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비판 - 우리시대의 부끄러움을 말하다
김상태 지음 / 옛오늘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먼저 무엇 보다 글쓴이에게 무한한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영향력잇는 사회인사로서 충분히 조롱당할만한 도올의 언행과 족적에 대한

성실한 근거와 줏대잇는 비판 !!!

솔직히 집에 있는 도올의 책 다 버리고 싶었다.

문체와 수용의 독자를 고민하셨다는데 충분히 공감가는 바..

  "쪼다"라고 하고 "지랄한다" 고 하고 "똥구멍을 핥는다' 란 표현까지  썼을 때에는 그 비판받는 당사자가 그런 톤으로 밖에 조소당할수 밖에 없는 인사요

 그런 문체를 빌어 비판받을 정도 밖에 안되는 언사가 있기에 가능하다는것이 설득력있게 다가오는 그런 책이다.

한마디로 "싸다 싸 !!"   라는거지..

한때 도올의 광팬을 자처햇던 나로서도

끝도없는 도올의 "쪼다" 퍼레이드를 읽고 잇으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수 없다.

그동안 기성학계에서 도올을 사이비라고 마땅치 않아 하는것은 알앗지만

모두 드러워서 피한다는 식 아녔나...

아님 그 미친 독설이 두려웠거나..

누가 이렇게 진작 도올을 제대로 비판햇어야했다.

점잖은 학자들은 비판할  꺼리도 못되어서 안한다고했고

강준만 같은 언론학자는 관심밖이라며 살짝 비켜나갔다.

하지만 이렇게 사회적 영향력잇는 인사가 지 입에서만 나온소리만 진리라 하고

안온한 배경과 빽의 울타리속에서 학자의 본분도 다하지 않고 학자연하면서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나아가 무슨 천재 무슨 성인이라도 되는양 약장수 처럼 떠벌이고 다녀도   모두들 그냥 침묵하고 있었던 저간의 사정도   이 글을 보고 알게되었다.

나도 한때는 도올이 천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천재를 키워주지 않는 사회풍토 ,천재를 시기하고 짖밟는 사회풍토가 안타까웠다 라고까지 생각햇던 사람이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도올의 언행들..

썩 석연치많은 않았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 이후의  책들..

하지만 공개적으로 비판받는걸 본적이 없어서 이 사람은 이렇게 해도 다 통하는구나...

그냥 그렇게만 느꼈다.

노자의 도덕경 은 김경숙판 하고 비교해가며 밑줄그으며 읽었고(얼마나 난리가 낫었던가...

일개 아줌마가 하버드 우주보에게 딴지 걸었다는 이유로...덕분에 도덕경을 참 재미나게 읽은 셈이다)

노자와 21세기도 다 땠다.(별 건질만한건 없었다)  이것도 아마 미완?

항상 다음을 기약하는 도올의 쓰다만 책들...

이젠 브랜드명이 되어버린 "도올 " 이란 글자에 몇자만 더붙혀 시시껍쩍한 언설이라도 달아 내놓으면 고대로 다 책이된다.

인기가 시들해졌다지만 아직도 먹어주는 도올 (놈현따라 북한에도 갔다왔잖은가...)

학자연하지나 말든지 팔색조로 변신하는 정치성이나 띠지 말든지 ...

황우석 신정아 김용옥 이 모두는 광기와 인기의 안개에 쌓인 벌거벗은 임금님들 ...

