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착한 미술사 - 그동안 몰랐던 서양미술사의 숨겨진 이야기 20가지
허나영 지음 / 타인의사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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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상황은 예술에 영향을 주고 많은 예술 작품에는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에 역사는 미술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하며 미술 작품은 역사를 보다 흥미롭게 접할 수 하는, 서로 상승효과를 내는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다시 쓰는 착한 미술사>가 이를 보여주는 책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미술부터 20세기 미술까지를 20가지 이야기로 다루는 이 책을 읽으면 시대별 주요 미술사를 파악할 수 있고, 더욱이 작품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모습과 욕망까지 알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서평에 몇 가지만 말해보자면, <헤게소의 묘비>라고 불리는 비석을 소개하면서 고대 그리스의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직접 투표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치는 민주정치로 널리 알려졌지만 노예와 여성을 제외한 시민권을 가진 남성만이 참여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었는데, 아테네의 전성기를 이룬 정치가 페리클레스가 “어머니가 아테네 시민의 딸이어야만 진정한 시민”이라고 하여 어머니가 가문의 명성에 역할을 하게 된 이후로 아테네 여성의 묘비가 더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처음에 사진을 보았을 때에는 별 감흥이 없던 작품이 좀 더 흥미로워 보이게 했다.


(...) 어머니의 출신이 아테네 시민의 자격에 중요 요소가 되었고, 그만큼 가문의 명성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쯤 아테네 여성의 묘비가 더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우아하게 보석으로 치장을 하는 헤게소는 아테네 시민들의 귀감이 될 만한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이었다. 실제 이 묘비는 가족들만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기념비적인 조각들과 함께 길가에 설치되어 있었다. 즉 일반인들도 누구나 이 묘비를 보고 헤게소와 더 나아가 그의 가문의 높은 덕목을 칭송하게 한 것이다. 그렇기에 묘비 속 헤게소의 모습은 개성이 드러나기보다는 당시의 사회적 프레임 속에서 여성이 지녀야 할 덕목을 표현하고 있다.

p.30


장 바티스트 그뢰즈가 소작농의 딸이 약혼하는 모습을 그린 <마을의 약혼녀>는 사실적인 묘사로 작품으로 당시 농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약혼자의 손에 들린 약혼녀의 아버지가 준 지참금 주머니나 약혼을 위한 증명서를 작성하는 시청 직원의 모습을 통해 당시 농가의 약혼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을 비롯하여 전체적인 분위기가 약혼이라는 경사를 그린 것이 아니라 마치 초상집을 그린 듯하니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폭증하는 때에 이 책을 읽어서인지 흑사병과 스페인 독감에 대한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유명한 대작들이 대거 탄생하며 서양미술사의 큰 분기점이 된 르네상스 작품에서 흑사병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흑사병 때문에 예술계에도 어둠이 찾아왔을 것 같지만 반대로 신에게서 안전과 건강을 보장받으려는 유럽인들의 마음이 모여 유럽의 예배당이 화려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부유한 이들이 천국으로 향하는 열쇠를 사면서 (그러니까 물질적으로 후원을 했다는 말이다) 성당 내부도 예술 작품으로 장식되었다니 의외였다.


스페인독감이 속수무책으로 널리 퍼진 데에는 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도 있었지만, 이 병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있었다. 당시 16억 명 정도의 유럽 인구 중 6억 명이 독감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하니, 그 감염률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에 전염성을 막기 위해서 마스크를 의무화한 경우도 종종 있었고, 마스크를 쓰지 않는 남성이 전차 탑승을 거부당하는 모습이 촬영되기도 했다. 스페인독감은 1918년에 ‘무오년 독감’이란 이름으로 일본, 중욱 그리고 조선에도 유행하였다. 조선 내에서는 740만여 명이 감염되었고 그중 14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스페인독감 혹은 무오년 독감으로 불리는 감기는 전 세계에 퍼졌고 사람들은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혁신적인 미술을 이끌어가고 있던 두 화가도 스페인독감을 피하지 못했다.

p.306


또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스페인독감이 퍼졌다.
(전쟁에 영향이 갈 것을 걱정하여 언론을 통제한 다른 나라와 달리 새로운 독감의 심각성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스페인이 발원지가 아님에도 스페인독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니 스페인으로써는 참 억울한일이다)
스페인독감은 당시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차를 거부당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까지 있어 지금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더욱 와닿았다.

