려면 언문 정도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운명-

 

가장 마음에 드는 설정은 주인공 설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고자 한 모습이다.

 

운명, 진실처럼 굳건한 족쇄.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 것.”(55)

 

조선 시대 여성은 분명 포졸 견이 말하는 것처럼 남 뒷바라지나 하며 살아가는 게 현실이었을 것이다. 여성이 능력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다는 상상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인공 설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한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황후를 꿈꾼다. 하지만 좀 아이러니한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설이라면 황후가 아니라 종사관, 포도대장과 같은 지위를 꿈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수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직. 황후는 여성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이긴 하지만, 결국 황제에 의해 간택되어야만 가능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여성의 직업 목표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시기이니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당시에도 분명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었기에 약간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천주교와 평등-

 

이 소설의 갈등은 천주교에서 나온다. 천주교도는 조선의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는 이교도 집단으로 등장하고, 그로 인해 당연하게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들이 하인이나 노비조차도 평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조선 사회에서 중시하는 신분과 명예를 더럽힌다고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이 약간 조선에 대한 오해에서 만들어진 설정이 아닐까 싶었다. 천주교가 평등의 교리를 내세운 것은 맞지만, 가장 처음 받아들인 것은 오히려 양반(남인 계열)이었다. 게다가 평민에게까지 교세를 확장하고자 노력한 이들도 대부분 양반이었다. 그리고 초창기 천주교를 살펴보면 남녀가 따로 예배하기도 했고, 신분을 부정하고자 했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가장 큰 갈등은 조상에 대한 제사와 신주의 문제였다. 당시 지배층은 유교 가치관과 천주교 교리가 충돌하는 지점을 우려했던 것이지, 당연히 양반과 평민은 평등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평등을 천주교도가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그 증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이용해 타인을 겁박한다는 것 자체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 소설에서 묘사된 천주교도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습과 크게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한 종사관과 다모 설-

 

외로운 산 같은 고산(孤山) 한 종사관, 호기심이 많아 남의 말을 엿듣는 다모 설(). 둘은 어떤 관계일까.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가제본만으로는 둘의 관계를 결국 알아낼 수 없었으니. 너무도 아쉽다. 처음 한 종사관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설이와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듯싶었으나, 설이가 한 종사관의 명령을 듣지 않자 둘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심지어 설이가 한 종사관을 의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다가 가제본은 끝난다. 가제본 만드신 분이 큰 그림을 그리신 게 분명하다. 마치 드라마 마지막에 최고조에 이른 갈등은 결론 없이 끝나기 마련이다. 독자의 궁금증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 후 갑자기 마무리해버리는 이 잔혹한 결정! 매우 존경스럽다.

사실 나는 둘이 연인(戀人)보다는 잃어버린 친 오누이이길 바란다. 그토록 간절히 찾길 바라는 가족, 애틋한 마음만 품고 있는 가족, 절대로 배신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서로를 믿어줄 수 있는 가족 말이다. 그 결론만이 증오에 가득 찬 한 종사관을 구할 수 있을 것이며, 어려움에 부닥친 다모 설이를 도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곳곳에 그와 유사한 언급한 것으로 보아 내가 그럴듯한 결론을 유추한 게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흩어진 가족은 종사관 나리와 설이이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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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지능 -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일곱 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 까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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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수학지능,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7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까치글방, 2025, 초판 2)

 

나는 소위 말하는 전형적인 수포자였다. 수학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언어였으며, 암기의 대상일 뿐이었다. 모든 공식과 모든 문제를 암기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수학에서 쓰디쓴 패배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수학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그 두려움만 키워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책을 만났다. 교황청에서 발급하던 면벌부를 구매한다면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이 책은 평생 마음의 짐이었던 수학이라는 원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품게 해 주었다.

