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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나 좀 봐 ㅣ 비룡소 그래픽노블
재럿 J. 크로소치카 지음, 양혜진 옮김 / 비룡소 / 2021년 6월
평점 :
무려 12년 동안 영화 촬영을 하며 메이슨이라는 꼬마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보이후드>라는 영화가 있다.
워낙 극찬이 자자했던 영화라서 그만큼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건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동안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극찬을 받은 걸까, 역시 12년 동안 같은 배우와 촬영하며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특수함 때문만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보이후드>의 진가는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 재럿 J. 크로소치카가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를 그려낸 자전적 그래픽노블 <헤이, 나 좀 봐>를 보고 영화 <보이후드>가 떠올랐다.
둘 다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의 이야기라는 공통점도 있으며 비슷하게 감상했기 때문이다.
<헤이, 나 좀 봐>는 시간상 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재럿의 할머니 셜리와 할아버지 조가 대학에서 만나 재럿의 엄마를 포함한 아이들을 낳고, 재럿의 엄마 레슬리가 밴드 기타리스트인 리처드를 만나서 재럿을 가지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재럿의 엄마와 아빠는 만남부터가 어긋났었는데, 리처드는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였고 레슬리가 임신하자 자기 아이가 아니라며 발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럿은 아빠 없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뿐이었다면 재럿이 이 그래픽노블을 그릴일은 없었을 테지만 레슬리가 또 문제였다.
레슬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도를 할 정도로 엄마로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는데, 실은 그녀는 헤로인 중독자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끊임없이 사고를 쳐왔고 가족도 눈에 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재럿은 어린 나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래픽노블에는 재럿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그러져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이 그래픽노블의 가장 큰 특징은 곳곳에 있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가와 가족의 과거에서 캐낸 유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신생아 건강 기록부나 사진이나 편지나 저자가 그렸던 그림 등이 실려있고, 그래픽노블 내에 등장하는 그림도 실제로 저자가 그렸던 그림을 넣었는데 두 점(조의 스케치나 로튼 랠프드로잉)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작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실린 그림과 기념품을 마주할 때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작가와 그의 가족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 더욱 이입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그래픽노블은 보기보다 더 섬세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작가가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덤덤하게 털어놓은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일조하는 거칠고 무채색의 만화에 유일하다시피 한 색채인 짙은 주황색은 작가 재럿을 키워준 할아버지 조의 포켓치프에서 가져온 것이었고(포켓치프는 작가의 딸의 애착담욕가 되었다고 하니 뭉클하다), 각 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기록물과 기념품 뒤에 위치한 파인애플 무늬 배경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할머니 셜리가 사둔 벽지 두루마리를 활용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실은 앞서 언급했던 영화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의 삶도 그렇고 더욱이 이 그래픽노블 <헤이, 나 좀 봐>의 주인공 재럿의 삶은 내 삶과 비슷한 부분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으니) 초반에는 내가 재럿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하는 감상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래픽노블을 보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었다.
점점 성장하는 재럿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환경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럿에게 역경도 있었지만 생명줄과도 같은 만화가 있었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든든한 부모님과 같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그리고 친구 패트릭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무엇보다 나는 힘든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덮어두기보다는 직시해야 한다는 재럿의 인생관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고 살아갔기에 재럿은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어린이책 작가이자 삽화가가 되고 2백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TED 강연을 할 수 있었을 테다.
“ 어린아이일 때, 청소년일 때에는 주어진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현실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 가족은 결속이 단단한 친구 무리일 수도 있고, 배우자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일 수도 있다. 요컨대 유년기의 현실이 꼭 성인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되도록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노력이 따른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나에게 “과거의 망령을 곱씹고 있으면 놈들이 널 잡으러 올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실상은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에서 온 유령들을 무시한다면 그것들이 당신을 잡으러 와서는 좀처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랬더라면 아주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어 심리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 그래픽노블은 재럿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나처럼 재럿과는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에도 가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흔히 책이 사람을 살린다고들 하지만, 나는 텅 빈 스케치북도 때론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수많은 스케치북을 그림으로 채웠고, 그것들이 내 삶을 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작가의 말 중에서<해당 후기는 비룡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