책에서는 스페인독감을 피하지 못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소개했는데, 둘은 스페인독감으로 엮이기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빈 분리파로 함께 활동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구스타프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입원한 병원에서 스페인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와 함께 하는 그림을 그리며 미래를 그리던 에곤 쉴레도 임신한 상태인 배우자 에디트가 스페인독감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서 동료와 아내와 아기를 잃고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알고 에곤 쉴레가 그린 <가족>을 보면 먹먹해진다.

또 이렇게 시대 상황이 작품에 반영되고 작품에 남은 당시의 흔적을 알아가다보니 지금 코로나19 팬데믹은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밖에도 성폭력으로 인해 끔찍한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그 고통을 설득력 있는 뛰어난 작품으로 그려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그 그림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는 몇 번을 봐도 강렬했고, 여성화가들에 대해 알 수 있는 부분도 좋았으며 미술 후원자들에 대한 이야기도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읽었다.


(...) 그런데 수잔 발라동의 경우 한 가지 독특한 작업을 병행했다. 모델을 따로 두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누드를 그리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누드 자화상’이다.
(...)
그녀가 노년에 그린 <가슴을 드러낸 자화상>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도발적이다. (...) 이 그림 속 여인은 신화의 주인공도 아름다운 몸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 앞에 앉아있다. 더구나 모델은 여성, 화가는 남성이라는 도식과 달리, 모델과 화가가 동일한 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이 그림을 들여다보게 한다.
더불어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여성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발라동 특유의 굵은 윤곽이 드러나는 그림이다. 그런데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름이 생기고 피부가 처치며 머리숱이 적어지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이기에 지울 수 있는 부분을 그대로 드러낸 것은 자기에 대한 긍정을 담고 있다. 이 그림 속 발라동은 분홍 드레스를 입고 즐거운 소녀도, 압생트로 괴로움을 달래는 세탁부도 아닌, 화가이자 어머니이며 여성인 한 사람의 모습이다.

p.335-337


책의 내용이 시간순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되기에 책에 담긴 이야기와 작품 중 하나만 고르자면 역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그의 작품은 꼭 보았으면 좋겠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그림과 같은 주제를 그린 다른 남성 화가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드러나는 그 차이가 당신에게도 무척 인상적일 것이다.


많은 성경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주제 역시 여러 작가들에 의해 표현된 바 있다. 하지만 아르테미시아의 것이 유독 살인의 현장을 끔찍하고도 현실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는 카라바조의 유디트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 하지만 유디트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카라바조의 것은 훨씬 가녀리다. (...)
이에 비해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는 훨씬 설득력을 갖는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장면에 몰입하게 하고, 오로지 살인에만 집중하게 한다.

p.174-175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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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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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요원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리 찾아보기 어렵지 않지만 영국 특수 작전국 요원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제임스 본드 같은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 MI6 요원으로 소속이나 하는 일이 다르지만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성 특수 요원 이야기라니, 여성 서사를 좋아하는 내가 이 소설을 건너뛸 수 있었을까?
이렇듯 처음에 <사라진 소녀들>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지만 막상 소설을 읽기 시작하니 진지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미국 뉴욕 그랜드센트럴 기차역에서 주인 없는 갈색 여행 가방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호기심에 그 가방을 열어보았다가 충동적으로 가방 안에 있던 사진 뭉치를 가져와버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진 뭉치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하지만 그 사이 여행 가방은 사라지고 가방의 주인인 엘레노어 트리그는 그레이스가 여행 가방을 발견했던 그날 아침 기차역 앞에서 차사고로 세상을 떠났음이 밝혀졌다.
그레이스는 소녀들의 모습이 담긴 그 사진 뭉치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래, 여자들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레고리가 반문했다.
“남자 요원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는 겁니다.” 엘레노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한 일을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비밀 메시지를 전하는 급사 역할부터 무선통신기 메세지를 해독하는 것 외에 파르티잔을 무장시키고 다리를 폭파하는 겁니다.” 실제로 여성들은 아이를 돌보는 데서 벗어나 지역 의용군으로 활약하며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대공포(항공기 사격에 사용되는 양각이 큰 포 옮긴이)를 담당하고 비행기를 조종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자 요원을 프랑스에 보내자는 개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가?

p.26


엘레노어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3년 영국 특수작전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특수작전국이 프랑스에 파견한 특수 요원들은 속속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젊은 남성들은 입대하거나 입대 거부로 수감되어있어 남성 요원이 활동하면 곧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엘레노어는 여성 요원을 양성해서 파견하는 것을 제안했고, 특수작전국 회의실 내 남자들은 여성 요원은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장의 신임을 받아 이 일의 총책임자가 된다.