저자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지적하고, 인공지능에 의존하게 되었을 때 발생할 문제를 방지할 목적으로 이 책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평생을 오해한 수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수학은, 특히 저자가 지적한 수학 지능은 내가 좋아하는 역사를 닮았다. 우리의 수학 교육이 품고 있는 원천적인 한계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지금껏 몰랐을 뿐이다. 어쩌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수학을 좋아하는 그런 상상할 수 없는 모습까지도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았다.

 

 

-인간과 기계-

 

저자는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에 가까워지고 있는 기계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인간이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기계를 배제해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위해 기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 지능은 생성형 AI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가드레일인 것이다.”(13, 한국어판 서문)

 

그래서 수학 지능은 과거 오랜 시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인류의 유산이지만, 인공지능이 우리 곁에 바짝 다가올 미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게다가 인간이 인공지능을 통제하고 활용하는 것은 현재의 수준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참 아이러니한 책이다. 기계로 대체될 운명을 맞이할 수학자가 그 운명을 막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그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욱 자신감 있어 보이고 좋았다. 암울한 미래를 예측하더라도 당당히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저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나는 수학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문제가 주어지면 그 문제를 풀이할 해법과 정답을 암기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철저히 계산의 과정에만 머무른 것이다. 수학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아이디어였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조선의 수학자 홍정하(이창숙)”를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수학이 곧 일상생활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때부터 수학의 역사, 수학자의 역사를 찾아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수학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수준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학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이 책을 보면서도 역시 쉽게 동의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수학의 역사가 지루한 계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노력(25)’이라는 표현을 보고 놀랐다. 최첨단 계산 도구가 인간을 계산에서 벗어나게 할 때마다 엄청난 도약이 있었다는 표현은 더욱 놀라웠다. 나는 계산이 수학 전부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나는 수학에 대한 오랜 트라우마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수학의 매력-

 

나는 오랜 시간 수학이 내 삶과 동떨어진 외계 언어라고 생각했다. 이 책에도 잘 나와 있지만, 수학자들이 단순한 수식으로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나와 같은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기호의 장벽(125)’이 세워진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간단한 수식으로 아이디어를 변환하고 증명하는 과정이 아름답다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사례들이 이 책에는 많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수학이 우리 일상에 매우 밀접하고, 수식이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마치 역사에서 각종 율령과 통치 제도로 정비되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이 선택된 이유는 우리의 해부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손가락 10개는 모든 계수기 중에서 휴대성이 가장 좋으므로 10은 군의 크기로서 가장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선택이다.”(109, 표상)

 

동아시아사를 가르칠 때, 칭기즈 칸이 10진법을 채택한 것이 매우 큰 혁신이라고 설명한다. 부족 단위로 흩어져 살아가던 유목민을 10진법으로 편제하게 되는 천호백호제의 등장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10진법이 어떤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는 알지 못했다. 바로 그 애매했던 지점을 이 책은 속 시원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세상이 어떤 수학적 아이디어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나는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다. 아마도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일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마신 음료수 병의 크라운 캡에서도 말이다.

 

증명은 마치 애거서 크리스티의 스릴러 소설처럼, 탐정이 능란하게 단서를 조합하여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만큼이나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176, 추론)

 

내가 역사책을 읽을 때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조각조각 흩어진 과거 사실들을 끌어모아 그것을 가장 개연성 있게 연결하여 당대 모습을 밝혀내는 것. 나는 설득력이 있는 그 과정을 매우 사랑한다. 그런데 그것이 추리소설의 쾌감이나 수학의 증명과도 같은 과정일 것이라곤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내게 수많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한 덩어리로 훅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수학적 개념들이 마구 튀어나오지만,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수학과 학교 교육-

 

