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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 전쟁 - 세계화, 제국주의, 주식회사를 탄생시킨 향신료 탐욕사
최광용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향신료 전쟁 (최광용, 한겨레출판, 2024, 초판 1쇄)
향신료가 대항해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고, 동인도 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였다는 사실은 알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 책에 담긴 내용 대부분은 새로운 것들이었다. 저자 최광용은 향신료의 역사에 푹 빠진 독립 연구자로 마치 이 책의 주인공인 모험가나 항해자들처럼 30여 년 동안 전 세계 80여 개국을 돌아다닌 사람이다. 그가 보고, 경험하고, 공부한 내용은 내가 책으로 배운 내용과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그 신선함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저자가 만약 18세기 유럽에 태어났다면, 분명 대단한 유명인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수많은 유럽인은 저자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간으로 주저하지 않고 떠났으며, 그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지식을 들고 돌아왔다.
“신지식을 갈구하던 당시 유럽 사회는 지식인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했다. 이는 수많은 생물학자, 식물학자가 출현하게 된 원동력이었다.”(267~8쪽, 6장 세계로 뻗어 나가는 향신료의 모험)
우리 사회도 르네상스 이후 유럽처럼 “신지식을 갈구하고 지식인을 존경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지금 유럽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운영하고, 영향을 끼치는 세상을 만든 기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험과 역사, 그리고 추체험-
역사 학습에서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개념 이해와 사건의 인과 관계 파악, 그리고 역사적 상황에 대한 추체험 능력이다. 나는 저자야말로 진정한 역사 연구자이며, 역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고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역사의 현장을 단순히 책이나 구글 지도로만 찾아보지 않았다. 그곳에 직접 갔고, 그곳에서 살았으며, 그곳에 남은 역사의 흔적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 당시 유럽인의 마음을 상상하며 이 책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문 연구가가 많은 사료를 찾고 그것을 통해 가장 개연성 높은 역사적 가정을 추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 저자는 향신료 전쟁 당시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고,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며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물론 대부분 기록이 유럽인 중심이라 침략을 당해야만 했던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인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인도양은 내게 아주 특별한 바다다. 콜롬보에 살던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는 해를 마주하며 삶의 사념들을 추스르던 기억이 선명하다.”(17쪽, 1장 향신료를 찾아 대항해 시대가 열리다.)
“갈레에는 더치 포트라는 유적이 있다. 1588년 포르투갈이 건설한 요새로 17세기 중반에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이곳을 점령하면서 확장했다. …… 최근에 방문했을 때도 예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21쪽, 1장 향신료를 찾아 대항해 시대가 열리다.)
-현재,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
‘역사는 왜 공부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사실 내가 역사를 좋아했던 것은 다른 사람이 잘 모르는 사실을 내가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기 때문이다. 역사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질문에 나 혼자서만 답할 수 있었을 때 느끼는 그 쾌감이 내겐 역사를 공부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된 이후, 나 혼자만 역사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신나게 설명하고 나면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했다. 학생들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생각하긴커녕, 역사를 공부할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교사로서 학생이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결론은 ‘현재’였다. 역사는 현재 쓸모가 있어서 공부하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기초를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이 ‘역사의 쓸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업하는 것이 목표다. 수업 시간엔 반드시 시사 문제를 언급하거나 자료로 제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보도록 질문한다.
이 책에서도 이런 ‘현재’가 곳곳에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 현재는 내가 수업 시간에 활용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주제를 담고 있다. 그래서 내가 수업 시간에 꼭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소재들이 많이 있다.
“격세지감이다. 옛날 그들을 통치하면서 주인 행세를 하던 포르투갈인의 생계를 앙골라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 ……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신들과 언어가 통하는 옛 식민지 나라로 일자리를 찾아 몰려갔다. 짐승처럼 사냥당해 팔려 나갔던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이 그들의 상전이 됐다. 그래서였을까, 피고용인들을 마치 손바닥 위의 공깃돌인 양 매몰차게 부렸다.”(29쪽, 1장 향신료를 찾아 대항해 시대가 열리다.)
식민지 후예들이 부리는 식민 모국인이라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일본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아마도 포르투갈과 반대의 상황이라서 그런게 아닐까 상상해본다. 우리가 일본보다 훨씬 우월하게 잘 산다면, 그러면 우리는 쉽게 일본을 인정하고 용서할 포용력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일본은 우리보다 더 잘 사는데 왜 사과하지 못할까. 혹시 우리가 자기들보다 잘 살까봐 전전긍긍 하는 것은 아닐까.
