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의 단식법
샘 J. 밀러 지음, 이윤진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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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십대였을 적에도 식이장애를 겪는 청소년이 있었지만 요즘은 거식증을 동경하기까지 하는 ‘프로아나(Pro-ana)’나 ‘개말라인간’ 같은 신조어가 SNS를 타고 청소년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니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이런 시점이기에 더욱이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십대 게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등장은 눈길을 끌었고, 청소년 섭식 장애와 초능력의 조합이 무척 흥미로워 보여서 읽고 싶었다.
그리고 <슈퍼히어로의 단식법>은 청소년 섭식 장애를 가볍게 다루지 않으면서도 생생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나를 사로잡았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분명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는 덤이다.

맷은 굶으면 굶을수록 후각, 청각, 촉각 등 감각이 예민해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순간이동이나 시간을 멈추는 일도 가능했던 것이다.
맷은 계속해서 식사량을 줄여나갔고, 초능력을 발휘하며 타리크와 가까워지는 데 성공한다.


나는 엄마의 유심 칩을 마야 누나의 유심 칩으로 바꿨다. 그리고 타리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 타리크에게는 누나가 보낸 메시지로 보일 것이었다.
다 말할 거야.
거의 곧바로 엄마의 핸드폰이 내 손안에서 진동했다. 발신자가 <타리크>로 떴다. 나는 빨간 버튼을 누르며 전화를 거절했다.
문자가 왔다.
제발 그러지 말아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침묵을 고수했다.
타리크에게서 두 번째 문자가 왔다. 그러면 내 인생이 망가질 거야.
이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마치 네가 누나 인생을 망친 것처럼 말이지?
두 번째 전화가 왔다. 나는 그것을 다시 거절했다. 그러고는 5분 뒤, 다리크가 문자를 보내왔다. 왜 내게 그런 짓을 하겠다는 거야?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나눴잖아.
그렇군. 뭔가 있긴 했다는 건데....... 나는 그것이 뭔지 몰랐다. 그래서 다음 말을 매우, 매우 신중히 골라야 했다. 왜냐하면 한 번만 잘못해도 타리크가 내 꿍꿍이를 눈치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p.96


타리크는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고, 엄마도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하지만 맷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맷의 누나 마야는 어째서 집을, 맷을 떠난 것일까?
무엇보다 굶으면 발휘되는 맷의 초능력은 진짜일까, 아니면 고통스러운 허기가 야기한 흐릿해진 정신으로 인한 환각 같은 것일까?
소설은 이런 궁금증을 유발하여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든다.


나는 타리크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그의 냄새를 들이마셨다. 제대로 들이마셨다. 모든 표면적인 냄새를 뒤로하고, 그가 지나온 세상의 악취도 무시하고...... 그의 냄새, 그의 신체의 겉껍질 냄새도 보내 버렸다. 땜내와 머리 냄새와 침 냄새까지 전부.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외로움이었다.

p.107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 했을 맷의 초능력의 실체에 대해서는 작가가 밀당을 제대로 한다.
나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기간이 길어져서 후각과 미각은 극도로 예민해지지만 사고는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 굶으면 굶을수록 강해지는 맷의 초능력이 그저 맷의 착각이며 상상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초능력을 단순히 맷의 상상력과 착각의 산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초능력의 결과물이 실재하는 것이, 이 소설은 거식증을 겪는 게이 버전의 <캐리>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맷의 초능력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생각이 왔다갔다 하게 된다.


“네 손이 차.” 타리크가 내 손 한쪽을 들어 보이며 속삭였다.
“순환이 잘 안 돼.” 내가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순환 장애는 수많은 섭식 장애 사례에서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라는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전에도 누차 강조했듯...... 나는 섭식 장애에 해당하지 않으니까.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네 손톱도 징그럽게 생겼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로 어깨를 으쓱했다. 손톱 퇴화도 수많은 섭식 장애 사례에서 발견되는 증상 중 하나지.
“흠.”
타리크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그는 내 기분이 나아지게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더 안 좋게 만들기도 했다. (...) 하지만 그를 바라볼 때면, 그를 만질 때면, 내 부족함을 전보다 더욱 예리하게 느끼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곳에는 그야말로 강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남자가 있어. 여기에는 네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존재가 있어.

p.290


작가는 또 섭식 장애를 겪는 사람의 행동과 사고방식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작가도 게이이며 섭식 장애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맷은 음식 거부를 합리화하며 반복적으로 자신이 섭식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지만 섭식 장애 증상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는 맷이 섭식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 앞에 그렇게 요리가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지방과 전분과 소금 덩어리였다.
국수는 둥지처럼 쌓여 있었다. <어쩌면 반쯤 먹었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전부 그대로 있는> 형상으로 자잘하게 자르기도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마침내 젓가락을 들고 그것을 찔러 봤다. 모두가 자신의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줄었다. 나는 대화가 다시 시작되기를, 신경을 분산시켜 주는 뭔가가 나타나기를, 내게 어떻게 행동할지 대책을 강구할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무릎 위에 휴지를 펼치고 아무도 안 볼 때 그 위로 음식 덩어리를 떨군 뒤, 휴지를 잘 접어 의자 밑에 남겨 두는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타리크가 너무 가까이 앉아 있어 볼 것이 확실했다. 그는 아마.......
“너 배 안 고파?” 타리크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기민하고 예리했다.
나는 당황했다. “미안해.” 나는 사과하며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가득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
빌어먹을 몸아. 나는 생각하며 맛있는 돼지 지방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내 몸이 다시 능력을 끄기 시작했다. 질주하는 아드레날린의 속도를 늦췄다. 과민해졌던 감각들을 안정시켰다.

p.347-348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행위이지만 또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으로 먹는 행위를 제한하는 맷은 섭식 장애를 겪고 있는 독자나 섭식 장애를 경험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다못해 트라우마를 자극할 것 같을 정도로 생생한데, 소설을 다 읽고나니 그렇기에 맷이 털어놓는 고백 같은 이 이야기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섭식 장애를 가진 사람의 사고방식과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그러니까 섭식 장애 증상과 후유증을 알 수 있어 섭식 장애를 초기에 바로 잡고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오늘은 세상의 모든 맷을 응원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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