그렇게 여성 특수 요원 일을 전담하게 된 엘레노어에게 선발된 여성 중 한 명이 마리다.
마리는 도시에서 홀로 일하고 있었으며 주말에는 시골에 사는 숙모에게 맡겨 둔 어린 딸과 지내는 것이 낙이었는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특수 요원 후보로 선택된 것이다.

프랑스에 배치되는 특수 요원은 군수품 공급을 늦추거나 철로를 파괴하는 등 독일군의 계획을 방해해서 공격 때가 되었을 때 아군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질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을 하고, 여성 요원도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선 통신뿐만 아니라 다른 임무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위험천만한 일을맡는 만큼 먼저 훈련을 통과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빨리 떠나게 됐어.” 조시가 설명했다. “훈련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현장에 배치할 모양이야.”
(...)
“이제 떠날 수가 없어졌네.” 조시가 마리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앞으로 새로 오는 애들 챙겨 주려면 누군가 남아 있어야 하잖아.” 텅 빈 침대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마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시의 농담 섞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벌써 마리 뒤로 세 명이 들어왔고, 이전에 있던 소녀 중 몇은 작전 현장에 배치된 상태였다.
“내가 떠나고 나면 내 자리에 새로운 훈련생이 도착하겠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조시의 말이 옳았다. 마리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조시와 다른 소녀들이 도와준 것처럼 누군가 새로 와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p.129-130


그래서 마리도 스코틀랜드로 떠나 다른 소녀들과 함께 힘든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뚜렷한 목적 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높은 봉급과 호기심 때문에 특수 요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데다 무엇보다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부모 없이 살아가게 될 딸이 있는 마리에게 역시 고비가 찾아왔다.
하지만 딸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 일에 성공하여 딸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하자 딸의 존재가 마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함께 훈련 받는 동료 조시 덕분에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하여 마리는 딸의 사진을 담은 나비 목걸이는 엘레노어에게 건내고 스스로 숨을 끊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필요한 청산가리 캡슐이 들어있는 새 목걸이를 받아 특수 요원으로서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레이스가 말을 막고 물었다. “배신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당연히 요원 중에서 배신자가 있었다는 거죠.” 순간 그레이스는 창고 바닥이 살짝 밑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발로 독일놈들을 찾아가서 체포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도 못 했죠? 그럴 만도 하죠.” 애니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던졌다.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어요.” 그레이스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애써 덤덤한 척하려고 애썼다. 괜히 애니의 말을 막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혹은 안전가옥이라고 생각하여 안심한 곳에서 보안대나 독일 비밀경찰에 붙잡혀 간 사람들이 있었어요.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 지역에서요. 누군가 비밀을 누설한 거죠. 적어도 엘레노어는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p.283


소설은 이렇게 그레이스, 엘레노어, 마리 세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교대로 읽으며 독자는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국방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이 소설 이전에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여러 편 쓴 여성 작가(팜 제노프)가 쓴, 여성(그레이스)이 역사에서 사라진 여성들(제2차 세계 대전 때 활동한 여성 요원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이야기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촘촘하고 탄탄하게 쓰였다.

여러 역사책을 볼 때면 그간의 역사(History)는 사실상 남성의 역사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책을 만날 때면 역사의 한복판에 분명 여성이 있었음을 상기하게 되고, 여성의 용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 현실까지 이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더욱 뒷맛을 남기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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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 떠돌이 을불
김진명 지음 / 이타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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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해 가장 기대했던 드라마였으며 응원하며 시청한 <달이 뜨는 강>은 내게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평강(염가진)이라는 여성 주인공의 활약이고, 다른 하나는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다.
<달이 뜨는 강>은 그 유명한 <평강 공주와 바보 온달>이야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되었는데, 고위 귀족 앞에서 맥을 못추는 왕 때문에 고생하는 평강을 보며 고구려는 도대체 어떤 나라였기에 왕권이 이 모양인가! 하고 분노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드라마를 보면 볼수록 고구려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고구려를 향한 관심은 드라마가 종영된 지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김진명 작가의 역사 소설 <고구려>를 읽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고구려의 위기를 알리면서 시작된다.