옷을 다 벗겼는데도 부끄러운줄 모르는 이분들은

옷을 다벗겻는데도 옷을 입고잇다고 믿어주는 이 무지한 우리들이 그 숙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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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옛사람과의 만남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포스트 모더니즘이 세상을 점령한 시대에 수 세기전의 그림을 들여다 본다는 일은 어쩌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을 찾아 가는 고루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박물관에 전시된 옛그림을 유리 칸막이 넘어 올려다 보면서 현대인은 앤디 워홀의 강렬한 색체와 명확한 선을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박물관이란 그저 옛것의 전시장으로 그 모습을 굳힌지 오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물음을 던진다. 진정, 내가 찾아간 박물관에는 지나간 것의 죽은 그림자만 있던가. '온고이지신'이라는 말은 사전속에 깊숙히 안장되고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소비성의 그림을 보면서 그것에 '자유분방'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파격'이라는 칭호를 내려준다. 내가 옛그림을 탐닉하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저 옛그림이 내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먼 데 있는 것을 어렵게 찾아 다니는 일에 진력이 났기 때문이라는 구태의연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톨스토이는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보는 것의 갈증을 요구하는 순간에 내 앞에 옛그림이 놓여 있었고, 거기서 나는 옛사람들의 사상과 가치와 신념과 이념과 일상과 사랑까지 흡수하고 싶은 욕심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서 그림속으로 풍덩 빠질수만 있다면 그리해도 좋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루 아침에 탄생한 개벽천지가 아니다. 옛그림이 밑바탕으로 그 디딤돌을 다 해주지 못했다면 앤디워홀도, 백남준도, 몬드리안도, 김환기도 없다. 이렇게 내가 옛그림에 대한 찬사와 결론을 내린다면 역설이다. 현대의 그림은 훌륭하고 천재적인 정교함과 기술적인 뛰어난 테크닉으로 관객을 매혹시키고 있지만 아직 옛그림을 물리칠만한 내 고집을 이길 것은 만나지 못했다. 오늘도 옛그림속으로 터벅터벅 들어가는 나. 그곳에서 나는 상상의 양탄자를 타고 마음껏 유영하고 다닌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이 책의 저자인 '오주석'은 간송 미술관 연구위원이다. 이 직함 하나만 믿고 책을 구입했다. 최완수 선생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아주 신뢰할만한 문화적 소질과 안목을 지닌 인물이라고 철썩같이 믿어버리는 나의 고정관념때문이다. 우리그림에 대한 애정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간송 미술관에 몸 담고 있지 않을 거라는 이 믿음은 오래전 우연한 일로 최완수 선생을 만난 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그 때 행정적인 절차를 위한 형식적인 만남이었지만 작달만한 키에 또박또박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간송 미술관은 모든것을 신뢰하게 되는 보증서 같은 명사로 내게 굳어졌다.


12편의 그림을 소개하는 흑백 화면은 눈부신 칼라의 인식에 길들여진 요즈음 세대들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흠이 될지도 모른다. 나도 이 책을 펼쳐드는 순간 어, 흑백이네 하는 작은 탄성을 자아냈으나 책을 읽는 동안 그것은 단점이면서 동시에 장점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백이 주는 과거로의 회귀는 옛그림이라는 명제를 부각시키고, 오래된 골동품적인 가치를 유발한다. 그러한 의도가 아닌 제 삼의 다른 뜻이 있었다면 그것은 저자나 출판사의 고유 마케팅에 속한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흑백이 주는 의미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전혀 나쁜지는 않았다. 책 말미에 부록처럼 붙어 온 별도로 첨부 되어 있는 원색도판의 그림으로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 그림을 그리는 과정, 당시의 시대상황등을 한 가지씩 접근하며 그림 설명을 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옛사람의 시각으로 그림을 보고, 옛사람의 마음 가짐으로 그림속을 읽으라는 의미다. 그의 인문학적인 그림읽는 방식은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사상, 풍속까지 모두 총망라하며 개인과 국가라는 조직과의 연계과정을 섭렵하여 이해하려는 의도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읽기는 일회성으로 즐기는 쾌락적인 심미안도 아니며, 거기엔 제법 어려운 철학이 숨어 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읽어내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안목의 중요성이 이럴때에 등장한다. 안목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오래 고민한 적이 있다. 누군가 썼음직한 말로 나 역시 대신해야 하리."세월이 알게 해 주리라."그러나 그 세월의 주체자는 관객 자신이다. 거저 세월이 아니다. 삶의 다단함을 겪어내었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지식의 충족으로 채워지는 것도 아닌 안목. 보고 또 보며 깨우치는 안목. 그렇다. 안목은 놓치지 말고 계속 보는 수고를 요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보았지만 못 보았고 들었지만 못 들었다.'는 정황이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184쪽)엉뚱하게 마음을 쓰는 사람에게는 안목이 생길리 없다는 말이다.