-인물 중심의 이야기-
이 책이 재밌는 이유는 ‘이야기’형식이기 때문이다. 전체 내용이 큰 흐름 속에서 매끄럽게 이야기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인물’이다. 어떤 사람의 일대기는 우리가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소재다. 특히 그 이야기가 매우 굴곡진 드라마와도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면 딱이다. 자극적이고 막장인 드라마. 우리가 안 보고 버틸 수 있겠는가.
인물 중심의 이야기가 기본 형식이기 때문에 매력적인 부분. 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비교해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볼 수 있는 구조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책에도 그런 내용이 종종 등장한다. 영국의 유명한 해적 드레이크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이순신이 비교 대상으로 등장한다. 단순히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해적질이 영웅으로 숭앙받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면, 우리는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순신이 이렇게 알려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비교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같은 시대이지만, 전혀 다른 세상임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 나는 이런 것이 한국사와 세계사를 함께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 가까운 것과 먼 것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물 중심의 이야기’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1540년에 태어난 드레이크는 1596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순신 장군이 1545년에 출생해 1598년에 사망했으니 거의 같은 시기를 바다에서 보낸 영웅들이라 하겠다.”(78쪽, 2장 향신료 교역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
-실패의 역사-
이 책이 다른 대항해 시대 역사서와 다른 점은 ‘실패’한 역사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성공한 역사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향하는 항로와 남아메리카를 돌아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로에 집중되어 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서로 경쟁하고 충돌했는데, 대체로 바스쿠 다가마의 항로와 마젤란의 항로를 중심으로만 그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넘어 실패했지만 다른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제3장. 북방 항로 개척의 잔혹사이다.
“이들이(바렌츠 등) 얼음에 갇혔을 때 지내던 오두막은 170년이 지난 1871년에 노르웨이 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었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바렌츠의 항해 일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뱃길과 기상 상태 등이 너무나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탐험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되었다.”(128쪽, 3장 북방 항로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것인가.)
내가 이 부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당시 실패가 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북방 항로는 사실 20세기에나 개척되었고, 기후 변화로 얼음이 녹는 현재에나 활용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바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시절, 얼음으로 가득 찬 바다를 뚫고 새로운 항로를 찾아 나서려고 했던 모험가들의 용기가 매우 돋보였고,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을 대하는 당시 유럽인들의 태도였다. 그들이 단순히 부와 명예를 좇아 목숨을 건 모험을 한 것이라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했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소중히 찾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유럽인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항로를 찾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것을 활용해 향신료 제도를 정복했다. 나는 유럽인들이 모험가와 항해자들의 실패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으로부터 배우고자 노력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믿는다.
우리도 실패의 역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것만 배우고,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왕의 업적만을 암기할 것이 아니라 왜 실패했는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무슨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를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발전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밑거름으로 삼고자 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나는 저자가 향신료 전쟁에 매료되어 연구하는 모습을 떠올려봤다. 그는 이 수많은 내용을 조사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유럽인들의 향신료 전쟁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포르투갈은 가장 먼저 국왕이 앞장서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모험가와 항해자들은 목숨을 걸고 향신료 제도를 찾아냈으며, 이미 기존에 운영되고 있던 교역 구조를 그대로 둔 채 현지화하는 방법으로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그런데 영국과 네덜란드는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 회사를 통해 포르투갈이 독점한 항로를 모두 빼앗는다. 이를 통해 국왕 자본보다 상인 자본의 규모가 더 효율적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네덜란드가 독점을 통해 비용을 절감하는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사실이다. 정보를 감추고, 폭력을 행사해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향신료 나무의 이동을 철저히 감독하는 독점 체제는 결국 네덜란드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최종 승자는 독점을 꾀하지 않고 다양화, 세계화로 나아간 영국이다. 우리는 이런 향신료 전쟁 역사를 통해 무엇을 지향해 나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우리나라 종묘사들이 20세기 후반부터 외국 자본에 팔려 나갔다. …… 1997년 외환 위기 때 우리나라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는 바이엘이 인수했고, 청원종묘는 사카타, 서울종묘는 캠차이나가 인수했다.”(257쪽, 6장 세계로 뻗어 나가는 향신료의 모험)
내 경험상 우리 사회는 역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국수영만 많이 배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학교 관리자부터, 한국사는 어차피 암기 과목이니 수능 직전에만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까지. 특히 실패의 역사를 애써 감추려고만 한다. 외침을 수없이 당했던 약소국가의 피해 의식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실패의 역사를 저자처럼 주목해야 앞으로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미래에 정말 중요한 자산인 종자 회사를 외국 자본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내가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역사 공부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이가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