서천왕이 서거하고 장자 상부가 봉상왕으로서 그 뒤를 이었지만 상부는 왕의 그릇은커녕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소인배 중 소인배였는데, 자신도 그것을 아는지 역모를 크게 두려워하여 충신도 다른 왕족도 역모죄를 뒤집어 씌워 죽여버렸다.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바로 안국군 달가였다.
안국군 달가는 서천왕의 동생이며 나라 최고의 영웅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그게 상부의 열등감을 자극했는지 역모죄인으로 몰린 것이다.
그러자 안국군 달가는 신뢰하는 심복인 지략가 창조리의 조언을 받아들여 의로운 후사를 살리기 위해 순순히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독초즙을 받는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씀을 드려야 했기에 먼저 제 손가락을 잘라 용서를 구합니다.”
“말하게.”
(...)
“상부는 그 누구보다도 돌고 공을 우선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학문을 좋아하고 성정이 온순한 돌고 공이 차자(次子)인 것을 늘 안타까워하셨기에 옹졸한 상부는 깊은 질투를 키워왔습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반대했던 신하들이 돌고 공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던 걸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진의 사신으로 인해 돌고 공으로 향하던 칼끝이 대장군에게 먼저 겨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으음!”
“이것은 운명입니다.”
선언하듯 내뱉는 창조리의 말에 고구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대장군께서는 죽음으로써 후사(後嗣)를 살리는 것입니다. 의로운 후사가 이어진다는 건 바로 상부의 날이 줄어드는 이치입니다.”
“으하하하하!”
갑자기 안국군이 대소했다.
“으하하하, 하하하하!”
거침없이 웃어젖히던 안국군이 웃음을 뚝 그치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창조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는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님께 이렇게 떳떳할 수가 있나!”
“고구려의 밀알이 되시는 겁니다.”
“내 기꺼이 웃으며 죽음을 맞으리라!”
안국군의 쉰 목소리는 고구와 창조리의 흐느끼는 소리에 묻혀갔다.

p.35-36


안국군 달가가 돌고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에게 겨누어진 칼끝을 그대로 받은 한편, 돌고는 자신의 견제하는 형 상부 앞에서 넙죽 엎드리며 목숨를 보전하고 있었는데,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결기가 있던 을불은 그런 아버지 돌고가 영 못마땅했으며 자신이 따랐던 종조부 안국군 달가의 죽음에 분노했다.
어린 을불은 결국 상부 앞에서도 순간 분노를 숨기지 못했고, 그 때문에 돌고는 죽고 을불은 다루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을불은 그제서야 아버지가 상부에게 비굴하게 군 것이 모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나 을불은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떠돌아 다니던 중 적국 낙랑의 무예총위 양운거와 그의 딸 소청과 인연이 닿아 무예를 더욱 익히게 되는데, 양 부녀와 사이가 좋은 을불을 질투한 방정균이 을불을 첩자로 몰아 그들을 떠나게 된다.

이때 조용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양운거와 소청이 자신을 쉬이 잊도록 방정균의 계략대로 자신이 첩자라는 근거가 되는 편지까지 남기는 것을 보고 을불의 그릇이 크고 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을불은 그제야 방정균이 지금까지 자신으로 인해 무척 괴로워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눈앞에서 소리도 없이 사랑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을불은 한참을 고심하다 말했다.
“떠나지. 그런데 떠나기 전에 편지를 한 장 써야겠어.”
“무슨 편지를......? 음, 그렇게 하게.”
정균은 을불이 어떤 글을 남기든 그가 떠나고 난 후 그냥 없애버리리라 생각했다. 쓸데없는 감정이 담긴 편지를 보면 스승 부녀는 그를 잊기 어려울 것이었다.
잠시 후 글을 마친 을불이 정균을 돌려세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는 그가 볼 수 있도록 펼쳐진 채였다.

낙랑 간세 다루가 보고함. 낙랑의 진법은 팔괘진과 차륜진이 자유자재로 결합하는.......