저자에 따르면 7가지 수학 지능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그 선천적 능력을 우리 학교 교육이 박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정답만을 강요하는 폐쇄적인 교육 방식으로 우리 아이들을 괴롭혀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정규교육을 받으며 수학에 두려움을 가졌던 것처럼, 나도 우리 학생들에게 역사라는 트라우마를 심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희(놀이)로서의 교육과 문제 제기(질문)로서의 교육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교육은 일단 즐거워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교육은 의심과 질문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답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 시험 제도와 서열화부터 정리되어야 한다. 정답은 학생이 스스로 찾아나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교육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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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 - 우리 근현대사의 무대가 된 30개 도서관 이야기
백창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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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 (백창민,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왔던 길(과거)’을 모르고, 어찌 선 자리(현재)’를 알 것이며, 어떻게 갈 길(미래)’을 밝힐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9, 들어가는 말)

 

책사냥꾼도서관 덕후인 저자가 써 내려간 도서관사()를 담고 있다. 나도 책을 좋아해서 집 주변에 큰 도서관이 없다는 점을 늘 아쉬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 선생이면서도 저자처럼 도서관 그 자체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도서관이 있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식이었다. 책은 어디서든 구할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책은 거의 구매해서 봤으니까.

그런데 도서관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고,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도서관이 매우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점. 일제 강점기 도서관은 사상을 통제하는 기지였다는 점. 또한, 도서관은 대한민국 민주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간이었다는 점 등이다.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역사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 좀 과한 표현일까. 그동안 진주알로만 알던 역사를 도서관이라는 실로 제대로 꿰매어 엮은 기분이 든다.

도서관의 역사 하나만으로도 우리 근현대사를 이렇게 정교하게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매우 많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 근현대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50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로 가득 차 있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중적 유산, 도서관-

 

정조의 규장각, 고종의 집옥재.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분명 우리에게도 도서관의 뿌리는 존재한다. 하지만 조선의 멸망과 함께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를 약탈하기 위해 민가를 드나들었던 프랑스군이 남긴 기록에서 허름한 집에도 책이 있어 놀랐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분명 책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충분히 도서관을 세워 인재를 양성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저자도 지적하고 있지만, 도서관은 그저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점령된 지 오래다. 장서가 얼마나 있는지, 책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보다 열람실 좌석 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지만, 이것이 일제 강점의 잔재라고 한다.

 

식민 잔재는 청산하지 못하고, ‘유산은 상실해 버린 불행한 역사가 압축된 곳이 바로 철도 도서관이다.”(47, 철도도서관)

 

비단 도서관만의 문제이겠는가.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할 수 없는 것도, 우리의 유산을 모두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도, 모두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다. 도서관 사서가 도서관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교사인 내가 학교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잔재는 계속해서 우리의 전통인 양 미래를 잠식할 것이고, 소중한 유산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테니까.

 

 

-도서관의 존재 이유-

 

동양의 먼 나라에서 우리 도서관을 찾아 준 것이 더 고맙다.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서 도서관은 존재한다.”(251, 도서관 앞 광장)

 

도서관은 왜 필요할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일까, 지식의 연구와 발전을 위해서일까. 나는 도서관이 찾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 문장이 가장 가슴에 뜨겁게 와 닿았다. 이 책에 따르면 도서관은 늘 권력자의 의도에 의해 존재하거나, 또는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독재 정권 시절에는 책을 보관하기에도 불편한 건물에 억지로 욱여넣거나, 사람들이 찾기도 어려운 곳으로 도서관을 옮겨버리기도 했다. 통치에 필요하지 않은 책은 불태워지고, 쓸모를 다 했다고 여겨진 책들은 습기 찬 바닥에 내팽개쳐지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존재 이유를 가진 도서관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은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쓰는 사람, 책을 만드는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물론 책뿐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도서와 관계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도서관의 역할이다. 도서관은 열심히 책을 모아야 하고, 또 그것을 활용하기 편리하게 분류해야 한다. 또한, 어떤 자료가 더 좋은 것인지, 더 가치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 역할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사람은 바로 사서다. 사서는 도서관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는 직업이어야 한다.

