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메추리는 쪼다고 대붕은 위대하다는 편견을 버리고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연말 어느 저녁에 정리하다가 책상위에 그대로 나열해 놓은 우표상자 뚜껑을 다시 열어본다. ‘우정국’이라고 흐릿하게 인쇄된 흑백의 우표 한 장이 맨 위에 투명한 비닐 캡 안에 안전하게 들어가 있다. 문양은 단순하다. 배추흰나비로 추정되는 나비 한 마리가 박제된 날개를 흐릿한 잉크 액에 담그고 있는 것 같다. 품격이 느껴질 만큼 우아한 날개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색감도 세월의 흐름 따라 세피아 톤으로 변했다. 그것이 귀하게 모셔져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실증적 인증 때문이다. 문양의 세련됨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감동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보여주기’가 전무한 상태다. ‘연로’한 노인네를 공경하는 존대처럼 그것의 짧지 않은 역사성에 후대 사람들은 현대적 잣대로 가치를 매긴다. 머리 아프지 않는 간단한 계산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연로한 우표’ 한 장의 가치를 매도해버리는 일로 그것이 지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인정해주는 자세는 온 가슴으로 옛 것을 대하던 오주석식의 ‘깊게 들여다보기’에 철저히 반(反)하는 자세다. 저자는 시종일관 풍부한 사료로 준비된 특강에서 그의 청중에게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는 감상을 하라고 부탁한다. 


자, 어떻게 하면 옛 사람의 눈과 마음을 지니게 되며, 그것이 준비되었을 때 바라보는 옛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달라 보이는가. “그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온몸으로 즐기는 것입니다. 온몸이 즐긴다고 할 때 기실은 우리의 영혼이 깊이 감동 받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술입니다. 옛 글에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18쪽)


지식의 앎과 더불어 즐겨야 한다는 말씀이렷다. 보름달이 뒷 동산에 두둥실 떠오를 때 꽃잎을 활짝 열어 달빛을 연모하는 가슴을 드러내는 달맞이꽃처럼 한결같고 진정성을 잃지 않는 좋아하는 마음부터 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여 즐겨야 한단다. 옛 것을 대하는 요령을 배우기전에 내면의 바람이 흐르는 방향부터 잡아야 한다는 오주석의 ‘옛 사람의 마음과 눈’을 품는 강의는 차라리 선(禪)의 자세를 떠올린다. 마음속의 이것저것 섞어 놓은 풍기(風氣)를 정돈하고 갈피를 잡고 좋아하고 즐기는 경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쉬운 특강으로 저절로 즐거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하여 책 한 권을 읽고나서 되짚어 술렁술렁 김홍도의 <씨름>, <주상관매도>와 백자 달 항아리와 발음하기도 어려운 <기로세련변계도>같은 수록된 도판을 들여다보았다. 해박한 전문가의 강의에는 그들만의 전문 용어에 앞서 세밀하고 꼼꼼하게 짚어주는 친절한 해설이 우선순위에 있다. 단순하고 간명한 강사의 설명에 옛 것을 대하는 부족한 대중의 소양은 감성지수가 물 오른 봄버들처럼 쭉쭉 뻗어 올라간다. 단순한 것의 미(美)라면 김홍도의 쓱쓱 그어진 담백한 먹선이나 우정국의 한 마리 나비우표나 별 반 차이가 없다. 단순한 것에 복합적인 덧씌우기로 치장을 하는 일은 불행하다. 물질주의 외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현대적 사고의 관점들 대부분이 이런 정신의 단순함을 외면하고 있기에 현대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몇 장의 화폐로 날림 되는 자극적이고 도태된 향락주의의 근성, ‘헛된 것의 美學’에 환호성을 지른다. 짜증난다. 그러는 와중에 오주석식의 간명하지만 세세한 옛 것의 들여다보기 美學을 만나면 마치 구도자와 대면한 듯한 깊은 감회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울려 나온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자, 옛 것을 상대하는 저자의 눈시울 뜨끈한 애정이다.