훌륭한 그림에는 그 당시 화가가 살았던 모든 것이 녹아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능력을 키우기 위하여 저자는 말한다. 그림속으로 들어가라고. 최상의 방법이란 직접 그것을 내 손으로 해 보는 일이다. 그것을 위하여 바쁜 현대인은 정석의 공부를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 하는 반문을 가져본다. 내가 이 책의 12점의 그림을 보면서 느껴야 했던 것은 저자의 유려한 입담보다는 그림을 그린 조선시대 화가들의 삶과 그들의 지난한 애절함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이념처럼 신봉하는 오늘날에도 그 유려함의 색이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마도>의 그림처럼 그의 그림을 읽는 내면은 김명국의 호쾌한 선(線)보다 더 시적이며, <인왕제색도>에서 보여지는 친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그림속에 등장하는 비안개속에서 움직인다. 김정희가 <세한도>에서 나무 가지를 왜 하늘로 뻗뻗하게 올라가게 그렸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독자는 저자의 숙성된 안목을 만날 수 있다. 옛그림속에는 우리들의 과거만 휑하니 낡은 유물처럼 쓸쓸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것처럼 옛그림에는 인스턴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오래된 것의 가치를 알려준다.


이 책으로 처음 옛그림을 만나는 독자라면 각장마다 뒤에 따라붙은 '옛 그림의 색채` `옛 그림의 원근법` `옛 그림의 여백` 등의 글도 옛 그림을 읽을 수 있는 공부에 초보자로서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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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 > 메추리는 쪼다고 대붕은 위대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연말 어느 저녁에 정리하다가 책상위에 그대로 나열해 놓은 우표상자 뚜껑을 다시 열어본다. ‘우정국’이라고 흐릿하게 인쇄된 흑백의 우표 한 장이 맨 위에 투명한 비닐 캡 안에 안전하게 들어가 있다. 문양은 단순하다. 배추흰나비로 추정되는 나비 한 마리가 박제된 날개를 흐릿한 잉크 액에 담그고 있는 것 같다. 품격이 느껴질 만큼 우아한 날개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색감도 세월의 흐름 따라 세피아 톤으로 변했다. 그것이 귀하게 모셔져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실증적 인증 때문이다. 문양의 세련됨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동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보여주기’가 전무한 상태다. ‘연로’한 노인네를 공경하는 존대처럼 그것의 짧지 않은 역사성에 후대 사람들은 현대적 잣대로 가치를 매긴다. 머리 아프지 않는 간단한 계산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연로한 우표’ 한 장의 가치를 매도해버리는 일로 그것이 지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인정해주는 자세는 온 가슴으로 옛 것을 대하던 오주석식의 ‘깊게 들여다보기’에 철저히 반(反)하는 자세다. 저자는 시종일관 풍부한 사료로 준비된 특강에서 그의 청중에게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는 감상을 하라고 부탁한다. 


자, 어떻게 하면 옛 사람의 눈과 마음을 지니게 되며, 그것이 준비되었을 때 바라보는 옛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달라 보이는가. “그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온몸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온몸이 즐긴다고 할 때 기실은 우리의 영혼이 깊이 감동 받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옛 글에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18쪽)


지식의 앎과 더불어 즐겨야 한다는 말씀이렷다. 보름달이 뒷 동산에 두둥실 떠오를 때 꽃잎을 활짝 열어 달빛을 연모하는 가슴을 드러내는 달맞이꽃처럼 한결같고 진정성을 잃지 않는 좋아하는 마음부터 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여 즐겨야 한단다. 옛 것을 대하는 요령을 배우기전에 내면의 바람이 흐르는 방향부터 잡아야 한다는 오주석의 ‘옛 사람의 마음과 눈’을 품는 강의는 차라리 선(禪)의 자세를 떠올린다. 마음속의 이것저것 섞어 놓은 풍기(風氣)를 정돈하고 갈피를 잡고 좋아하고 즐기는 경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쉬운 특강으로 저절로 즐거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책 한 권을 읽고나서 되짚어 술렁술렁 김홍도의 <씨름>, <주상관매도>와 백자 달 항아리와 발음하기도 어려운 <기로세련변계도>같은 수록된 도판을 들여다보았다. 해박한 전문가의 강의에는 그들만의 전문 용어에 앞서 세밀하고 꼼꼼하게 짚어주는 친절한 해설이 우선순위에 있다. 단순하고 간명한 강사의 설명에 옛 것을 대하는 부족한 대중의 소양은 감성지수가 물 오른 봄버들처럼 쭉쭉 뻗어 올라간다. 단순한 것의 미(美)라면 김홍도의 쓱쓱 그어진 담백한 먹선이나 우정국의 한 마리 나비우표나 별 반 차이가 없다. 단순한 것에 복합적인 덧씌우기로 치장을 하는 일은 불행하다. 물질주의 외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현대적 사고의 관점들 대부분이 이런 정신의 단순함을 외면하고 있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몇 장의 화폐로 날림 되는 자극적이고 도태된 향락주의의 근성, ‘헛된 것의 美學’에 환호성을 지른다. 짜증난다. 그러는 와중에 오주석식의 간명하지만 세세한 옛 것의 들여다보기 美學을 만나면 마치 구도자와 대면한 듯한 깊은 감회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울려 나온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옛 것을 상대하는 저자의 눈시울 뜨끈한 애정이다.