 

 

-새로운 독서 문화-

 

“(일제 강점기) 철도망 확대로 지루한 열차 여행을 달래 줄 열차 안 독서가 출현했다.”(43, 철도도서관)

 

일제는 식민 지배를 위해 한반도에 철도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새로운 형태의 독서 문화가 등장했다. 예를 들자면 소리를 내 읽는 음독보다 조용히 읽는 묵독이 더 일반적인 모습이 된 점 등이 있다. 오랜 시간 열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사람을 위한 문고판이나, 잡지류 등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철도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와 비슷하게 새로운 독서 문화를 만들 정책을 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보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래서 이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줄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 도서가 비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펼칠 수 있도록 충분한 좌석과 공간이 확보된 교통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열차 안에 무한정 손님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할 사람을 위한 인원 제한 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이동하기 위해 더 열심히 그 칸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예약을 받아도 될지 모른다.) 물론 책을 안 보고 휴대폰을 볼 수도 있으니 그 칸에서는 휴대폰 이용이 제한되는 환경을 만들어둘 필요도 있겠다. 비록 내 상상에 불과하지만, 정부나 대중교통 기관에서 새로운 독서 문화를 보급할 생각과 의지가 있다면 얼마든지 정책으로 시행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345, 국회 도서관)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리고 충분한 도서관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민주주의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SNS와 유튜브의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의 미래를 제대로 만들어나가려면 결국 우리 스스로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그 방법이 독서라고 믿는다. 그리고 도서관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나갈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저자처럼 도서관 덕후들이 이 중대한 과업을 이끌어나갈 적임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도 그 과업에 동참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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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 개발과 손익에 갇힌 아름드리나무 이야기
김양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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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김양진,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길을 막고 선 나무가 아니라 나무 있는 곳에 길을 낸 것이니까.”(294, 서울 궁산 나무 지도)

 

지금껏 나무를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속 서 있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아름다운나무는 충분히 공감했지만, 위태로운지 몰랐다. ‘거대한나무를 본 적은 많지만, 천년을 살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나무를 너무 쉽게 대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우리 동네 나무들이 말라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행동하지 않았다. 남들이 나무를 죽이는 행동을 한다고만 믿었지, 내가 나무를 죽이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나무와 인간-

 

인간은 도시에 살기에 더욱 나무에 관심을 잃는다. 도로와 건물만으로도 빼곡한 공간에 살아가니 나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땅과 하늘을 허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생명과도 같은 재산인 공간을 나무에 나눠줄 여유 따위는 없다. 게다가 내 재산 가치를 높일 수만 있다면, 나무 정도는 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른 들판에 사는 사람은 다를 것이다. 나무가 없는 황량한 벌판은 인간이 살아가기 어렵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기 마련이다. 가을엔 열매를 맺는 나무를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겨울엔 쓸모없는 가지를 떨군 나무 아래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삶 그 자체를 나무에 의지해 살았던 사람들은 나무를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나무에 붙인 이름을 보면, 그들이 나무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나무를 사랑하고 보듬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특히 나무 이름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나온다. 미루나무, 버즘나무, 이팝나무 등, 그 이름을 들으면 그 나무에 이름을 붙인 사람의 애정이 느껴진다. 물론 나무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 있는 이름들도 나온다. 순전히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주변에 서 있는 그 수많은 나무의 이름조차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다. 매일 등교하면서 지나치는 숲에 어떤 나무들이 서 있는지, 내 발걸음 때문에 그 나무들이 죽어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간의 발길이 나무뿌리에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나무는 동물처럼 금방 죽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수년에 걸쳐 죽어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제껏 나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안타까워만 했지, 내가 그들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이 책을 읽었기에, 이제는 내 주변에 있는 나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그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무의 시간-

 

인간은 기껏해야 100년을 살 수 있다. 인간에게 10, 20년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나무는 어떨까. 천년을 살 수 있다는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 나무의 시간은 어떤 것인지 상상해볼 수 있는 표현이 있었다.

