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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 개발과 손익에 갇힌 아름드리나무 이야기
김양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아름답고 위태로운 천년의 거인들 (김양진,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쇄)
“길을 막고 선 나무가 아니라 나무 있는 곳에 길을 낸 것이니까.”(294쪽, 서울 궁산 나무 지도)
지금껏 나무를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무는 그저 그 자리에 그대로 계속 서 있는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아름다운’ 나무는 충분히 공감했지만, 위태로운지 몰랐다. ‘거대한’ 나무를 본 적은 많지만, 천년을 살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나무를 너무 쉽게 대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우리 동네 나무들이 말라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행동하지 않았다. 남들이 나무를 죽이는 행동을 한다고만 믿었지, 내가 나무를 죽이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나무와 인간-
인간은 도시에 살기에 더욱 나무에 관심을 잃는다. 도로와 건물만으로도 빼곡한 공간에 살아가니 나무가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땅과 하늘을 허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생명과도 같은 재산인 공간을 나무에 나눠줄 여유 따위는 없다. 게다가 내 재산 가치를 높일 수만 있다면, 나무 정도는 쉽게 치워버릴 수 있는 존재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너른 들판에 사는 사람은 다를 것이다. 나무가 없는 황량한 벌판은 인간이 살아가기 어렵다. 밭에서 일하던 농부는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기 마련이다. 가을엔 열매를 맺는 나무를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겨울엔 쓸모없는 가지를 떨군 나무 아래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삶 그 자체를 나무에 의지해 살았던 사람들은 나무를 다르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나무에 붙인 이름을 보면, 그들이 나무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을, 그 나무를 사랑하고 보듬으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는 특히 나무 이름에 대한 설명이 상세히 나온다. 미루나무, 버즘나무, 이팝나무 등, 그 이름을 들으면 그 나무에 이름을 붙인 사람의 애정이 느껴진다. 물론 나무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수 있는 이름들도 나온다. 순전히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주변에 서 있는 그 수많은 나무의 이름조차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다. 매일 등교하면서 지나치는 숲에 어떤 나무들이 서 있는지, 내 발걸음 때문에 그 나무들이 죽어가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인간의 발길이 나무뿌리에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나무는 동물처럼 금방 죽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수년에 걸쳐 죽어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제껏 나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안타까워만 했지, 내가 그들의 죽음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이 책을 읽었기에, 이제는 내 주변에 있는 나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그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무의 시간-
인간은 기껏해야 100년을 살 수 있다. 인간에게 10년, 20년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나무는 어떨까. 천년을 살 수 있다는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 나무의 시간은 어떤 것인지 상상해볼 수 있는 표현이 있었다.
“공룡이 멸종한 뒤 은행나무 가문은 급격하게 줄어들어 동아시아에 단 한 종만 생존하게 됩니다. 급격한 기후변화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새로운 포식자의 출현을 견뎌낸 은행나무종에겐 인간의 지각으론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긴 시간과 큰 기적이 새겨져 있습니다.”(22쪽, 오리발 공손수)
은행나무의 조상은 공룡과 함께 살았다. 그 친척들이 멸종되는 과정에서도 단 한 종은 살아남았다. 인간이 구석기를 만들던 시절부터, 휴대폰을 들고 돌아다니는 지금까지 그들은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다. 아마 인간이 멸종된 이후에도 은행나무는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은행나무는 이 시간을 어떻게 느낄까. 그들에게 인간의 시간은, 인간에게 하루살이의 시간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니 예로부터 천년을 살아온 노거수를 마을을 지키는 ‘신(神)’으로 모셔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에 나오는 나무 중 진주 중평마을의 당산나무였던 1,200살 팽나무는 무려 삼국 시대부터 살아왔다고 한다.(지금은 사라졌다.) 과연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이 정도 시간을 견뎌낸 나무의 시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
우리는 나무를 일방적으로 이용해왔다. 나무는 항상 ‘아낌없이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를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우리가 나무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진화의 경로를 겪어 오늘에 이른 고등 생명체입니다. 나무의 생리에 대한 오해는 어쩌면 당연하고,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한한 시간 동안 끝끝내 그 오해를 풀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70쪽, 도계 긴잎느티나무의 속은 누가 채웠나.)
우리가 나무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도 이 책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뿌리가 땅 위로 올라오는 것이 나이가 들수록 당연하다고 한다. 뿌리도 숨을 쉬어야 하는데, 땅 위로 나온 뿌리를 흙으로 덮어버리면 숨을 쉬지 못해 말라 죽을 수밖에 없단다. 하.. 여태껏 내가 왜 식물들을 죽여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나무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나무와 관련된) 민원이 들어오면 문제가 진짜 해결되게끔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공무원과 연구자의 역할인데, 쓴소리가 듣기 싫으니 ‘벌레가 많아? 그럼 농약 쳐!’라는 단순 논리로 접근합니다.”(194쪽, 서울 봉산)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아갈 동안, 연구자들이 그것을 밝혀내는 동안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벌레가 많다고, 새가 시끄럽고 냄새난다고 그냥 나무를 베어버리거나, 옮겨 싦는 것은 선택지가 되어선 안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안타깝지만, 인간을 배제하는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인간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방법이 가장 좋다. 가덕도 동백군락지(236쪽)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군부대가, 북한과의 경계에 있는 DMZ가, 개발 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는 산지가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간의 무관심이, 인위적인 통제가 자연을 되살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가장 바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마구 나무를 죽이고 있지만, 최소한 인위적으로 죽일 수 없는 나무들은 지금도 그 생명의 가치를 계속 키워나가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깨닫는 일만 남았다. 나무들이 다 죽기 전에 깨닫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