바짝 다가서서 바라보는 그림 한 점, 수많은 미술관 그림 중에서 오직 한 두개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오랜 시간 머무는 관람자. 옛 그림 속에는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 한 송이 고고하고, 속을 비어내고 또 다른 마디를 만들어내고 있는 대나무의 투명함이 흔들리고, 옛 사람의 얼굴에서 굴곡 많은 세월의 흔적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가 벗어놓은 도포자락에서 버드나무 아래에 앉았던 풀냄새가 난다. 방금, 그의 방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온 것처럼 그가 거처하는 방문 앞 대기가 그윽하다. 옛 그림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 천천히, 세밀하게, 거리를 조절하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음미하라고 미술적 관람자의 위치에서 안내를 해주고 있지만 저자가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애정’이다. 옛 사람의 마음과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설득 당하여 끝내는 옛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관람자의 경지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저자. 앞에서 어떻게 하면 옛사람의 마음과 눈을 가질 수 있는가 고민했다. 하지만 이것은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다. 억지로 만들지 말자. 이것은 개인적 취향에 앞서 옛 것을 알고 문화적 자존심을 궁극적인 자세로 알아보자는 자기성찰의 일이며 나아가 국가적 자긍심으로 연결된다. 너무 국수적인 발상이던가. 그렇다면 순 우리것을 찬양하고 흠모하는 자세로만 일관하는 이 책은 국수주의의 선두마차격이다. 이분법적인 발상 놀이를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의견에 집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화라는 명분아래 국가마다 고유화로 지닌 문화적 바코드나 아이템은 인류 공동체라는 함정 속에 함몰되어졌다. 고유의 것, 내 것, 너의 것을 존중해주고 인정해주는 일은 세계화보다 더 중요하다. 작은 것, 독특한 것, 고유의 정신을 고집하는 것, 이것이 언제부터 경제 방정식으로만 계산하는 선진국에 비하여 열등한 것이던가. 조선의 김홍도가 세상에는 단 한 명이고, 그가 그린 그 많은 대량양산의 상품 원본들도 원래는 단 한 점이다. 귀엽게 눈을 부릎뜬 민화속의 호랑이도 단 한 마리다. 리얼리즘의 최고 초상화로 불리는 이재의 초상화도 단 한 점이고, '나'라는 존재도 당신이라는 존재도 세상에는 단 한 명이다.  아둔한 독자의 머리통 위로 떨어진 화두 한 가지. 지구라는 작은 별이 획일적인 인스턴트 문화 종합세트로 향하는 현대에 '단 하나'의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려나. 이것은 유식한 영어로 'one and only'의 이야기다.


“문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우리인 까닭, 바로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문화인 ,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눈높이만큼만 올라설 수 있습니다.” -(책을 펴내며 中)

 

눈높이 한국의 美를 발견하고 확인하고, 알아채고 자긍심을 갖는 일과 함께 무지한 것으로부터의 위험성을 저자는 성토한다. 저자는 국수주의적 사관에서 무작정 우리것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유지하는 주체성을 다짐한다. 뭣 좀 알고 '한국의 美'를 얘기하자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한편으론 우리 문화재 상황을 잘 모르고 한편으론 또 그저 맹목적인 애국심에 불타 가지고 옛날 우리 물건이라면 무조건 소중하고 훌륭하다. 이렇게 치켜 올리는 얘기들도 많이 하는데, 실제로 썩 좋지 않은 작품을 가지고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경향까지 있습니다. .....중략..... 더군다나 혹간 형편없는 가짜 물건을 가지고서 좋다고 법석을 떠는 일까지 없지 않은데, 심지어는 학자들이 쓴 책 중에서도 엉터리 같은 가짜 작품이 수십 점씩 실려 있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는 결국 조상들의 문화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을 보이는 결과 밖에 안됩니다. 결국 문화라는 것은 그것을 향유하는 국민 전체의 눈높이가 높아져야지, 몇사람의 노력으로만 창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156~157쪽)

 

다시 흐릿한 우정국 우표 한 장을 들여다본다.

김홍도가 언제 개화기의 폭풍 치는 밤 시간에 다녀갔는가. 네모난 우표안의 나비가 순하게 잠자고 있다. 책의 말미에 집중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김홍도편>은 이 책의 또 다른 정성이다. 전공자들에게는 더 탐구적인 깊이를 요구할지 모르나 대중에게 이만큼 쉽고 간명한 해설과 선명한 눈요기와 신선한 자극을 전달하는 특강을 만나는 일도 흔한 일은 아니다. 대개 문화적 영역을 다루는 전문가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영역을 말 그대로 ‘스페셜’한 것으로 치장하려는 게 세태이기 때문이다. 수월한 것을 복잡하게 처리하려는 의도. 이것이 요즈음의 전공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요소다.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회성 포장술과 나르시시즘적인 눈요기를 두고 외세의 지배를 받은 화풍을 본보기로 몇 편 제시했다. 개화기 이후 우리들의 호랑이, 옛 선인들의 자태가 그저 잘 다듬어진 바비 인형처럼 예쁘기만 하고 멍청해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보여주기식의 겉치장에만 집착하느라고 혼을 놓쳐버린 개탄할 사건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의 열의적인 특강과 더불어 따로 엮어준 <김홍도편>은 단연코 무지몽매한 독자에겐 최고의 보너스였다. 꿈틀대는 조선 반도 땅의 수 많은 이야기를 돋보기로 들여다 본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은 그의 또 다른 책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과 더불어 귀하고 사랑스럽고 고결한 책으로 그의 안타까운 단명(短命)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세상은 뜨거운 사람들을 일찍 잠재우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무정하고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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