바짝 다가서서 바라보는 그림 한 점, 수많은 미술관 그림 중에서 오직 한 두개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오랜 시간 머무는 관람자. 옛 그림 속에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 한 송이 고고하고, 속을 비어내고 또 다른 마디를 만들어내고 있는 대나무의 투명함이 흔들리고, 옛 사람의 얼굴에서 굴곡 많은 세월의 흔적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가 벗어놓은 도포자락에서 버드나무 아래에 앉았던 풀냄새가 난다. 방금, 그의 방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온 것처럼 그가 거처하는 방문 앞 대기가 그윽하다. 옛 그림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 천천히, 세밀하게, 거리를 조절하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음미하라고 미술적 관람자의 위치에서 안내를 해주고 있지만 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애정’이다. 옛 사람의 마음과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설득 당하여 끝내는 옛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관람자의 경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저자. 앞에서 어떻게 하면 옛사람의 마음과 눈을 가질 수 있는가 고민했다. 하지만 이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억지로 만들지 말자. 이것은 개인적 취향에 앞서 옛 것을 알고 문화적 자존심을 궁극적인 자세로 알아보자는 자기성찰의 일이며 나아가 국가적 자긍심으로 연결된다. 너무 국수적인 발상이던가. 그렇다면 순 우리것을 찬양하고 흠모하는 자세로만 일관하는 이 책은 국수주의의 선두마차격이다. 이분법적인 발상 놀이를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의견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명분아래 국가마다 고유화로 지닌 문화적 바코드나 아이템은 인류 공동체라는 함정 속에 함몰되어졌다. 고유의 것, 내 것, 너의 것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일은 세계화보다 더 중요하다. 작은 것, 독특한 것, 고유의 정신을 고집하는 것, 이것이 언제부터 경제 방정식으로만 계산하는 선진국에 비하여 열등한 것이던가. 조선의 김홍도가 세상에는 단 한 명이고, 그가 그린 그 많은 대량양산의 상품 원본들도 원래는 단 한 점이다. 귀엽게 눈을 부릎뜬 민화속의 호랑이도 단 한 마리다. 리얼리즘의 최고 초상화로 불리는 이재의 초상화도 단 한 점이고, '나'라는 존재도 당신이라는 존재도 세상에는 단 한 명이다.  아둔한 독자의 머리통 위로 떨어진 화두 한 가지. 지구라는 작은 별이 획일적인 인스턴트 문화 종합세트로 향하는 현대에 '단 하나'의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려나. 이것은 유식한 영어로 'one and only'의 이야기다.


“문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 ,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 -(책을 펴내며 中)

 

눈높이 한국의 美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알아채고 자긍심을 갖는 일과 함께 무지한 것으로부터의 위험성을 저자는 성토한다. 저자는 국수주의적 사관에서 무작정 우리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유지하는 주체성을 다짐한다. 뭣 좀 알고 '한국의 美'를 얘기하자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한편으론 우리 문화재 상황을 잘 모르고 한편으론 또 그저 맹목적인 애국심에 불타 가지고 옛날 우리 물건이라면 무조건 소중하고 훌륭하다. 이렇게 치켜 올리는 얘기들도 많이 하는데, 실제로 썩 좋지 않은 작품을 가지고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중략..... 더군다나 혹간 형편없는 가짜 물건을 가지고서 좋다고 법석을 떠는 일까지 없지 않은데, 심지어는 학자들이 쓴 책 중에서도 엉터리 같은 가짜 작품이 수십 점씩 실려 있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는 결국 조상들의 문화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을 보이는 결과 밖에 안됩니다. 결국 문화라는 것은 그것을 향유하는 국민 전체의 눈높이가 높아져야지, 몇사람의 노력으로만 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156~157쪽)

 

다시 흐릿한 우정국 우표 한 장을 들여다본다.