을불이 쓴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방정균이 놀라 물었다.
“이건 뭐지? 왜 이런 이상한 글을 남기는 거지, 마치 진짜 간세처럼?
“소청의 마음이 아플 거야. 이런 거라도 있으면 잊기 쉬울 테지.”
을불의 속 깊은 배려에 방정균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찡해왔다.
“다루,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어차피 나는 소청과 무엇도 이룰 수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소청은 분명 좋은 여자지. 정균, 자네가 행복하게 해주게.”
간세 아닌 간세가 되어 을불은 그렇게 낙랑을 떠났다.

p.111-112


이런 을불이 다양한 인연을 만나 성장하니, 그가 안국군 달가를 따르던 이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여 종조부 안국군 달가와 아버지 돌고의 원수이자 사치와 폭정으로 고구려 백성들을 고달프게 만드는 폭군 상부를 끌어내리는 길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 소설 <고구려>를 읽는 것은 마치 사극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특히 안국군 달가와 창조리의 대화나 동맹제 비무 대회에서 함께 겨룬 것을 계기로 하루만에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 을불과 여노 두 영웅의 맹약 장면은 벅찬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선견지명과 두둑한 배포를 가진 고구려 여인 주아영과 그에게 은혜를 입었으며 그때 지혜롭고 아름다운 주아영에게 빠져버린 북쪽 모용부의 젊은 족장 붉은 머리 모용외 등, 주인공 을불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 또한 뚜렷하게 각자의 매력이 있어서 영상을 보는 것마냥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지고, 또 <고구려>는 그런 이들의 관계성 맛집이라 어느 하나 흥미롭지 않은 장면이 없었다.


“말은 내줄 수가 없습니다.”
“얘야, 우리한테 마필은 충분한데 어찌 그러는 것이냐?”
“우리는 장사꾼입니다. 뻔히 손해를 볼 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
“오직 죽으려고만 발버둥 치는 멍청이들에게는 말 두 필도 아깝다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용외가 분기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이 모용외가 고작 말 두 필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구나. 내 비록 은혜를 입었다고는 하나 이 수치를 어찌 견디겠는가!”
“은혜를 입어 살아난 목숨을 보중치 않고 내던지려는 마당에 어찌 또 수치를 걱정하시오?”
“이놈, 그 입을 다물라!”
(...)
칼이 긋고 지나가자 두건이 떨어짐과 동시에 말아 올렸던 긴 머리가 출렁 쏟아져 내리며 사내의 본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모용외의 누에 그간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내의 얼굴이 자연스레 꽉 들어와 찼다.
“여인이었는가!”

p.207-208


“부디 나에게 가르침을 주시오. 다시 한번 모용부의 깃발이 휘날릴 수 있도록 말이오.”
모용외를 지켜보던 아영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선 극성을 피하세요. 외곽에서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으며 도적들을 토벌하여 수하로 삼고 그들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우세요. 앞으로 당신이 다시 일어서기까지 필요한 식량과 철제 무기를 가져다드릴 거예요. 대가는 훗날 받도록 하지요.”
모용외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땅에 찧었다.
“은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주아영이라 합니다.”

p.211-212


“나 모용외가 천하를 얻는다 한들 그녀를 얻지 못하면 결코 황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p.200


그렇다보니 300여 페이지는 술술 넘어갔고, 드라마 한 편을 보고나면 다음 편을 방송하는 날만 기다리게 되는 것처럼 지금 나는 <고구려> 2권을 읽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고구려 #김진명 #이타북스

<이 리뷰는 서포터즈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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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나 좀 봐 비룡소 그래픽노블
재럿 J. 크로소치카 지음, 양혜진 옮김 / 비룡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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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2년 동안 영화 촬영을 하며 메이슨이라는 꼬마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 <보이후드>라는 영화가 있다.
워낙 극찬이 자자했던 영화라서 그만큼 기대감을 가지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건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동안 이 영화가 왜 그렇게 극찬을 받은 걸까, 역시 12년 동안 같은 배우와 촬영하며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특수함 때문만이었나 싶었다.
그러나 <보이후드>의 진가는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 재럿 J. 크로소치카가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를 그려낸 자전적 그래픽노블 <헤이, 나 좀 봐>를 보고 영화 <보이후드>가 떠올랐다.
둘 다 소년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의 이야기라는 공통점도 있으며 비슷하게 감상했기 때문이다.



<헤이, 나 좀 봐>는 시간상 좀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재럿의 할머니 셜리와 할아버지 조가 대학에서 만나 재럿의 엄마를 포함한 아이들을 낳고, 재럿의 엄마 레슬리가 밴드 기타리스트인 리처드를 만나서 재럿을 가지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재럿의 엄마와 아빠는 만남부터가 어긋났었는데, 리처드는 여자친구가 있는 상태였고 레슬리가 임신하자 자기 아이가 아니라며 발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럿은 아빠 없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뿐이었다면 재럿이 이 그래픽노블을 그릴일은 없었을 테지만 레슬리가 또 문제였다.

