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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
팜 제노프 지음, 정윤희 옮김 / 잔(도서출판) / 2021년 7월
평점 :
특수 요원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그리 찾아보기 어렵지 않지만 영국 특수 작전국 요원이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제임스 본드 같은 남자를 떠올리게 된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 MI6 요원으로 소속이나 하는 일이 다르지만 이미지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성 특수 요원 이야기라니, 여성 서사를 좋아하는 내가 이 소설을 건너뛸 수 있었을까?
이렇듯 처음에 <사라진 소녀들>을 읽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지만 막상 소설을 읽기 시작하니 진지하고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46년 미국 뉴욕 그랜드센트럴 기차역에서 주인 없는 갈색 여행 가방을 발견한 그레이스는 호기심에 그 가방을 열어보았다가 충동적으로 가방 안에 있던 사진 뭉치를 가져와버렸는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진 뭉치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하지만 그 사이 여행 가방은 사라지고 가방의 주인인 엘레노어 트리그는 그레이스가 여행 가방을 발견했던 그날 아침 기차역 앞에서 차사고로 세상을 떠났음이 밝혀졌다.
그레이스는 소녀들의 모습이 담긴 그 사진 뭉치가 어쩐지 마음에 걸려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래, 여자들이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레고리가 반문했다.
“남자 요원들이 하는 일을 똑같이 하는 겁니다.” 엘레노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한 일을 일일이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비밀 메시지를 전하는 급사 역할부터 무선통신기 메세지를 해독하는 것 외에 파르티잔을 무장시키고 다리를 폭파하는 겁니다.” 실제로 여성들은 아이를 돌보는 데서 벗어나 지역 의용군으로 활약하며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대공포(항공기 사격에 사용되는 양각이 큰 포 옮긴이)를 담당하고 비행기를 조종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자 요원을 프랑스에 보내자는 개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가?
p.26
엘레노어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1943년 영국 특수작전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특수작전국이 프랑스에 파견한 특수 요원들은 속속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젊은 남성들은 입대하거나 입대 거부로 수감되어있어 남성 요원이 활동하면 곧잘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엘레노어는 여성 요원을 양성해서 파견하는 것을 제안했고, 특수작전국 회의실 내 남자들은 여성 요원은 말도 안 된다며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장의 신임을 받아 이 일의 총책임자가 된다.
그렇게 여성 특수 요원 일을 전담하게 된 엘레노어에게 선발된 여성 중 한 명이 마리다.
마리는 도시에서 홀로 일하고 있었으며 주말에는 시골에 사는 숙모에게 맡겨 둔 어린 딸과 지내는 것이 낙이었는데,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특수 요원 후보로 선택된 것이다.
프랑스에 배치되는 특수 요원은 군수품 공급을 늦추거나 철로를 파괴하는 등 독일군의 계획을 방해해서 공격 때가 되었을 때 아군이 조금이라도 수월해질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을 하고, 여성 요원도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선 통신뿐만 아니라 다른 임무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위험천만한 일을맡는 만큼 먼저 훈련을 통과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빨리 떠나게 됐어.” 조시가 설명했다. “훈련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현장에 배치할 모양이야.”
(...)
“이제 떠날 수가 없어졌네.” 조시가 마리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앞으로 새로 오는 애들 챙겨 주려면 누군가 남아 있어야 하잖아.” 텅 빈 침대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마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시의 농담 섞인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벌써 마리 뒤로 세 명이 들어왔고, 이전에 있던 소녀 중 몇은 작전 현장에 배치된 상태였다.
“내가 떠나고 나면 내 자리에 새로운 훈련생이 도착하겠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조시의 말이 옳았다. 마리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조시와 다른 소녀들이 도와준 것처럼 누군가 새로 와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p.129-130
그래서 마리도 스코틀랜드로 떠나 다른 소녀들과 함께 힘든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뚜렷한 목적 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높은 봉급과 호기심 때문에 특수 요원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데다 무엇보다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면 부모 없이 살아가게 될 딸이 있는 마리에게 역시 고비가 찾아왔다.
하지만 딸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 일에 성공하여 딸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주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하자 딸의 존재가 마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함께 훈련 받는 동료 조시 덕분에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하여 마리는 딸의 사진을 담은 나비 목걸이는 엘레노어에게 건내고 스스로 숨을 끊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필요한 청산가리 캡슐이 들어있는 새 목걸이를 받아 특수 요원으로서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되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레이스가 말을 막고 물었다. “배신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당연히 요원 중에서 배신자가 있었다는 거죠.” 순간 그레이스는 창고 바닥이 살짝 밑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발로 독일놈들을 찾아가서 체포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상상도 못 했죠? 그럴 만도 하죠.” 애니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대답을 던졌다.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도 있어요.” 그레이스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애써 덤덤한 척하려고 애썼다. 괜히 애니의 말을 막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혹은 안전가옥이라고 생각하여 안심한 곳에서 보안대나 독일 비밀경찰에 붙잡혀 간 사람들이 있었어요.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 지역에서요. 누군가 비밀을 누설한 거죠. 적어도 엘레노어는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p.283
소설은 이렇게 그레이스, 엘레노어, 마리 세 사람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교대로 읽으며 독자는 진실에 다가간다.
그리고 국방부에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이 소설 이전에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여러 편 쓴 여성 작가(팜 제노프)가 쓴, 여성(그레이스)이 역사에서 사라진 여성들(제2차 세계 대전 때 활동한 여성 요원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이야기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촘촘하고 탄탄하게 쓰였다.
여러 역사책을 볼 때면 그간의 역사(History)는 사실상 남성의 역사나 다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책을 만날 때면 역사의 한복판에 분명 여성이 있었음을 상기하게 되고, 여성의 용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 현실까지 이어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더욱 뒷맛을 남기는 것이겠지.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지원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