김홍도가 언제 개화기의 폭풍 치는 밤 시간에 다녀갔는가. 네모난 우표안의 나비가 순하게 잠자고 있다. 책의 말미에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김홍도편>은 이 책의 또 다른 정성이다. 전공자들에게는 더 탐구적인 깊이를 요구할지 모르나 대중에게 이만큼 쉽고 간명한 해설과 선명한 눈요기와 신선한 자극을 전달하는 특강을 만나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다. 대개 문화적 영역을 다루는 전문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영역을 말 그대로 ‘스페셜’한 것으로 치장하려는 게 세태이기 때문이다. 수월한 것을 복잡하게 처리하려는 의도. 이것이 요즈음의 전공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요소다.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회성 포장술과 나르시시즘적인 눈요기를 두고 외세의 지배를 받은 화풍을 본보기로 몇 편 제시했다. 개화기 이후 우리들의 호랑이, 옛 선인들의 자태가 그저 잘 다듬어진 바비 인형처럼 예쁘기만 하고 멍청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보여주기식의 겉치장에만 집착하느라고 혼을 놓쳐버린 개탄할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열의적인 특강과 더불어 따로 엮어준 <김홍도편>은 단연코 무지몽매한 독자에겐 최고의 보너스였다. 꿈틀대는 조선 반도 땅의 수 많은 이야기를 돋보기로 들여다 본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은 그의 또 다른 책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과 더불어 귀하고 사랑스럽고 고결한 책으로 그의 안타까운 단명(短命)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세상은 뜨거운 사람들을 일찍 잠재우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무정하고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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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부의 즐거움 -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
이상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랑이가  도서관에서 공수해 준 책 5탄!

"옛공부의 즐거움"    또한  나이스  쵸이스!

앞으로도 얼마나  잘골라 와  불량이나  반품이  없게하나 잘 보겠쓰~~

국어 시간도 좋아했지만  고문 시간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

9교시   고문  보충 시간에  안자는  아는 나밖에 없었다는  전설이..

창외삼경우 세로소지음 등전만리심  카는 고운의 시도

즌데랄 드디올쉐라  카는  정읍사도

마구장창  외우지 않았던가..

아흐...한문학과나  도서관학과를  가야했는데...

아...마...사설은  접어두고....

 

얼마전  홍은택  기자의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도 참 좋고

필름 이쩜영의 김세윤  기자가 쓴  헐크바지는 왜 안찢어지나도   좋고

한겨레  이상국기자의  오랑케  도 좋드만

이 책도  완젼 재밌다.

기자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군

탁월한 감각과 말빨로 책내면 품질유지는 하는것 같아....라고 생각하며 읽는데

랑이왈... 서울에 살면서 하이 클라스 지식인 소사이어티에 낑겨있으면  자기도 그리 쓴다네...쩝.

이 무슨 지방비하적이며  자기 게으름 면책적 발언이란 말인가.....마는  89푸로 쯤  동의 하는바...^^

아무튼 아무튼...이 책은  재밌다.

(저자의  옛날다방 블로그는   어느  포탈에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이 책은  공맹노장 석가에 소동파와 왕불과  최치원과  박지원과 김홍도 서경덕 허유 까지  지식계의 거물들을  불러모아  인사동  벙개를  치는 작가의 꿈  얘기부터가  침 질질 흘리게  재밌다.

몇년전  구름 김경숙의  책들까지  다  사보며  도올과의  도덕경 한 판 전쟁을  비교하면서 읽어서인지

도덕경편이 재밌다.

도덕경의  메타포를 충실히  전한  미당이나  박남수의 새(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꽃 이나  황지우 의  시등을  빌어와     죽은 시인의  사회도 아니고   암암리에  몰래  모이는   인텐시브하고  에너제틱한  지하  도덕경  클럽이 잇지 않음에야   이럴수 없다며  그 중 누구는  간부엿을거라며  특단의  수사가 필요하다네...푸핫..

 

그리고  추사편에서  나온 향상과  문표의 이야기는  황우석 교수  사건에  즈음하여 

참으로...참으로......하여튼   참으로 할 말이  많은.....지식이란  지식인이란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한...

흠...읽어  보시라....

그 외  소동파와  그의 아내  왕붕의 이야기라든지

최치원과  연인의  이별이라든지

한국판  피타고라스 엿다는  고학파   서경덕  이야기  등등..

위인에  너무  무게를  두어  눌려 버리지 않는  ...

인간을  바라보려하는  작자의  시선과   그  매력을  향수하면서  살 수 있는

기본  베이스가  부럽달 밖에...