레슬리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절도를 할 정도로 엄마로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는데, 실은 그녀는 헤로인 중독자였기 때문에 이전부터 끊임없이 사고를 쳐왔고 가족도 눈에 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재럿은 어린 나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자라게 되었고, 그래픽노블에는 재럿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그러져 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이 그래픽노블의 가장 큰 특징은 곳곳에 있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작가와 가족의 과거에서 캐낸 유물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신생아 건강 기록부나 사진이나 편지나 저자가 그렸던 그림 등이 실려있고, 그래픽노블 내에 등장하는 그림도 실제로 저자가 그렸던 그림을 넣었는데 두 점(조의 스케치나 로튼 랠프드로잉)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작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실린 그림과 기념품을 마주할 때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작가와 그의 가족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니 더욱 이입이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 그래픽노블은 보기보다 더 섬세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었다.

작가가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덤덤하게 털어놓은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데 일조하는 거칠고 무채색의 만화에 유일하다시피 한 색채인 짙은 주황색은 작가 재럿을 키워준 할아버지 조의 포켓치프에서 가져온 것이었고(포켓치프는 작가의 딸의 애착담욕가 되었다고 하니 뭉클하다), 각 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기록물과 기념품 뒤에 위치한 파인애플 무늬 배경은 파인애플을 좋아하던 할머니 셜리가 사둔 벽지 두루마리를 활용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실은 앞서 언급했던 영화 <보이후드>의 주인공 메이슨의 삶도 그렇고 더욱이 이 그래픽노블 <헤이, 나 좀 봐>의 주인공 재럿의 삶은 내 삶과 비슷한 부분이라고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으니) 초반에는 내가 재럿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런 삶도 있구나’하는 감상 그 이상을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래픽노블을 보며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었다.
점점 성장하는 재럿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어린시절과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돌아보게 되었고, 그러면서 환경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잡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럿에게 역경도 있었지만 생명줄과도 같은 만화가 있었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든든한 부모님과 같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그리고 친구 패트릭과 같은 소중한 존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무엇보다 나는 힘든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기 위해 덮어두기보다는 직시해야 한다는 재럿의 인생관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런 깨달음을 얻고 살아갔기에 재럿은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어린이책 작가이자 삽화가가 되고 2백만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한 TED 강연을 할 수 있었을 테다.


“ 어린아이일 때, 청소년일 때에는 주어진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현실과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 가족은 결속이 단단한 친구 무리일 수도 있고, 배우자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일 수도 있다. 요컨대 유년기의 현실이 꼭 성인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되도록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노력이 따른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나에게 “과거의 망령을 곱씹고 있으면 놈들이 널 잡으러 올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실상은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에서 온 유령들을 무시한다면 그것들이 당신을 잡으러 와서는 좀처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랬더라면 아주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성인이 되어 심리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 그래픽노블은 재럿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나처럼 재럿과는 다른 길을 걷는 사람의 마음에도 가닿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 흔히 책이 사람을 살린다고들 하지만, 나는 텅 빈 스케치북도 때론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수많은 스케치북을 그림으로 채웠고, 그것들이 내 삶을 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작가의 말 중에서





<해당 후기는 비룡소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한 저의 솔직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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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의 단식법
샘 J. 밀러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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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대였을 적에도 식이장애를 겪는 청소년이 있었지만 요즘은 거식증을 동경하기까지 하는 ‘프로아나(Pro-ana)’나 ‘개말라인간’ 같은 신조어가 SNS를 타고 청소년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니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이런 시점이기에 더욱이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십대 게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등장은 눈길을 끌었고, 청소년 섭식 장애와 초능력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워 보여서 읽고 싶었다.
그리고 <슈퍼히어로의 단식법>은 청소년 섭식 장애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는 덤이다.

맷은 굶으면 굶을수록 후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이 예민해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순간이동이나 시간을 멈추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맷은 계속해서 식사량을 줄여나갔고, 초능력을 발휘하며 타리크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한다.