 

공룡이 멸종한 뒤 은행나무 가문은 급격하게 줄어들어 동아시아에 단 한 종만 생존하게 됩니다. 급격한 기후변화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새로운 포식자의 출현을 견뎌낸 은행나무종에겐 인간의 지각으론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긴 시간과 큰 기적이 새겨져 있습니다.”(22, 오리발 공손수)

 

은행나무의 조상은 공룡과 함께 살았다. 그 친척들이 멸종되는 과정에서도 단 한 종은 살아남았다. 인간이 구석기를 만들던 시절부터, 휴대폰을 들고 돌아다니는 지금까지 그들은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아마 인간이 멸종된 이후에도 은행나무는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은행나무는 이 시간을 어떻게 느낄까. 그들에게 인간의 시간은, 인간에게 하루살이의 시간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니 예로부터 천년을 살아온 노거수를 마을을 지키는 ()’으로 모셔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에 나오는 나무 중 진주 중평마을의 당산나무였던 1,200살 팽나무는 무려 삼국 시대부터 살아왔다고 한다.(지금은 사라졌다.) 과연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이 정도 시간을 견뎌낸 나무의 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

 

우리는 나무를 일방적으로 이용해왔다. 나무는 항상 아낌없이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우리가 나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진화의 경로를 겪어 오늘에 이른 고등 생명체입니다. 나무의 생리에 대한 오해는 어쩌면 당연하고,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한한 시간 동안 끝끝내 그 오해를 풀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70, 도계 긴잎느티나무의 속은 누가 채웠나.)

 

우리가 나무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도 이 책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뿌리가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당연하다고 한다. 뿌리도 숨을 쉬어야 하는데, 땅 위로 나온 뿌리를 흙으로 덮어버리면 숨을 쉬지 못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단다. .. 여태껏 내가 왜 식물들을 죽여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나무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무와 관련된) 민원이 들어오면 문제가 진짜 해결되게끔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공무원과 연구자의 역할인데, 쓴소리가 듣기 싫으니 벌레가 많아? 그럼 농약 쳐!’라는 단순 논리로 접근합니다.”(194, 서울 봉산)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아갈 동안, 연구자들이 그것을 밝혀내는 동안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벌레가 많다고, 새가 시끄럽고 냄새난다고 그냥 나무를 베어버리거나, 옮겨 싦는 것은 선택지가 되어선 안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안타깝지만, 인간을 배제하는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방법이 가장 좋다. 가덕도 동백군락지(236)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군부대가, 북한과의 경계에 있는 DMZ,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는 산지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무관심이, 인위적인 통제가 자연을 되살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가장 바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마구 나무를 죽이고 있지만, 최소한 인위적으로 죽일 수 없는 나무들은 지금도 그 생명의 가치를 계속 키워나가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깨닫는 일만 남았다. 나무들이 다 죽기 전에 깨닫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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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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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천사들의 엄격함 (윌리엄 에긴턴, 까치, 2025, 초판 1)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나는 이 세 사람 모두가 낯설다. 그나마 칸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많아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철학책일 것으로 생각했다. 최근에 철학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약간은 자신이 있었다. 분명 나는 이 책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고, 기존에 읽었던 책들과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특히 보르헤스는 유명한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발견한 물리학자였으며, 철학자 칸트와 함께 모두 그리스 철학과 중세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책은 하나의 좁은 영역을 깊고 정확하게 파헤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이 세상의 전체인 실재(實在)를 들여다보려고 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모두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기초 소양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무슨 말인지, 저자가 사용하는 관용 표현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뭔가 읽는 동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결국 돌아서고 나면 무슨 의미인지를 한참 고민해야 하는 그런 정답이 없는 모호한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위 세 인물의 삶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적 순서대로 인생의 주요 사건을 나열하는 식이 아니라, 저자가 하고 싶은 주제와 의도에 맞는 인물의 삶을 특히 부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알아내야 할 그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인간은 길어야 백 년을 살 수 있는 존재다. 내가 가르치는 역사도 그래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채 백 년을 살 수 없는 존재가, 살면서 깨달은 지식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었던 것. 그래서 인간의 삶이 조금은 더 윤택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 역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는 가장 기본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건과 사건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배경을 원인으로 하여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어떤 결과또는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한다. 결국, 그 인과 관계가 시험 문제가 된다. 학생들이 그래서 역사를 싫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는, 우주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가진 존재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의 시간적 변화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없다. 시작은 곧 끝이요, 끝과 시작이 결국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정확히 잘 모른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시간과 공간의 왜곡 현상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설명을 약간은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우주)는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는 너무도 버겁고 어려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결국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인간이 가진 환상이나 편견이 실재(實在)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자는 그래서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세 사람을 이 책에 모두 모아 두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 깨달음을 얻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 깨달음에 따라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재밌는 점은, 그들이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지만, 유한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깨달은 존재들이지만, 결국 그들은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살다가 죽었다.