 

몇 개  밑줄 그어놓은  부분들   노트에  대신하여  옮겨본다.

 

문학은 조롱당하고  인문은 뭇사람의  백안에 급격히 말라죽어가고 있다.

연암이  아름다웠던건 그가 해낸일의  크기와 영양력에도 있지만 그  용기에도 있다.

나는 연암을 생각한다.

그 땐 모두가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지만  이젠  모두가 지나치게 눈을 부릅뜨고 있다.

한 용기잇는 지식인이 일어나 꿈을 꾸고 망상을 해야한다고 말해야 하는 때 인지도 모른다.// 연암편

 

그의  표현속에  사량이란 말이 들어잇는건 우연일까?

우리가 때묻혀버린 사랑이란말의 어원이기도 한,이 말.

생각하고  헤아림!!

사랑이란  몸만지고 욕심 채우고 팔짱끼고 뽐내는것이 아니라

여기 이렇듯 괴로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생각하고

상대의 살이를 헤아리는 마음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사랑이란 끝내 마음속의 절실한 고개짓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그런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되는 것일게다.//동파와 왕불의 사랑중

 

문표는  화려한  무늬를 가진  표ㅓㅁ인데  자존심이  강한  짐승이였다고 한다.

안개가 낀  날에는  그  털색이  살아나지 않을까  두려워  밖에를  안나간다고 한다.

이런  문표의  태도는   지식인의  엄격함과  철저함을  의미하는 은유가  되었다.

남에게  내세우기 위해  학문을 하는게 아니라  내적성숙을  기한  뒤에 그것을  내놓을 만한  여건이 될때까지 인내하는 태도를  옛사람들은  학문의  기본으로  삼앗던  모양이다.

추사가  문표를  남기기를  꺼렸던 것도 저  문표의  철저한  자존심  때문  아니엿을가

향상과  문표가  은은히  행간에  내비치는  문장  이것이야 말로  추사에게  ㅂㅌ혀줄 알맞은  찬사가 아니겟는가..//  추사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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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문학을 끊은지  오래됐다.

90년대 이후 부터였지 아마.

포스트모던 이니  페스티쉬니 어쩌고 하는말들도 가벼워진  문학의  무게를 떠받쳐주진 못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런데  뒤늦게  김훈의  소설을 읽고  오랜만에  문자 그대로  "감동" 이라는걸  경험했다.

무릇 돈을 주고  책을  사본다면  이 정도는 되야지...하는 생각을  감격스러이 하면서....

자전거여행을 읽으며   나는 시대의 문장가라는 그의  글들이 소화가  잘  안되었다.

너무  다져서 정련된 그 문장의 단단함  앞에서 나는 이렇게  외치고 말앗던 것이다.

"김훈은  유머가 없어!!!!!"

그런데  칼의 노래에서는  바로  그 단단한 문체가  바로  감동의  근원이다.

더하거나 뺄것 없는 그렇다고 하드보일드 한것도 아닌  뭐랄까....

존재의 슬픔이  응고되어  흘리는 눈물같은...

(아  한국문학  안죽었구나....)

그렇다   그 문체는  바로  김훈의  살아가는 스타일이며  이순신의 스타일이다.

미려한  수사가 없어도  그 문체의  단단함은 그 살아있고,  죽은 두 사람의 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은 길었던 난리의 총정리 마지막 전투에서  죽었다.(어쩜......)

명분없는  임금의  칼이 아니라  적의 칼에 맞고 싶다던 그의 바램대로..

그가 만약  그때  안죽고 조정에 올라가  승승장구 벼슬이나 하고 있었다면

위인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영웅은 될 수 없엇을 것이다.

 

동인 문학상  수상작 선정의 말도 예술이다.

"...................................

이 노래 속에선 음률이 곧 이야기니 어떤 해석도 완벽히 그 가사를 베낄 수 없을 것이며 ,

또한 이 노래 속에선  미음의 풍경만이 강력한 사건이어서,

어떤 열쇠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채,...

오직  존재함의  숭엄한 비극만이 통째로   독자의 가슴팍을 파고드는 것이다.

................."

궁금하다  누가 썼을까?

박완서? 이문열? 정과리? 유종호? 

 

또한 저자의  책머리글도 외우고싶을만큼 멋있다.

"............................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내게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써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 것이다.

..............."

고집쟁이 영감 같으니..

하지만 나는 그가 염세적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염세가 아니라.....뭐랄까..

그는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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