나는 엄마의 유심 칩을 마야 누나의 유심 칩으로 바꿨다. 그리고 타리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 타리크에게는 누나가 보낸 메시지로 보일 것이었다.
다 말할 거야.
거의 곧바로 엄마의 핸드폰이 내 손안에서 진동했다. 발신자가 <타리크>로 떴다. 나는 빨간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거절했다.
문자가 왔다.
제발 그러지 말아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침묵을 고수했다.
타리크에게서 두 번째 문자가 왔다. 그러면 내 인생이 망가질 거야.
이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마치 네가 누나 인생을 망친 것처럼 말이지?
두 번째 전화가 왔다. 나는 그것을 다시 거절했다. 그러고는 5분 뒤, 다리크가 문자를 보내왔다. 왜 내게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거야?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나눴잖아.
그렇군. 뭔가 있긴 했다는 건데....... 나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 그래서 다음 말을 매우, 매우 신중히 골라야 했다. 왜냐하면 한 번만 잘못해도 타리크가 내 꿍꿍이를 눈치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p.96


타리크는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고, 엄마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지만 맷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맷의 누나 마야는 어째서 집을, 맷을 떠난 것일까?
무엇보다 굶으면 발휘되는 맷의 초능력은 진짜일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허기가 야기한 흐릿해진 정신으로 인한 환각 같은 것일까?
소설은 이런 궁금증을 유발하여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나는 타리크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제대로 들이마셨다. 모든 표면적인 냄새를 뒤로하고, 그가 지나온 세상의 악취도 무시하고...... 그의 냄새, 그의 신체의 겉껍질 냄새도 보내 버렸다. 땜내와 머리 냄새와 침 냄새까지 전부.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외로움이었다.

p.107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했을 맷의 초능력의 실체에 대해서는 작가가 밀당을 제대로 한다.
나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져서 후각과 미각은 극도로 예민해지지만 사고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굶으면 굶을수록 강해지는 맷의 초능력이 그저 맷의 착각이며 상상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초능력을 단순히 맷의 상상력과 착각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초능력의 결과물이 실재하는 것이, 이 소설은 거식증을 겪는 게이 버전의 <캐리>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맷의 초능력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생각이 왔다갔다 하게 된다.


“네 손이 차.” 타리크가 내 손 한쪽을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순환이 잘 안 돼.”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순환 장애는 수많은 섭식 장애 사례에서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라는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전에도 누차 강조했듯...... 나는 섭식 장애에 해당하지 않으니까.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네 손톱도 징그럽게 생겼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했다. 손톱 퇴화도 수많은 섭식 장애 사례에서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지.
“흠.”
타리크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그는 내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더 안 좋게 만들기도 했다. (...) 하지만 그를 바라볼 때면, 그를 만질 때면, 내 부족함을 전보다 더욱 예리하게 느끼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강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남자가 있어. 여기에는 네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존재가 있어.

p.290


작가는 또 섭식 장애를 겪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작가도 게이이며 섭식 장애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맷은 음식 거부를 합리화하며 반복적으로 자신이 섭식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지만 섭식 장애 증상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맷이 섭식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앞에 그렇게 요리가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지방과 전분과 소금 덩어리였다.
국수는 둥지처럼 쌓여 있었다. <어쩌면 반쯤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전부 그대로 있는> 형상으로 자잘하게 자르기도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젓가락을 들고 그것을 찔러 봤다. 모두가 자신의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줄었다. 나는 대화가 다시 시작되기를, 신경을 분산시켜 주는 뭔가가 나타나기를, 내게 어떻게 행동할지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무릎 위에 휴지를 펼치고 아무도 안 볼 때 그 위로 음식 덩어리를 떨군 뒤, 휴지를 잘 접어 의자 밑에 남겨 두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타리크가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 볼 것이 확실했다. 그는 아마.......
“너 배 안 고파?” 타리크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기민하고 예리했다.
나는 당황했다. “미안해.” 나는 사과하며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가득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빌어먹을 몸아. 나는 생각하며 맛있는 돼지 지방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내 몸이 다시 능력을 끄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아드레날린의 속도를 늦췄다. 과민해졌던 감각들을 안정시켰다.

p.347-348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행위이지만 또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으로 먹는 행위를 제한하는 맷은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독자나 섭식 장애를 경험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다못해 트라우마를 자극할 것 같을 정도로 생생한데, 소설을 다 읽고나니 그렇기에 맷이 털어놓는 고백 같은 이 이야기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섭식 장애를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그러니까 섭식 장애 증상과 후유증을 알 수 있어 섭식 장애를 초기에 바로 잡고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오늘은 세상의 모든 맷을 응원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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