 

 

-과학에 철학이 필요한 이유-

 

오늘날 과학은 모든 학문을 제치고 최고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문이과 구분이 폐지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이과 우위 현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과학이 인류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이 책에서 알게 되었다. 과학은 반드시 철학이 필요하다. 이 책에 따르면 신학과 종교도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러한 이성을 과도하게 투사할 때, 우리는 세계에 관한 일관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그 도구(이성)로부터 우상을 만들고 그 개념으로부터 유령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영원하고 형언할 수 없는 진리를 가정하는 것은 물리적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우리가 자주 그러한 가정을 변질시켜 만들어내는 유령과 우상은 과학의 성공을 방해하기만 하는 형이상학적 편견으로 반드시 전락한다.”(79, 2장 바로 이 순간의 짧은 역사)

 

고학력자이면서 상류층인 사람들이 종교적 우상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이성적인 사회에서는 절대로 통할 수 없는 논리를 내세우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그들이 우매하기 때문도 아니고, 가난하기 때문도 아니다. 칸트의 말처럼 그들은 형이상학적 편견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도한 이성을 내세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한, 하이젠베르크의 중간지대(90)’개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세상을 재단하여 옳고 그름의 영역으로 나눈다거나,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하는 문제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는 행위는 반드시 극단적인 결론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도보여행을 떠난 것처럼, 칸트가 지인들과 만찬을 즐겼던 것처럼, 우리는 과학으로 절대적 진리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성이 너무 과도한 것은 아닌지, 편견과 실수가 발생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도 필요하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

 

그리스 역사를 대충 훑어보면서, 나는 소피스트들이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가르침으로 당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일부 주장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리스 철학에 대해, 소피스트들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제논의 역설처럼 이 책에서 다뤄진 철학적 난제들이 실제 우리 삶으로부터 출발했고, 그것에 대한 오랜 논쟁과 탐구의 결과가 현재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철학과 과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철학을 공부한 플로티노스의 책(178), 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219),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291), 단테의 신곡까지 위 세 사람의 깨달음에 영향을 준 중요한 책과 그 흐름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책을 찾아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겪었던 그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조금은 극복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신비에 대한 답을 찾기를 원하지만, 또한 확정적으로 매듭짓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또한 말이 되는 것,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알고 싶어한다.”(263, 9장 측정하기 좋게 만들어진 우주)

 

이 책이 내게 어려운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알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전해줄 수 있는 책이지만, 내가 그 지식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다.

 

만일 나무가 쓰러졌는데 아무도 몰랐다면, 쓰러지는 소리가 난 것인가?”(114, 3장 시각화하라!)

 

이 문장도 얼마 전 보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2024)”에서 본 대사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무도 없는 숲속 펜션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단순한 묘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게 철학적 난제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우리 일상에 관련된 철학적 난제는 매우 많을 것이다.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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